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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화 (51/319)

48화

“당신이 말한 것처럼 다음 생이란 게 있다면요.”

“알렉사, 잠깐만요.”

“그때는 저를 좀 구해 주시겠습니까.”

“가지 마세요. 가면 죽어요!”

“부탁합니다.”

오르테가는 전쟁 중이었다. 왕가와 마조람에 반기를 든 반제국파 귀족들이 해방군에 가담하고 해적과 손을 잡으면서 일어난 비극이었다.

국왕은 최악의 선택을 하고 말았다. 바이칸의 황제에게 도움을 요청한 것이다.

무자비한 제국군이 오르테가를 짓밟았다. 그들은 티타니아 산맥을 넘지 않고, 배를 타고 바다를 통해 왔다.

도시는 불타오르고 사람들은 비명을 지르다 죽었다. 어디에나 시체가 있었다. 산 사람보다 죽은 사람이 많았고, 죽은 사람보다 칼 든 사람이 더 많았다.

다섯 번째 삶이었다. 율리아는 그때에도 마조람 후작에게 패배해 노예선에 팔렸다가 그 안에서 알렉사를 만났다.

망가지고 부서진 건 똑같은데, 자신과 달리 더러워지지는 않았다. 그녀의 영혼은 여전히 순수했다.

“어디로, 어디로 가야 당신을 구할 수 있는데요. 저는 알렉사에 대해서 아무것도 몰라요.”

“저는, 아니. 아무것도 아닙니다. 죽음이 눈앞에 닥치니까 별 쓸데없는 생각이 다 드네요. 인간에게 다음 생이란 게 허락될 리가 없는데.”

“어차피 당신이 죽으면 저도 죽어요. 그러니까 그냥 말해 보세요. 혹시 모르잖아요. 진짜 나한테 다음 생이란 게 있어서 당신을 구할 수 있을지도…….”

“됐습니다.”

“그럼 이름이라도 다 알려 주세요. 성이 뭔지, 어디서 태어났는지, 부모님은 어떤 분들인지.”

“그런 걸 말해 봤자 아무 소용없잖습니까. 제가 지옥보다 더한 곳에서 불행하게 살고 있었다는 걸 하소연하는 꼴밖에 되지 않아요. 됐습니다. 율리아, 당신에게까지 동정받고 싶지는 않습니다.”

“왜요, 왜 나는 그러면 안 돼요? 내가 알렉사보다 더 불쌍한 인간이라서요?”

“당신은 남보다 당신 자신을 먼저 불쌍하게 여겨야 할 것 같아서 그럽니다.”

두 사람은 깊은 밤 노예선에서 작은 배를 훔쳐 도망치고 있었다.

비가 왔고, 태풍이 불었다. 도시는 저 앞에 있는데 파도가 너무 세서 뭍에서 자꾸 멀어지기만 했다. 팔이 떨어지도록 노를 저어도 좀처럼 육지가 가까워지지 않았다.

오랜 감금 때문에 몸이 굳은 율리아가 자꾸만 노를 놓치자, 알렉사가 그녀의 것까지 가져가 끈질기게 노를 저었다.

하지만 두 사람이 탈출했다는 걸 눈치챈 노예선의 해적들이 갑판 위로 달려 나오더니 갈고리를 던져 작은 배를 끌어당기기 시작했다.

해적들이 고함을 지르고 욕설을 쏟아부었다. 잡히기만 하면 힘줄을 끊어 버리겠다며 협박하고, 제국에서 가장 악랄한 노예 상인에게 팔아 버리겠다며 소리 질렀다.

여기서 죽는 게 나으려나.

율리아는 그때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아마 알렉사도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다만 율리아는 죽어도 다시 시작할 수 있으니, 조금 더 가벼운 마음이었다.

잡히느니 죽는 게 낫다. 파도가 세서 다행이다. 이 거친 바다에 뛰어들어 버리면, 아마 저들도 시체밖에는 확인할 수 없을 것이다.

빗줄기가 거세 앞이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율리아는 그때 알렉사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었는지 잘 몰랐다.

그래도 몇 가지 사소한 것들은 기억이 났다.

그 요란한 태풍 속에서도 선명하게 들리던 남부인 특유의 투박한 억양, 그녀의 흰 머리카락을 반쯤 물들이며 흘러내리는 피, 가지 말라며 매달리는 자신을 부드럽게 밀어내던 손.

알렉사는 율리아를 구할 생각이었다.

“율리아, 당신은 살아서 도망치세요. 아무래도 여기서 죽을 사람은 저인 것 같으니.”

“알렉사!”

“칼 든 사람이 저라서 다행입니다. 어차피 저는 도망치지 못해요. 피를 너무 많이 흘려서, 오래 지나지 않아 쓰러질 겁니다.”

“가지 마세요, 제발요. 가면 죽어요. 당신이 아무리 싸움을 잘한다고 해도…… 저들을 다 상대할 수는 없어요!”

“그래도 율리아를 살릴 수는 있습니다.”

“뭐라고요?”

“제가 저들을 막으면 당신은 살 수 있습니다. 아무리 힘들어도 끝까지 노를 놓지 마세요.”

“도대체 왜…… 왜 이러는 거예요? 나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면서.”

“당신은 약하니까요. 검을 쥔 사람은 약한 자를 위해서 싸워야 한다고 배웠습니다. 지금까지는 그렇게 살지 못했지만…… 마지막이니까, 한 번쯤은 배운 대로 해 보려고요.”

“알렉사, 잠깐만요!”

“한 사람이라도 사는 방법은 이것뿐입니다.”

“싫어요. 차라리 날 버리고 도망쳐요. 혼자서는 살 수 있을 거예요.”

“그럴 수는 없습니다.”

“알렉사!”

“살아요, 율리아.”

알렉사는 미련이 없어 보였다. 그녀는 자신의 실력이면 저 해적들 정도는 정리할 수 있다고 담담하게 말했다.

율리아는 차라리 자신을 버리고 도망치라고 알렉사를 설득했다. 여기서 죽는다 해도 어차피 다시 시작하면 그만이라면서.

그러나 알렉사는 율리아의 말을 믿어 주지 않았고, 훌쩍 몸을 날려 적들 앞에 꼿꼿이 섰다.

소리치고 울어도 아무 소용없었다. 알렉사는 한 번도 뒤돌아보지 않았다.

배 바닥에 엎드려 비명을 지르며 울던 율리아는 알렉사가 앉아 있던 자리에 피 웅덩이가 있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았다. 어두웠고, 비가 쏟아져 눈치채지 못했던 게 한이었다.

알렉사는 그날 율리아를 구하고 그 자리에서 죽었다.

수십 명의 해적을 베었지만, 상처 입은 몸으로는 그게 한계였다. 율리아가 타고 있는 작은 배를 향해 갈고리를 던지는 해적이 단 하나도 남지 않았을 때, 알렉사의 몸이 허물어졌다.

하늘이 원망스러웠다. 데려가려면 나를 데려가야지, 왜 저 사람을 데려가냐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율리아는 그 후 다시 시작할 때마다 알렉사의 흔적을 찾았다.

어떻게든 그때의 은혜를 갚아야만 했다. 알렉사의 ‘구해 달라’는 말은 율리아의 마음에 깊은 흉터로 남았다.

그 공허해 보이는 얼굴을 떠올릴 때마다 가슴을 토할 듯해 오랫동안 고통스러웠다. 다시 그 상황으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알렉사를 살리고 자신이 죽었을 것이다.

알렉사와 함께한 시간은 길지 않았으나, 율리아는 그녀가 어지간해서는 약한 소리를 하거나 엄살을 부리지 않는 사람이라는 걸 알았다.

그런 그녀가 ‘구해 달라’는 말을 했다.

얼마나 간절했기에, 잘 알지도 못하는 자신에게 그런 말을 했을까.

‘이번에는 내가 당신을 구해 줄게요.’

율리아는 그때 맹세했다. 혼자뿐인 맹세였지만 반드시 지키리라 다짐했다.

그러려면 알렉사를 찾는 게 우선이었다. 율리아는 알렉사라는 이름과 그녀가 검을 잘 다룬다는 사실만 알았지, 그 외엔 아는 게 없었다.

귀족인지 평민인지, 성은 무엇인지, 부모님은 어디에 살고 있는지, 어떤 일을 했는지.

물어봤어야 했다. 복수심에 빠져 타인에게 아무 관심 없었던 자신이 원망스러웠다.

그렇게 여섯 번째 삶에서도, 일곱 번째 삶에서도 알렉사를 찾을 수가 없었던 율리아는 여덟 번째가 되어서야 간신히 그녀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때는 이미 늦어 있었지만.

이번엔 다를 것이다.

* * *

왕자궁으로 돌아온 레위시아가 코코와 함께 자리를 만들었다.

율리아는 코코에게 세 번째 경연이 명예 결투라는 걸 설명했고, 샤트린의 승리를 위해 알렉사를 찾아야 한다고 설득했다.

“그렇게 굉장한 애라면 우리가 모르는 게 더 이상하지 않니. 그리고 넌 그 애를 어떻게 알고 있는 건데?”

“우연히 만났어요.”

“어디서?”

“제 생명의 은인이에요.”

율리아는 거기까지만 말하고 입을 다물었다. 코코도 율리아가 더 말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는 걸 알았다.

“일단 알았어. 어디로 가야 찾을 수 있는데?”

“상인연합과 계약된 용병단에서 나이와 이름을 속여서 일하고 있어요.”

“용병? 귀족이라며? 왜…….”

율리아가 알렉사를 쉽게 찾을 수 없었던 이유는 간단했다. 알렉사가 다른 이름으로 의외의 곳에서 살아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알렉사 콴. 콴 가문의 유일한 생존자예요.”

“콴 가문이라고?”

레위시아가 처음 들어본다는 얼굴로 물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콴은 10여 년 전, 바이칸의 북부 정복이 한창일 때 오르테가 귀족들 사이에서 유행하던 대규모 투자 사업에 연루되어 사라진 가문이었다.

당시 상인연합과 해적, 제국의 노예상이 손을 잡고 벌인 사기극에 순진하게 속아 넘어간 콴 자작은 거액의 빚을 지게 되었다. 집과 땅, 작위까지 모두 저당을 잡히고도 빚을 상환하지 못해 어린 딸까지 인질로 보내게 되었을 때, 그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자작의 빚은 고스란히 어린 딸인 알렉사 콴에게 상속되었다.

“천재였어요. 걸음마를 시작하자마자 검을 잡았다고 했어요. 콴 자작은 기사 출신이었고, 딸의 재능을 일찍부터 눈치챘죠.”

“조기 교육을 시켰겠군.”

“정형화된 기사의 검술보다는 변칙적인 실전 검술을 잘했다고 해요. 그래서 어려운 와중에도 이름 높은 용병들에게 가르침을 청했다고.”

“자작이 죽은 뒤에는?”

“고리대금업자들이 데려가서 용병단에 집어넣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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