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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화 (52/319)

49화

“뭐?”

레위시아가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그는 차마 물어볼 수 없었다. 알렉사 콴이 그때 몇 살이었는지.

율리아는 담담하게 말했다.

“열다섯이 되기도 전에 용병패를 달았어요. 나이를 속이고, 이름도 속였어요. 실력이 뛰어나 아무도 알렉사를 귀족 가문의 어린 영애라고 생각하지 않았어요.”

“오르테가엔 용병이 할 일이 그렇게 많지 않을 텐데. 해적을 상대로 싸우는 건 해군이 할 일이니까…….”

“용병단은 알렉사를 바이칸으로 보냈어요.”

“아…….”

코코가 짜증을 닮은 신음을 내었다. 율리아는 그게 그녀가 극도로 슬프고 화가 날 때 버릇처럼 흘리는 탄식이라는 걸 알았다.

“부모님의 빚을 다 갚을 때까지 계속 노예처럼 살았어요. 간단한 심부름으로 시작해서, 호위, 도둑질, 감시, 협박, 최근에는 전쟁터에까지 보내졌던 거로 알아요.”

“넌 그걸 어떻게 다 알았어?”

레위시아가 일그러진 얼굴을 벅벅 문지르며 물었다.

율리아는 그 질문엔 대답하지 않았다. 삶을 반복하면서 집착하듯 찾아 헤맸다고 할 수는 없었으니까.

대신 그녀는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

“원금은 다 갚았다고 들었어요. 고리대금업자들이 알렉사를 놓치기 싫어서 지금까지 이자를 불리고 있었던 거예요. 오르테가의 국법상, 고리대금은 원칙적으로 금지예요.”

“그거야…… 유명무실한 법이지. 아무나 다 하는 게 고리대금인데.”

이번에는 코코가 율리아를 대신해서 레위시아에게 말했다.

“그러니까 율리아의 말은, 왕족이 나서서 원칙을 내세우면 그 알렉사라는 애를 구할 수 있다는 말이에요.”

“내가?”

“상인연합이 연루되어 있다잖아요. 왕족인 전하께서 그 일에 관심을 보이면, 그 뒤가 구린 놈들이 꼬리를 자르기 위해서라도 알렉사를 내줄 거예요.”

“세상은 썩었어.”

“그걸 이제야 알았어요?”

“가자.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뭐든지 할게.”

이 말을 기다렸다. 이렇게 말해 줄 줄 알고 있었으면서도 고마웠다. 율리아는 말없이 레위시아에게 머리를 숙였다.

“고맙습니다.”

“왜 네가 인사하냐! 어머니 덕에 좋은 데서 좋은 거 먹고, 좋은 옷 입고 살아온 값 좀 하겠다는데.”

레위시아가 팔뚝에 돋은 닭살을 문지르며 일어나 움직였다. 그는 안 가겠다는 코코에게 무서워서 혼자 못 가겠다며 떼를 썼고, 결국 그녀에게서 동행 허락을 받아 냈다.

코코가 레위시아보다 먼저 마차에 올라타며 말했다.

“상인연합으로 가자. 나중에 딴소리 못 하게 상환 증명 서류부터 떼고, 그걸 갖다 줘야지.”

“네.”

“전하는 왕족의 인장부터 챙기세요. 절차를 다 밟으려면 시간이 오래 걸리니까 그냥 왕족의 인장으로 콱 찍어 버려요.”

“알았어.”

코코와 함께 상인연합으로 쳐들어간 레위시아는 알렉사의 채무 기록을 전부 가져오라고 명령했다.

그러곤 콴 가문을 고리대금업의 피해자로 공표한 뒤에 귀족 영애를 용병단에 팔아넘긴 상인연합을 국왕께 고발하겠다는 말로 그들을 협박했다.

상인연합 간부들은 고민했다. 레위시아 왕자가 두려운 건 아니었으나, 일이 몹시 귀찮아질 가능성이 있었다.

특히 레위시아 왕자 곁에 붙어 있는 코델리아 힌치가 거슬렸다. 힌치 백작은 사사건건 상인연합과 부딪쳐 온 귀족이었다. 그의 딸과 함께이니, 왕자의 협박은 허세가 아니라고 보는 게 옳았다.

그들은 결국 알렉사와 콴 가문의 채무가 모두 상환되었음을 증명하는 서류에 서명할 수밖에 없었다.

알렉사를 데리러 가는 길, 흔들리는 마차 안에서 율리아는 그녀를 생각했다.

율리아는 여전히 알렉사에 대해 아는 게 별로 없었다. 두 사람이 함께 지냈던 건 고작 며칠의 시간이 전부였다.

코코처럼 한 번의 삶을 통째로 함께였던 사람을 잊을 수 없는 건 당연하다. 하지만 알렉사처럼 스치듯 지나간 인연은 언제나 잘만 잊어버렸는데.

유독 그녀만은 잊히질 않았다. 생명의 은인이라는 말로는 부족했다.

매달리는 율리아를 밀어내던 그 부드럽고 단호한 손길. 당신이 좋아서가 아니라, 그냥 이렇게 하는 게 옳은 일이라고 말하던 목소리.

아마도 알렉사는 율리아가 닮고 싶었던, 혹은 되고 싶었던 이상향에 가까운 사람은 아니었을까.

“도착했습니다!”

마부가 소리쳤다.

외진 바닷가였다. 율리아와 코코, 레위시아는 마차에서 가볍게 뛰어내려 어느 낡은 빌라 앞에 섰다.

“이게 뭐야.”

낡은 문고리가 반쯤 부서져 있었다. 먼지 쌓인 창틀엔 온통 쓰레기였다. 그곳은 멀쩡한 구석이라곤 하나도 없는 폐가처럼 보였다.

레위시아가 허공에 대고 물었다.

“이런 데서 사람이 산다고?”

명패가 썩어 글씨가 거의 남아 있지 않았다. 그래도 율리아는 거기서 ‘콴 가족’이라는 문구를 읽어 냈다. 자작이 죽기 전 빚을 갚기 위해 가진 모든 걸 팔았을 때, 마지막으로 머물렀던 집인 것 같았다.

알렉사는 여기서 혼자 살아가고 있었다.

계단을 오르자 삐걱거리는 소리가 위태롭게 들렸다. 율리아는 조심스레 집 안으로 들어가, 유일하게 문이 열려 있는 곳으로 다가갔다.

알렉사의 방이었다.

세기의 천재. 죽음의 신이 선택한 여자. 하나를 가르치면 열을 아는 검사.

알렉사를 아는 사람들은 그녀를 검의 귀재라고 불렀다.

“알렉사.”

몰랐다. 이렇게 살고 있을 줄은.

다섯 번째 삶에서 만났고, 세 번을 더 살고도 다시 만날 수가 없어 그토록 애를 먹었는데, 이렇게 비참하게 살고 있어서 그런 거였나.

율리아는 뜨겁게 달아오른 눈가에 힘을 주어 간신히 화를 삼켰다.

“알렉사.”

이름을 부르자 알렉사가 이쪽을 돌아보았다.

의뢰를 마치고 막 귀국한 그녀는 상처투성이였다. 전투에서 입은 부상으로 보였다. 흉터가 셀 수 없이 많았다.

그런데도 무표정한 얼굴만은 깨끗하기 그지없어서, 그 부조화에 소름이 끼쳤다.

“누구십니까.”

알렉사가 물었다. 고저 없이 무뚝뚝한 남부 토박이의 억양 그대로였다.

율리아는 또 한 차례 뜨거워진 눈가에 힘을 주고, 성큼성큼 걸어 방 안으로 들어갔다.

“저는 율리아예요.”

“이름을 물은 게 아닙니다.”

율리아가 가까이 다가서자, 알렉사가 몸을 살짝 뒤로 물렸다.

그러곤 곤란해하는 얼굴로 그녀에게 손바닥을 내보였다.

“가까이 오지 마세요. 아가씨의 드레스가 더러워집니다. 보시다시피…… 청소를 안 한 지가 오래되어서.”

알렉사의 방은 더러웠다. 물건이 많아 더러운 게 아니라 먼지가 쌓여 더러웠다. 집에 있는 시간보다 밖에 나가 있는 시간이 월등히 많았으니 어쩔 수 없었으리라.

율리아는 괜찮다고 말하려다가 그냥 입을 다물었다.

그러곤 알렉사에게 손을 내밀었다.

“나랑 같이 가요.”

알렉사는 율리아의 손을 잡는 대신, 그녀의 눈동자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물었다.

“의뢰인입니까?”

“아뇨.”

“살인 청부는 받지 않습니다.”

“그런 걸 시키려고 온 게 아니에요.”

의뢰인도 아니고 사람을 죽여 달라고 부탁하러 온 것도 아니라면, 당신은 왜 내 앞에 있나.

알렉사는 그렇게 묻고 있는 듯했다. 너무 일찍 자유를 빼앗긴 그녀는 이미 모든 걸 체념한 눈빛을 하고 있었다.

그 눈을 마주하면서, 율리아는 몇 번이나 삶을 반복하면서 그토록 하고 싶었던 말을 꺼낼 수 있게 되었다.

“당신을 구하러 왔어요.”

알렉사가 멍하니 입을 벌렸다.

“당신의 부모님이 진 빚은 모두 갚았어요. 이제 자유예요. 알렉사, 이제 이름과 나이를 속이고 전쟁터에 나가 싸울 필요 없어요. 다시는 그런 일 하지 않아도 돼요.”

알렉사는 율리아의 말을 믿지 않았다. 무표정했던 얼굴에 약간의 균열이 일었다.

그녀는 침대에서 몸을 일으킨 뒤, 율리아로부터 한 걸음 더 멀어졌다. 그러곤 불신 가득한 얼굴로 재차 물었다.

“누구십니까?”

“율리아 아르테예요. 레위시아 왕자 전하의 시녀이고, 또…….”

“도대체 나한테 원하는 게 뭡니까?”

“아무것도 없어요.”

“그런데 왜 내 부모님의 빚을 당신이 다 갚았다는 거죠?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십시오. 차라리 솔직하게 말하세요. 이제부터 내 주인은 당신이라고, 빚을 다 갚을 때까지 너는 내 노예라고…….”

“알렉사는 얼마 전에 빚을 다 갚았어요. 당신이 여태 여기 갇혀 있던 건 저들이 말도 안 되는 이자로 원금을 늘리고 있었기 때문이에요. 그들은 곧 벌을 받을 거고, 당신은 자유예요. 못 믿겠으면 상인연합으로 가서 확인해 봐도 돼요.”

“거짓말, 도대체 무슨 소리를…….”

“여기요. 당신이 빚을 모두 상환했음을 증명하는 서류예요.”

율리아가 손을 내밀자, 뒤따라 들어온 코코가 재빨리 서류를 건네주었다. 율리아는 그걸 다시 알렉사에게 내밀었다.

알렉사의 손끝이 살짝 떨렸다. 그녀는 율리아가 건넨 서류를 몇 번이고 읽고, 또 읽었다.

그건 ‘알렉사 콴은 콴 가문이 상인연합 하베스트 길드에 진 채무를 전액 상환하였으며, 이를 2왕자 레위시아 오르테가의 이름으로 증명’한다는 내용의 서류였다.

알렉사의 숨소리가 불규칙해졌다. 가슴이 크게 오르내리더니, 눈매가 붉게 달아올랐다. 그녀는 손을 덜덜 떨면서도 서류가 구겨지기라도 할까 봐 손가락에 힘을 주지 못했다.

“이게…… 진짜인가요? 제가, 빚을 다 갚았습니까? 그 많은 돈을…… 평생 못 갚을 줄 알았는데.”

“네, 다 갚았어요. 이제 당신은 자유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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