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화
모두가 잠든 밤이 되었다.
율리아는 트루디가 챙겨 온 과자를 먹으며 생각에 잠겨 있었다.
‘황제의 전령은 환영받는 손님이 되지 못할 거야. 전쟁에 대한 불안감을 증폭시켜 남부 해안에 대한 지배권을 강화하려 들겠지.’
그렇다면 카루스는 어떻게 하는 게 좋을까.
그는 자신을 이용하라고 말했다. 하지만 율리아는 최대한 그와 자신, 모두에게 좋은 방향으로 일이 해결되길 바랐다.
‘황제의 전령이 오기 전에 카루스를 환영받는 손님으로 만들어야 해. 그러면 국왕은 그에게 기댈 수밖에 없을 거고.’
마조람의 영향력은 더욱 줄어들 것이다.
과거의 코코는 이 부분을 정말 아쉬워했다. 카루스 란케아를 동료로 만들 수 있다면 일이 몇 배는 쉬워질 텐데, 도무지 그를 손에 넣을 방법이 없다며 탄식을 거듭 내뱉었다.
그래서 율리아가 카루스와의 인연에 대해 털어놓았을 때, 등에 손자국이 벌겋게 남도록 찰싹찰싹 때리기도 했다.
코코를 생각하며 몰래 웃음 짓고 있는데, 갑자기 방문이 벌컥 열렸다.
코코 본인이었다.
“넌 생일이 언제니.”
코코가 잠옷을 망토처럼 휘날리며 문 앞에 서 있었다.
“네? 뭐라고요?”
“생일 말이야. 생일이 언제냐고. 태어난 날이 며칠이냐고.”
율리아는 무슨 뜬금없는 말이냐며, 입에 물고 있던 과자를 얼른 삼켰다.
“몰라요.”
“뭐? 모르긴 왜 몰라. 그걸 왜…… 아.”
자기 생일도 모르는 바보가 어디 있냐고 따져 물으려던 코코가 입을 딱 다물었다. 그녀의 얼굴에 당혹스러움이 가득했다. 율리아가 보육원 출신이라는 걸 뒤늦게 떠올렸기 때문이다.
코코가 어울리지 않게 말을 더듬었다.
“아니, 그게, 그러니까.”
악마 시녀 코코의 입에선 매일 칼바람이 분다던 레위시아 왕자의 말이 떠올랐다. 어쩐지 웃음이 나올 것 같았지만, 율리아는 코코가 무안해하지 않도록 최대한 부드럽게 말했다.
“그런 건 신경 쓰지 않으셔도 돼요. 궁금했던 적도 없거든요. 보육원에선 생일을 챙겨 달라고 말하는 애도 없거니와, 그런 걸 요구하면 따돌림을 당해요. 그러다 보니 저절로 아무 관심 없어졌어요.”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코코가 우물거리다가 입술을 꾹 깨물었다. 붉은 눈동자에 미안함과 안타까움, 그리고 약간의 슬픔이 비쳤다.
코코는 율리아의 과거가 궁금했다.
상처가 많은 아이일수록 마음을 나눌 상대가 생기면 자신의 불행했던 과거를 툭툭 털어놓기도 한다는데, 율리아에겐 그런 상대가 있었던 것 같지 않았다.
바실리나 크리스틴 같은 멍청이들이 율리아의 상처를 염려하며 보듬어 줬을 것 같지도 않았다.
그렇다고 그 역할을 코코가 해 줄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두 사람은 만난 지 얼마 되지 않는 사이였다. 게다가 코코는 그동안 율리아를 대할 때 차갑게 쏘아붙이기만 했지, 다정한 말 한마디 해 본 적이 없었다.
생일 같은 건 정말 아무 상관없다는 얼굴로 쟁반을 치우는 율리아에게, 코코가 꽉 막힌 목소리로 말했다.
“야, 생일이 없으면 만들어.”
“네? 그게 무슨 말이에요?”
“만들라고. 네가 마음에 드는 날로 만들어. 봄이 좋으면 꽃이 절정일 때로, 여름이 좋으면 제일 더운 날로. 오르테가는 동절기가 짧으니까 겨울도 괜찮고.”
“코코, 왜 갑자기 남의 생일에 집착하는 거예요?”
“빌어먹을, 너한테 줄 게 있는데 이유를 붙이고 싶으니까 그렇지.”
코코가 알아듣기 어려울 만큼 빠른 속도로 말을 내뱉었다.
그러곤 조그맣게 입술만으로 ‘짜증 나.’라고 속삭였다. 아마도 자기 자신에게 하는 말인 것 같았다.
율리아의 눈이 동그래졌다.
“그냥 주면 되지…… 언제부터 그런 걸 따졌다고.”
그렇게 혼잣말하던 율리아는 문득 떠올리고 말았다. 눈앞에 있는 코코는 과거의 코코가 아니란 걸.
여덟 번째에서 만났던 코코가 율리아의 둘도 없는 벗이자 가족이었다면, 지금 코코는 율리아가 온 힘을 다해 다가가도 과거와 똑같지 않은 코코였다.
“뭐라고 했니?”
“아무것도 아니에요.”
갑자기 목이 콱 막혔다. 율리아는 동그랗게 커진 눈을 천천히 감았다가 떴다.
코코의 맑고 높은 목소리가 귓가에서, 머리에서, 그리고 가슴에서 울렸다.
잊고 있었다. 매일 자신을 따라다니며 늘어놓던 잔소리가 얼마나 다정했는지, 죽을 수 없는 저주를 받았다는 사실을 믿어 주는 한 사람의 존재가 얼마나 큰 위로가 되었는지.
여덟 번째의 코코는 생일이 언젠지 모른다는 율리아의 말에 자신의 생일을 주었다.
“내 생일이 네 생일이니까, 내 선물 살 때 네 것도 사.”
“그게 뭐예요. 완전 이상해.”
“다음 생의 내가 생일을 묻거든 똑같은 날짜를 말해 버려. 절대 잊어버리지 못하게.”
“왜 그래야 하는데요?”
“신경 쓰이니까! 외로우면 외롭다고 말해. 보고 싶으면 보고 싶다고 소리쳐. 넌 네가 망가졌다는 사실을 너무 쉽게 인정해서 짜증 나. 마음이 고장 나서 쓰레기로 가득 찼으면 엉엉 울면서 터뜨리고 텅 비워. 그다음에 다시 채우면 되잖아.”
“저는 텅 빈 채가 좋은데요.”
“너는 그게 문제야. 네 마음이 외진 창고처럼 비어 있으니까 나쁜 새끼들이 자꾸 뭘 갖다 버리려고 하잖아. 좋은 거, 비싼 거, 예쁜 거, 그런 거로 꽉 채워 놔. 그래야 어중이떠중이들이 얼씬도 안 하지.”
“나 그런 얘기 싫어요. 어렵고, 이상해. 사람 마음이 무슨 창고예요? 코코, 이상한 책 좀 그만 읽어요. 그런 거 보다가 머리 나빠져요.”
“이 미친 계집애가…… 사람이 옆에서 걱정하면 좀 듣는 척이라도 해!”
코코가 하려던 말이 무슨 뜻인지 안다. 누구에게도 정을 주지 않고, 누구도 믿지 않고, 누구도 사랑하지 않는 율리아가 너무 걱정돼서 쏟아 냈던 잔소리일 것이다.
언제부터인가 율리아의 영혼은 주인조차 돌보지 않을 만큼 텅 비어 황량한 상태였다. 그게 정상이 아니라는 건 누구보다 자신이 잘 알았다.
하지만 율리아는 지금의 상태가 좋았다. 고쳐야겠다는 생각도 하지 않았다.
마음이 텅 비어 황량해야 죽어서 다시 시작하게 됐을 때 조금이라도 덜 힘들다는 걸, 그녀는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다.
“아, 머리 아파. 이러다 화병 나서 죽겠어. 저 계집애보다 내가 먼저 죽어야 할 텐데. 제발!”
“그게 무슨 재수 없는 소리예요? 코코가 왜 나보다 먼저 죽어요. 내가 먼저 죽어야죠. 나는 어차피 죽지도 못하는데.”
“너 죽는 꼴을 내가 어떻게 보니.”
“나는 뭐 속 편할 줄 알아요?”
“너 죽으면 다시 시작할 거잖아. 바실리나 크리스틴 뭐 이딴 애새끼들이야 내 알 바 아니지만…… 나랑도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하잖아. 나는 너 못 알아볼 거고, 너는 그런 내가 원망스러울 텐데…….”
“원망 안 해요.”
“좀 해. 이 미친 것아. 왜 날 못 알아보냐고, 우리가 과거에 얼마나 친했는지 아느냐고 미친 소리라도 해! 다음 생의 내가 널 정신병원에 데려갈망정, 그렇게 괴상한 짓이라도 해서 하고 싶은 말 좀 하고 살란 말이야!”
“난 코코랑 또 친해질 건데 왜 그런 짓을 시킨대? 시끄러워요. 빨리 생일 선물로 뭘 사 줘야 할지나 알려 줘요. 코코 생일은 언제인지 아는데, 뭘 사 줘야 제일 좋아할지는 모르겠단 말이에요.”
“진주.”
“뭐 맨날 진주만 사 달래. 진주에 한 맺혔어요?”
“물망초. 그 꽃 모양 브로치. 머리핀도 좋고. 우아하게 진주 달린 거. 그런 게 좋아.”
“가만 보면 되게 속물이야. 싼 건 절대 말 안 해. 맨날 비싼 거 사 달라고 그러고. 어휴.”
“……꽃이야.”
“뭐라고요?”
“됐어! 시키면 시키는 대로 좀 해. 이 계집애야!”
그때 코코는 이미 비슷한 장신구를 잔뜩 가지고 있었다. 화려한 외모에 걸맞게 화려한 것들도 많았지만, 작은 물망초 모양의 귀여운 반지나 목걸이도 많았다.
율리아는 별다른 생각 없이 알았다고 말하면서 코코가 진주를 좋아하니까 그랬겠거니, 여겼다.
그런데 이제 와 생각하니 그 수많은 꽃 중에서 왜 물망초인가 하는 의문이 들었다.
여덟 번째의 코코가 선택한 꽃이니 아홉 번째의 코코는 다를 수도 있었다.
없는 생일을 만들라며 억지를 부려놓고 부끄러워 딴청을 부리는 코코에게, 율리아가 물었다.
“물망초 좋아해요?”
“뭐? 그건 왜 물어봐?”
“그냥 선물이 마음에 드나 궁금해서요. 화려한 게 좋으면 장미로 바꿔다 줄까요?”
“……좋아하는 꽃이야.”
“네?”
“제일 좋아하는 꽃이라고! 한 번 말하면 좀 알아들어! 귀먹었니?”
코코가 꽥 소리를 질렀다.
제일 좋아하는 꽃이었다니.
이런 건 생각지 못했다. 율리아의 얼굴에서 여유가 사라졌다. 고요한 바다처럼 잔잔히 가라앉아 있던 눈동자에 격한 파도가 일었다.
“전에도 말했지만 난 받은 건 몇 배로 갚아야 속이 편한 사람이니까, 너도 나한테 원하는 거 있으면 말해. 당장은 아니더라도! 꼭 말해! 알았니?”
이제 알았다. 코코는 그때 이미 알고 있었던 것이다. 다음 생의 코코와 가까워질수록, 율리아는 과거의 코코를 떠올리며 그녀를 그리워하게 될 거란 걸.
“근데 너 진짜 어떻게 안 거야. 내 생일도 그렇고, 내가 좋아하는 보석이랑 꽃은 어떻게 안 거냐고.”
말할 수 없었다.
지난 삶에서 당신이 직접 가르쳐 줬다고. 나는 죽어서도 계속 다시 살게 되는 저주에 걸렸는데, 과거의 당신이 그걸 알고 나를 위해 알려 준 것들이라고.
“저는…….”
목소리가 형편없이 갈라졌다. 코코가 왜 그러냐는 얼굴로 율리아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녀의 붉은 눈과 하얀 얼굴을 아무렇지 않게 마주하기가 어려웠다.
율리아는 코코와 자신의 사이에 메울 수 없는 시간의 틈이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건 삶이 반복되고 인연이 계속되어도 결코 메울 수 없는 틈이었다.
과거의 코코는 영원히 만날 수 없다. 율리아가 진심으로 사랑했고, 그보다 더 큰 사랑을 주었던 친구. 코델리아 힌치.
그녀는 그때 이미 율리아의 상처를 들여다보고 이후의 아픔까지 걱정하고 있었다.
혼자서만 과거를 기억하는 율리아의 텅 빈 마음은 아무도 채워 줄 수 없었다. 그녀의 고독은 혼자만의 것이었다. 영원히 반복되며 깊어지는 구멍이었다.
그래서 코코는 그때 물망초 머리핀을 사 달라고 말했던 것이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꽃이야.”
다음 삶의 자신이 조금이라도 더 율리아를 좋아하게 해 주고 싶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