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화
9. 알렉사 콴
밤새 잠을 이루지 못했다.
과거의 코코 때문이었다. 가슴이 술렁이기 시작하더니 자꾸만 잊었던 감정이 되살아났다. 죽은 줄 알았던 심장이 애처롭게 뛰고 있었다.
율리아는 자신의 약한 모습을 마주할 수 없었다. 그건 죽는 것보다 더 두려운 일이었다.
여기서 무너지면 복수 같은 건 할 수 없다. 과거의 인연을 다 끌어안고 갈 수도 없었다.
그렇게 하기에 율리아는 너무 많이 죽었고, 또 너무 많이 살아났다.
그동안 그녀가 스치듯 마주친 인연만 해도 다 기억할 수 없을 만큼 많았다. 그러다 보니 꼭 필요한 정보와 중요한 사람을 제외하곤 의도적으로 잊으려고 애쓰기도 했다.
율리아는 그들을 두 분류로 나누었다.
복수에 필요한 사람과 필요하지 않은 사람.
코코는 필요한 사람이었다. 그것도 꼭 필요한 사람에 속했다. 정말 다행이었다. 만약 코코를 잊고 살아야 했다면, 율리아는 그리움에 못 이겨 지금보다 더 망가졌을 수도 있었다.
카루스 란케아도 필요한 사람이었다. 그는 반드시 손에 넣어야 할 아군이자, 최후의 보루였다. 과거의 코코는 자신을 버리더라도 그만은 꼭 동료로 삼으라고 율리아에게 조언했다.
그 외에도 몇 명이 더 있었고, 그런 식으로 사람을 나누는 율리아를 보며 코코는 닥치는 대로 쓴소리를 내뱉었다.
그렇게 살다간 언젠가 마른 나뭇가지처럼 바스러지고 말 거라고, 추접스럽더라도 사람답게 치덕거리고 살라고 충고했다.
‘추접스럽지도 않고, 치덕거리는 것도 아니지만.’
율리아는 한 번쯤 사람다운 일을 할 때가 됐다고 생각했다.
이제 곧 여름이었다. 이맘때쯤 찾아야 할 사람이 있었다. 은혜를 갚기 위해서라도 반드시 만나야 할 사람이었다.
복수에 도움이 되는 것도 아니었고, 심지어 마조람 후작가와는 아무 상관없는 사람이었지만, 그래도 찾아야 했다.
그건 자기 자신과의 약속이었다.
율리아 아르테가 아홉 번의 삶을 반복하면서 딱 한 번 마주쳤던 여자. 비극적이고 추악한 죽음만을 반복해 온 그녀에게 처음으로 숭고한 죽음과 희생의 가치를 깨닫게 해 준 사람.
알렉사.
그녀를 구하러 가야 한다.
* * *
샤트린 공주가 왕위 후계자 싸움에서 1왕자의 대안으로 떠오른 뒤에 제일 바빠진 사람은 레위시아 2왕자였다.
세 번째 경연이 다가오자 샤트린은 거의 매일 레위시아를 자신의 궁으로 불러들였다.
이번 경연의 주제는 무엇일지,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하는지, 누구와 가까이 지내고, 누구를 멀리해야 하는지 상의하기 위해서였다.
덕분에 율리아와 코코는 데면데면했던 샤트린 궁의 시녀들과 종종 시간을 함께 보내게 되었다.
“율리아 시녀는 코코 시녀님하고 어떻게 그렇게 잘 지낼 수 있죠? 그분은 아무하고도 친하게 지내질 않잖아요. 그 나이에 약혼자도 없고, 심지어 왕궁 안에 친구도 하나 없다고…….”
코코가 샤트린의 궁이 지루하다며 동행을 거부한 날, 율리아는 혼자서 공주의 시녀들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그들은 율리아를 안쓰럽게 여겼다. 샤트린에게 두 번이나 뺨을 맞은 데다, 왕궁에서 가장 악명 높은 시녀인 코코와 함께 지내고 있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코코 시녀님은 그렇게 무서운 사람이 아니에요.”
“무슨 소리예요! 코코 시녀님이 그렇게 말하고 다니라고 하던가요? 율리아 시녀가 왕궁에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아서 모르는 모양인데…… 왕자궁에 일하러 간 하녀들은 일주일 안에 울면서 뛰쳐나온다는 이야기가 있다고요.”
“그래요?”
“지금 남아 있는 하녀들은 그 일주일을 견뎌 낸 독한 사람들이에요. 궁내부 관리들도 코코 시녀님이라면 혀를 내두르죠.”
웃어야 하나. 율리아는 잠시 고민했다. 이들에게 맞장구를 쳐 주는 게 좋을까, 아니면 우리 코코는 그런 사람이 아니라고 화를 내는 게 좋을까.
어느 쪽도 정답은 아닌 것 같았다. 그럴 때는 의외의 질문을 던져 정곡을 찌르는 게 좋았다.
생각을 마친 율리아가 샤트린의 시녀들에게 물었다.
“다들 코코 시녀님이랑 친하게 지내고 싶으세요?”
“네? 뭐라고요?”
“네에? 코코 님이랑요?”
“저희가요?”
시녀들이 깜짝 놀라서 율리아를 바라보았다. 율리아는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코코 시녀님이랑 친하게 지내고 싶어 하시는 것 같아서요.”
샤트린 공주의 시녀들은 아니라고 손사래를 치면서도 은근슬쩍 율리아에게 코코에 대해 질문하는 걸 멈추지 않았다.
코코가 평소에 뭘 하면서 지내는지, 뭘 좋아하는지, 어떻게 혼자서 그렇게 완벽하게 궁을 관리할 수 있는지, 그런 것들이었다.
뭐야. 악명만 높은 줄 알았더니 인기도 많았잖아. 물론 이렇게 말하면 코코는 또 그 솔직하지 못한 태도로 투덜거릴 테지만.
율리아는 속으로 웃으면서 그들의 질문에 하나하나 성실하게 대답해 주었다.
“율리아, 가자.”
샤트린에게 오후 내내 시달린 레위시아가 응접실 밖으로 나왔다. 그는 율리아가 평민이라는 이유로 샤트린의 시녀들에게 괴롭힘을 당하지는 않을지 걱정이 많았는데, 다행히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또 와요, 율리아 시녀.”
샤트린의 시녀들이 레위시아에게 인사한 뒤에 율리아에게 다가와 또 놀러 오라며 다정한 말을 건넸다.
율리아는 레위시아와 함께 밖으로 나와 왕궁 정원을 걸었다. 샤트린과 레위시아의 궁은 마차를 타기에는 너무 가깝고, 걸어가기에는 조금 먼 거리였다.
“도대체 무슨 마법을 부린 거야? 저 도도한 애들이 왜 저렇게 상냥해졌어?”
레위시아가 신기하다며 물어왔다. 그는 샤트린의 시녀들이 율리아를 괴롭히지 않아서 의외인 모양이었다.
“그게 신기한 일이에요?”
“왕궁에 유명한 말이 있지. 시녀는 왕족을 닮는다. 난 샤트린의 시녀들을 보면서 그게 진짜라는 걸 깨달았거든.”
그러니까 샤트린처럼 시녀들도 율리아의 뺨을 때리면서 엎드려 빌라고 고함을 지를까 봐 걱정했다는 말이었다.
율리아가 웃으며 말했다.
“코코가 몇 번 같이 와 줬잖아요. 공주님의 시녀들이 아무리 대단한 사람들이라고 해도, 코코 앞에서는 모두 순한 양처럼 굴던데요.”
“내 시녀가 왕궁에서 제일 성격이 더러운 걸 자랑으로 여기는 날이 오게 될 줄이야.”
레위시아가 헛웃음을 흘렸다.
율리아는 그에게 또 다른 이유가 있다고 말했다.
“제가 불쌍한가 봐요.”
“불쌍하다고?”
“제가 코코한테 구박받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더라고요.”
“네가?”
“귀족들은 평민을 무조건 불쌍하게 여기는 경향이 있으니까, 그것도 하나의 원인인 것 같고요. 저를 다정하게 대하면 자기들이 관대한 귀족처럼 여겨져서 기분도 좋을 테고.”
“냉소적이네.”
“그래도 그렇게 나쁜 사람들은 아닌 것 같아요.”
코코가 율리아를 구박하다니, 직접 들었다면 버럭 소리를 지르며 화냈을 이야기였다.
실제로 레위시아는 요즘 자신의 궁에서 가장 입김이 센 사람은 왕족인 자신이나 코코가 아니라 율리아인 게 아닐까 생각하고 있었다.
“그건 그렇고…… 율리아.”
“네?”
“샤트린이 부왕을 졸라서 세 번째 경연의 주제가 뭔지 알아냈어.”
율리아는 그럴 줄 알았다는 얼굴이었다.
이전의 삶에서도 샤트린 공주는 종종 국왕을 졸라서 경연의 주제를 미리 알아내곤 했다고 들었다.
자신이 왕이 될 거라고 확신해서 경연에 대충 임하는 1왕자나, 자신은 왕이 될 리가 없으니 경연에 관심이 없는 2왕자와는 달리, 승부 욕심이 강한 샤트린 공주는 경연에 진심이었다.
“이번엔 뭔데요?”
율리아가 물었다. 이번 경연의 주제가 뭔지 그녀는 이미 알고 있었지만, 그렇게 묻는 얼굴만은 평소와 다를 바가 없었다.
‘명예 결투겠지.’
“명예 결투야.”
레위시아가 말했다.
“왕족의 대전사, 혹은 귀족이 자원해서 서로의 명예를 걸고 대련하는 거지. 결투라는 말로 멋지게 포장하긴 했지만, 승자는 뒤에서 결정될 거고.”
그래서 이전에도, 그 이전에도 명예 결투의 승자는 마조람과 1왕자였다. 그쪽 대전사가 왕국 최고의 실력자라서가 아니라, 아무도 그들을 이기려고 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번에는 다를 것이다. 율리아는 머릿속에 떠오르는 생각을 정리하며 레위시아에게 물었다.
“샤트린 공주님은 누굴 내보내려고 하시는 데요?”
“호위 기사 중에 가장 실력이 뛰어난 자를 고르고 있더라고. 그러면서 내 호위 기사의 실력이 어떤지, 그걸 묻기도 했고. 그런데 우린 이미 알잖아. 왕궁에서 가장 실력이 뛰어난 기사들은 이미 부왕의 곁에 있거나 죄다 1왕자에게 충성을 맹세했다는 걸.”
아무래도 이번 경연은 일찍 포기하고 다음을 기약하는 게 좋겠다고, 레위시아가 중얼거렸다.
물론 율리아는 그러지 않을 생각이었다.
“제가 적당한 사람을 알아요.”
“뭐? 네가?”
“네.”
그녀는 천재라는 말로도 부족한 오르테가 최고의 검사를 알고 있었다.
“승리할 수 있어? 결투에서?”
“네. 1왕자 전하의 호위 기사가 아니라, 왕실 기사단장쯤은 되어야 상대할 수 있을걸요.”
“그렇게 대단한 실력자가 어디 숨어 있는데?”
레위시아는 율리아의 말을 쉬이 믿어 주지 않았다. 검술은 그녀가 공부했던 것과 전혀 다른 영역이기 때문에, 그렇게 쉽게 판단해선 안 된다고 생각했다.
“게다가 왕궁 경연에서 왕족이 선택하는 대전사는 오르테가 국적의 귀족이거나 기사 작위를 받은 자여야 한다고.”
“오르테가 귀족이에요.”
“뭐? 진짜? 어…… 누군데?”
레위시아가 걸음을 멈추고 물었다. 당장이라도 그 실력자를 찾아갈 생각인 것 같았다.
율리아는 지난 여덟 번의 과거 중 딱 한 번 마주쳤던 여자의 얼굴을 떠올리며 가만히 눈을 감았다.
“만약에 말입니다.”
바닷바람을 타고 휘날리던 백색의 머리카락, 태양 빛에 그을린 짙은 피부, 깃털처럼 무게가 없던 회색 눈동자를 기억한다.
알렉사 콴.
율리아는 다섯 번째 삶에서 그녀를 만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