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5화 (48/319)

45화

카루스 란케아. 무혈 제독.

하이에나들은 이제 얕은 신음조차 흘리지 못하고 있었다. 찢어질 듯 커진 동공에서 경악과 공포, 후회의 감정이 넘실거렸다.

“의뢰인이 마조람 후작이라면 오르테가는 제국을 향해 반기를 든 역도들의 국가가 된다. 난 그동안 수많은 전장에서 정복 전쟁을 지휘해 왔어. 이 작은 왕국 정도는 한 계절 안에 멸망시킬 수도 있다. 그동안 너희가 활개 치던 이 나라, 너희 가족이 살아가는 터전, 너희 동료들이 묻힌 땅, 모두 잿더미가 되겠지.”

카루스는 교묘하게 과장을 섞어 말했다. 하지만 그의 목소리와 말투가 워낙 담담해, 모두 진실인 것처럼 들렸다.

하이에나들의 낯빛이 창백해졌다. 그들은 어떻게든 변명하려 했으나, 바바슬로프가 시끄럽다며 입에 재갈을 물려 버려서 용서조차 빌 수가 없었다.

율리아는 그 모습을 바라보면서 조금 우습다는 생각을 했다.

돈만 쥐여 주면 아무 죄책감 없이 사람 목숨도 갖다 파는 사람들이, 왕국에 전쟁이 일어날까 봐 걱정하는 꼴이라니.

“그러게 율리아 아르테는 건드리지 말았어야지.”

카루스가 웃으며 건넨 말에 하이에나들이 율리아를 곁눈질했다. 도대체 두 사람의 관계가 뭔지 궁금해하는 기색이라, 이번에는 율리아가 친절하게 대답해 주었다.

“내가 마음을 다해 모시는 분이야.”

그러자 이번에는 카루스가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율리아를 바라보았다.

그날 오르테가에서 가장 실력 있는 암살자 길드의 은신처 한 곳이 초토화되었다. 십수 명의 노련한 하이에나가 단 세 명에 의해 처리된 것이다.

율리아는 짐이 된다는 이유로 마차 안에서 그들을 기다렸다.

하이에나들은 카루스와 그의 부하들을 우습게 본 나머지 달아나지 않고 싸우는 길을 택했다. 그래서 더 피해가 컸다.

카루스는 의뢰인이 누군지, 너희 정체가 뭔지, 그런 것조차 묻지 않고 놈들의 은신처를 쓸어버렸다.

그런데 그들 중에도 싸우지 않고 달아나는 길을 선택한 자가 있었다.

한 남자가 동료들을 버린 채 몰래 창고 밖으로 나오더니 말을 타고 부리나케 달아났다. 젊은 남자였다. 율리아는 마차 안에서 그 모습을 목격했다.

처음엔 소리를 질러 카루스에게 알릴까 생각했다. 하지만 바람이 불어 남자가 쓰고 있던 두건이 벗겨지고 그 얼굴을 확인한 순간, 그녀의 입이 조개처럼 딱 다물렸다.

‘해방군?’

달아나는 젊은 하이에나는 해방군이었다.

착각이 아니었다. 착각일 수가 없었다. 율리아는 한때 해방군과도 손을 잡았던 과거가 있었다.

남자는 해방군 중에서도 꽤 중요한 일을 맡아 간부에 속하는 자였다. 바로 해방군의 활동 자금을 조달하는 역할이었다.

‘해방군의 돈이 하이에나들로부터 나오는 거였어?’

가슴이 서늘해졌다.

하이에나들에게 돈을 주는 건 마조람 후작과 몇몇 귀족들이었다. 그 돈은 하이에나를 거쳐 해방군에게 흘러갔다.

왕국을 제국으로부터 독립시켜야 한다며 싸워 보기도 전에 항복한 국왕을 조롱하고 모욕하던 자들이, 친제국파의 거두인 마조람의 돈으로 살아가고 있다니.

‘마조람 후작은 그걸 알면서도 저들에게 돈을 보냈던 걸까? 아니면, 모르고 한 짓이었나?’

어느 쪽이건 이건 엄청난 정보였다. 율리아의 머리가 빠르게 굴러갔다.

이 일을 고발해서 자신이 얻을 수 있는 건 무엇인가. 숨기고 있다가 시기를 봐서 터뜨리는 게 좋을까. 증거를 모으려면 어디부터 건드려야 할까. 이 정보는 그럼 누구와 공유해야 하나.

그때 마차 문이 열리더니 카루스가 손을 내밀었다.

“다 끝났으니까 나와도 된다.”

깊은 생각에 빠져 있던 율리아가 퍼뜩 놀라 그를 바라보았다.

“벌써요?”

“바바슬로프가 미친놈처럼 날뛰었어.”

율리아가 카루스의 손을 잡고 마차에서 내리자, 바바슬로프가 쑥스럽다는 듯 머리를 벅벅 긁으며 말했다.

“미친놈이라뇨. 제가 남부 함대 군함 수리하느라 얼마나 고생했는지 아십니까? 우리 율리아가 노련한 기술자들이 어디에 있는지 알려 줘서 망정이지! 안 그랬으면 똥구멍 빠지게 고생할 뻔했어요.”

맥스웰이 남의 옷으로 칼에 묻은 피를 닦아 내며 웃었다.

“시녀님이 언제 너네 율리아가 됐냐? 아까 못 들었냐? 이제 카루스 대장을 모시기로 했다잖아. 우리 율리아라는 말은 대장이 해야 맞는 거지.”

“뭐? 에이 씨.”

“욕했냐, 지금? 카루스 님, 이 새끼가 지금 욕을…….”

바바슬로프와 맥스웰이 치고받고 싸우는 동안, 율리아는 카루스의 곁에 우두커니 서서 하이에나들의 은신처를 바라보았다.

건물은 불타오르고, 그동안 지긋지긋하게 그녀를 괴롭혔던 암살자들은 그 안에서 모두 숨이 끊어진 채 쓰러져 있었다.

속이 후련하다거나 갑자기 마음이 편해지지는 않았다. 약간의 안도감 끝에는 언제나 길고 고통스러운 기억이 뒤따랐다.

율리아는 망가진 인형처럼 축 늘어진 하이에나들을 응시하며 조용히 입을 열었다.

“여름 첫날을 전후로 태풍이 심하게 불 거예요. 해일도 올 거고요. 뱃사람들의 경고가 있겠지만 안일해진 사람들이 그 말을 무시하는 통에 피해가 클 거예요. 군함을 뭍에 불러들이고 미리 대비하세요.”

율리아와 함께 서서 하이에나들의 은신처가 타오르는 모습을 바라보던 카루스가 고개를 내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바바슬로프도, 맥스웰도 그녀를 바라보았다.

먼저 대답한 건 바바슬로프였다. 율리아의 말을 철석같이 믿는 그였기에, 이번에도 망설임 없이 수긍했다.

“그래? 알았어.”

맥스웰이 반신반의하며 물었다.

“예언입니까?”

“어떻게 생각하셔도 상관없어요.”

“뭐…… 시녀님 말씀대로 미리 대비해서 나쁠 건 없겠죠. 함대에 배가 한두 척도 아니고…… 하나라도 부서지면 손해가 이만저만이 아니니까. 그렇죠? 예?”

맥스웰이 카루스를 곁눈질하며 눈치를 살폈다. 혹시 카루스가 헛소리하지 말라며 율리아를 비웃으면 어쩌나 하는 우려에서 나온 행동이었다.

그러나 그건 괜한 걱정이었다. 카루스가 순순히 고개를 주억거리더니 율리아에게 이렇게 말한 것이다.

“다음엔 오르테가 왕궁에서 만나게 되겠군.”

율리아가 그를 바라보았다. 오르테가 왕궁에 카루스 란케아가 나타난다니. 그녀의 눈동자가 반짝 빛났다.

카루스는 입가에 약간의 웃음기를 머금고 있었다.

“폐하께서 날 남부 함대의 신임 제독으로 임명하셨으니, 이제 오르테가의 해상 지휘권은 내게 있다고 봐야 해. 당연히 너희 나라의 국왕에게도 통보해야겠지.”

“……아.”

“폐하의 심중을 다 알 수는 없지만, 그거 하난 확실하다. 그분은 오르테가의 친구가 될 생각이 없어.”

얼마 전 황제의 임명서를 손에 쥔 전령이 제국에서 출발했다.

카루스는 전령이 황제의 대리인으로서 오르테가 왕궁을 방문할 것이며, 그 자리에서 자신에게 남부의 제독이란 칭호를 내릴 거라고 말했다.

율리아는 그 안에 감춰진 황제의 속내를 읽었다.

“오르테가의 귀족들에게 경각심을 주기 위해서라도 불쾌한 등장을 하겠네요.”

카루스가 역시, 하고 중얼거리며 율리아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그러곤 몸을 숙여 그녀에게 가까이 다가가 속삭였다.

“날 이용해.”

“카루스 님.”

“네가 원할 때, 원하는 곳에, 원하는 방식으로 등장할 테니.”

맹세를 받았으니 보답할 차례다. 카루스의 말은 그런 뜻이었고, 율리아는 습관처럼 웃으려다 실패한 채 그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나는 이전의 삶에서 왜 당신에게 먼저 다가가 손을 내밀지 못했을까. 그 많은 삶을 통틀어 나의 적들이 가장 두려워한 상대는 당신이었는데.

답은 간단했다. 너무 멀었기 때문이다. 카루스 란케아는 율리아 아르테가 감히 탐내서는 안 되는 고귀한 사내였으니까.

카루스 란케아의 무용담은 조만간 바이칸 제국을 넘어 오르테가에 상륙할 것이다. 카루스가 북부에서 쌓아온 영웅적인 행보는 절대 그를 배신하지 않으리라.

황제만큼 멀었던 사내가 눈앞에 있었다. 손을 뻗으면 잡을 수 있고, 눈을 맞추면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카루스 님, 저를 믿으세요?”

율리아가 저도 모르게 진심을 내뱉었다. 꼭 믿어 달라고 조르는 말 같아서, 그녀는 묻자마자 후회했다.

그런데 카루스가 이렇게 말했다.

“노력해 보고 있다.”

심장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눈물이 목 아래에서 찰랑거렸다.

어떻게 해야 이 남자의 신뢰를 얻을 수 있을까.

내가 알고 있는 모든 걸 털어놓으면 되려나. 나는 당신을 완전히 믿지 않는데, 당신이 나를 완전히 믿어 주길 바라는 건 너무 이기적이다.

율리아가 입술을 꾹 깨물었다.

* * *

하이에나들의 은신처를 쑥대밭으로 만들고 돌아온 율리아를 보고, 코코가 안심했다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말하지 않아도 대충 알겠다는 뜻이라 율리아는 곧장 자신의 방으로 갈 수 있었다.

온종일 잔뜩 긴장한 채 율리아를 기다렸던 트루디가 달리다시피 나타나 시중을 들었다.

“저기, 시녀님. 식사는 하셨어요? 간단한 요깃거리라도 준비해 올까요?”

“목욕물부터 받아 줘.”

“네, 네! 시녀님, 잠시만 기다리세요.”

목욕물을 받고 수건과 가운을 준비하던 트루디의 시선이 율리아의 발치에 닿더니, 이내 하염없이 흔들렸다.

구두 뒷굽에 닿을 듯 긴 치맛자락에 거무스름한 핏물이 묻어 있었다. 구두 밑창도 마찬가지였다.

사람의 피가 분명했다. 율리아는 상처 하나 없이 태연한 기색인데, 그녀의 신발엔 누군가 흘린 피가 말라붙어 있었다.

“시, 시, 시녀님.”

“왜 그래?”

“피, 피가…….”

“피?”

율리아가 눈동자만 굴려서 자신의 신발을 보았다. 그러곤 트루디가 뭘 두려워하는지 안다는 듯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걱정할 거 없어, 트루디.”

“네?”

“널 의심하진 않을 거야. 그들은 누구한테 당하는 줄도 모른 채 죽었을 테니까.”

“주, 죽었다고요? 전부 다요?”

“그건 아니지만…….”

하이에나 소굴에서 달아나던 해방군이 떠올랐다. 율리아의 얼굴에 스산한 기운이 감돌았다.

“아무튼, 놈들은 네가 배신했다는 걸 눈치채지 못할 거야. 그러니까 걱정할 것 없어.”

“네…… 시녀님.”

트루디가 그제야 안심했다며 애써 웃음 지었다. 율리아는 트루디가 안심하거나 말거나 관심 없었기에 곧장 욕실로 들어가 몸을 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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