소설리스트

50화 (53/319)

50화

율리아는 갈라진 목소리를 간신히 다듬고 말했다. 뒤에서 말없이 두 사람을 바라보던 코코가 고개를 돌리며 작게 헛기침을 했다. 기침하는 코코의 목소리도 조금 떨렸다.

자유.

알렉사는 그 단어를 듣고, 새기고, 곱씹었다.

죽는 날까지 절대 가질 수 없을 줄만 알았던 자유.

꿈꾸는 것조차 힘에 부쳐서 그저 시간이 빨리 흘러 어느 날 고통 없이 죽기만을 바랐다. 차라리 저보다 월등히 강한 상대를 만나서 그가 이 불행한 삶을 끝내주기를 바라기도 했다.

“자유라니…….”

다리에 힘이 풀린 알렉사가 크게 비틀거리며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깜짝 놀란 율리아가 달려가 그녀를 품에 안아 부축했다.

“알렉사!”

“당신이…… 누구라고요?”

“율리아 아르테예요.”

“뭐 하는 사람입니까?”

“레위시아 2왕자 전하의 측근 시녀입니다. 왕궁에서 일하고 있어요.”

“왜 날 구해 주는 겁니까?”

대답할 수 없었다.

또 이랬다. 말이 막히더니 목에 커다란 가시가 박힌 것처럼 아팠다. 율리아가 빠르게 두 눈을 깜박였다.

당신이 내 목숨을 구하고 나 대신 죽어서 그래요. 나는 계속 다시 살아나는 저주에 걸렸는데, 다섯 번째 삶에서 당신이 나를 구하고 내 눈앞에서 죽어 버렸거든요. 그래서 맹세했어요. 반드시 그 은혜를 갚으리라고.

말할 수 없었다. 그건 입으로도 나오지 못해 목에서만 맴도는 말이었다.

율리아는 서둘러 숨을 크게 들이쉬는 것으로 쓰린 속을 달랬다.

알렉사의 손은 거칠고 상처투성이였다. 율리아는 자신의 손목을 매달리듯 움켜쥐고 있는 그녀에게 또 한 번 말했다.

“이제 자유예요. 다시는 그들에게 얽매이지 않아도 돼요.”

“그럼 저는 이제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알렉사가 물었다.

율리아는 대답하지 못했다. 생각지도 못했던 질문이었기 때문이다. 이 수렁에서 구해 주기만 하면 알렉사가 알아서 자신의 자유를 찾아 떠날 줄 알았는데, 착각이었다. 뭔가 이상했다.

“아.”

알렉사와 눈을 맞추고 있던 율리아가 뒤늦게 깨달았다.

눈앞에 있는 알렉사는 율리아를 해적으로부터 구해 주었던 알렉사가 아니었다. 그건 지금으로부터 적어도 6년 이상 흐른 뒤에야 일어났던 일이었다.

알렉사는 아직 너무 어렸다.

율리아와 비슷한 나이, 이맘때쯤의 그녀는 이제 막 성인이 된 소녀일 뿐이었다.

미처 생각해 두지 못한 자신의 안일함에 욕이 나왔다.

어떤 말로 알렉사를 위로해야 할지 몰라 혼란스러워하는 율리아를 대신해서 이번에는 코코가 손을 내밀었다.

“따라와.”

“코코.”

“일단 데려가서 씻기고 입히고, 먹이고 재워. 그런 뒤에 생각해.”

레위시아가 그녀의 뒤에 서서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 * *

알렉사가 왕자 궁에 처음 오게 된 날, 코코는 유독 말이 없었다. 그녀는 꼭 화난 사람처럼 입을 꼭 다문 채 알렉사가 쓰게 될 방을 결정한 뒤에 밖으로 나가 한동안 돌아오지 않았다.

코코에 대해 잘 모르는 몇몇 하녀들은 율리아가 멋대로 손님을 데려와서 그녀가 화를 내는 거라고 수군거렸다.

하지만 그건 잘못된 생각이었다. 율리아는 코코가 왜 저러는지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코코가 이것저것 사 올 거예요. 그러면 너무 완강하게 거절하지 말고 받아 주세요. 어떤 말로 당신을 위로해야 할지 몰라서 그러는 거니까.”

“코코라면, 아까 그 예쁜 시녀님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분이 저를 왜 위로하죠?”

“정이 많은 사람이거든요.”

코코는 알렉사가 가여워서 어쩔 줄을 모르는 것이다.

말을 안 하는 데도 이유가 있었다. 지옥에서 빠져나온 걸 축하하면서 그동안 고생했다고 위로하고 싶은데, 또 자신의 삐죽삐죽한 말투가 알렉사에게 상처를 줄까 봐 아예 입을 다물어 버린 게 분명했다.

“저기, 제가 정말 여기에 있어도 되는 겁니까? 왕자님의 궁이라니…… 그냥 아무 여관이라도 괜찮았을 텐데.”

“알렉사, 당신은 곧 왕족의 대전사가 되어서 경연에 나갈 거예요. 여관이라뇨.”

율리아는 알렉사에게 당신은 왕자 궁에서 귀한 손님으로 대접받아야 할 충분한 자격이 있다고 설명했다.

“율리아 님.”

“그냥 율리아라고 부르세요.”

“은인을 그렇게 부를 수는 없습니다.”

“저는 평민인데요?”

“신분이 은혜보다 중요할 리가 없습니다.”

알렉사는 단호했다.

귀족이 평민을 은인이라 부르며 존대하다니, 다른 귀족들이 들었다간 무슨 괴상한 소문이 날지 몰랐다. 율리아는 알렉사에게 자신을 위해서라도 그래선 안 된다고 몇 번이나 당부해야 했다.

코코는 생각보다 더 늦은 시간에 돌아왔다. 율리아가 알렉사에게 식사와 디저트를 챙겨 주고 잘 자라는 인사를 나눌 즈음이었다.

외출을 마치고 돌아온 코코가 일꾼들을 불렀다.

“이쪽으로.”

그녀가 가리킨 곳은 율리아와 알렉사의 방에 딸린 작은 옷방이었다.

“실례하겠습니다!”

일꾼들이 커다란 상자를 줄줄이 들고 날랐다. 두 사람의 옷방이 가득 차고도 부족해 응접실까지 채울 것 같은 모양새였다.

그 모습을 멀거니 바라보던 알렉사가 설명해 달라며 율리아를 바라보았다. 저게 다 뭐냐고, 저 사람은 왜 저러는 거냐는 뜻이었다.

뭐라고 말해야 할까. 고민하던 율리아가 알렉사에게 말했다.

“코코는 돈이 많아요.”

“네?”

“그리고 좋아하는 사람한테 뭘 사 주는 걸 아주 좋아해요.”

알렉사는 이해할 수 없었다.

어차피 당분간 왕궁에 머물게 될 테니 천천히 알아 가면 될 일이란 생각에, 율리아도 더는 말을 보태지 않았다.

일꾼들이 돌아가는 걸 확인한 코코가 두 사람을 불렀다.

“야, 너희 거기서 그만 숙덕거리고 이쪽으로 와.”

“왜요?”

“입어 봐야 할 거 아냐! 안 어울리거나 안 맞거나 할 수도 있으니까…… 그럼 다시 사야지!”

“그냥…… 큰 건 알렉사가 입고 작은 건 제가 입으면 되잖아요. 더 작은 건 코코가 입어요.”

“이 멍청이가 뭐라는 거야. 옷이라는 게 무조건 사이즈만 맞는다고 다인 줄 알아? 어울리는 디자인인지, 어울리는 색깔인지, 어울리는 분위기인지…….”

율리아와 코코가 아옹다옹하는 사이, 어느새 자리에서 일어난 알렉사가 예쁜 블라우스를 손에 들고 물었다.

“저 이렇게 예쁜 옷 처음 입어 봅니다. 어떻게 하는 거죠?”

그녀의 두 볼이 발갛게 상기되어 있었다. 조금 전에 목욕해서 그런 것도 있겠지만, 앳된 설렘이 느껴지는 얼굴이었다.

율리아를 구박하다가 멈칫한 코코가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알렉사에게 다가갔다. 그러곤 말로는 툴툴거리면서도 섬세하고 다정한 손길로 그녀에게 블라우스를 입혀 주었다.

율리아는 가만히 서서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가슴이 묵직했다. 심장에 조금씩 뜨뜻한 물이 차올랐다. 메말라 사막처럼 변한 줄만 알았던 가슴에 작은 샘이 솟았다.

나는 언제쯤 당신들에게 내 과거를 털어놓을 수 있을까.

율리아는 코코와 알렉사의 뒷모습을 보며 그런 생각을 했다.

그녀는 자신의 비참했던 과거 따위는 저들과 공유하고 싶지 않았다. 걱정할 게 뻔하니까. 외롭다거나, 위로받고 싶다는 마음이 들지도 않았다. 지금도 그 생각이 변한 건 아니었다.

다만 한 번씩 궁금했다.

‘내가 만약 과거의 일을 모두 털어놓는다면…… 뭐라고 말할 거예요?’

소설 쓰지 말라고 비웃을까.

아니면 제정신이냐고 걱정할까.

어느 쪽도 아닐 것 같다. 과거의 코코는 율리아의 말을 처음으로 믿어 준 사람이었기에 특별했다. 과거의 알렉사는 율리아의 말을 전혀 믿지 않았기에 그녀의 목숨을 구한 은인이 되었다.

그러니까 더 말할 수 없었다.

‘생각하지 말자. 지금의 코코가 과거의 코코가 아니듯, 알렉사도 마찬가지야. 그렇게 생각하면 안 돼. 율리아, 정신 차려.’

코코를 좋아한다. 알렉사를 좋아한다.

어쩌면 이 감정은 우정이나 그리움, 혹은 한 번도 가져 보지 못했던 가족에 대한 환상일지도 모른다. 그중 어느 쪽에 가까운지는 모르겠다. 그저 해치고 싶지 않았다. 저들이 살아 있다는 사실이 너무 소중했다.

저주받았다는 사실 같은 건 끝까지 숨기면 된다. 외로움은 참으면 된다. 위로받지 않아도 견딜 수 있다. 나는 미쳐 있으니까.

율리아, 단단해져라.

율리아는 자신에게 몇 번이나 당부했다.

차갑고 단단해져라. 무르고 약한 마음이 튀어나오려고 하면 강제로라도 짓눌러 그러지 못하게 해야 한다. 그래야 복수할 수 있다. 율리아 아르테는 마조람을 지옥으로 끌고 들어갈 사냥개지, 코코와 알렉사의 사랑스러운 친구로 남지 않는다.

알렉사에게 어울리는 드레스를 입힌 코코가 만족스럽게 웃었다.

키가 크고 피부색이 짙은 알렉사는 코코와는 전혀 다른 분위기의 옷들이 어울렸다.

“레위시아 전하께서 간단하게라도 환영 파티를 하면 어떻겠냐고 하셨는데, 졸리니? 일찍 자고 싶어?”

“아뇨. 잠이 올 리가…….”

“그럼 내려가서 한 끼 더 먹자. 넌 아직 어려서 저녁 한 끼 정도는 더 먹어도 돼.”

코코가 알렉사의 손을 덥석 잡고 끌어당겼다. 알렉사는 박력 넘치는 코코에게 이끌려 방 밖으로 걸어 나갔다.

“야, 안 따라오고 뭐 해?”

앞서 걷던 코코가 뒤를 돌아보고 물었다. 알렉사도 특유의 무표정한 얼굴로 율리아를 바라보고 있었다.

율리아는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그녀는 평소와 다를 바 없는 미소를 가면처럼 얼굴에 드리웠다.

“전 못 가요.”

“뭐? 왜?”

“죄송해요. 약속이 있는 걸 깜박했어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