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화
트루디의 얼굴에 어쩔 수 없는 탐욕의 빛이 어렸다. 주머니 안에 들어 있는 건 트루디가 평생 만져 본 적도 없는 큰돈이었다.
율리아가 혼자 외출했다는 걸 하이에나에게 알려 줬을 때도 트루디의 손에 들어온 건 금화 두어 개가 전부였다.
“비밀도 지켜 줄게.”
율리아의 말투가 꼭 노래하는 것처럼 들렸다. 그녀는 별 감정 없이 담백하게 말하고 있는데도 긴장한 트루디의 귀에는 꼭 그렇게 들렸다.
“네 정체를 들켰다는 것도 비밀로 해 주지. 내 전속 하녀가 되어서 그들에게 종종 정보를 물어다 줘도 괜찮아. 물론 내가 시키는 대로 해야겠지만.”
“그러면…… 그렇게 하면 저를 용서해 주시는 거예요?”
“용서라니.”
율리아가 웃었다. 메마른 사막처럼 물기 없는 미소였다.
“이건 거래일 뿐이야, 트루디.”
“네? 거래요?”
“너는 내가 허락한 만큼만 저들에게 정보를 가져가고, 나는 그 대가로 네게 금화를 주는 관계지. 네가 영리하게만 군다면 저들이 네게 주는 대가도 이중으로 챙길 수 있을 거고.”
율리아의 깔끔한 정리에 트루디가 홀린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만 할 수 있다면 뭐든 시키는 대로 하겠다고 몇 번이나 머리를 조아렸다.
트루디는 눈치가 빠르고 손재주가 좋았다.
율리아가 일찍 일어나는 편이라는 걸 알게 된 뒤에는 평소보다 더 일찍 일어나 그녀의 아침 준비를 도왔고, 율리아가 식사할 때는 옆에 바짝 붙어 서서 그녀의 식성을 살폈다.
마치 귀족 아가씨와 그녀의 종을 보는 듯했다.
같은 평민끼리 주종 관계로 지내는 게 불만일 법도 했지만, 트루디는 정말 아무렇지도 않았다.
트루디가 율리아에게 약점 잡혔다는 사실을 모르는 다른 하녀들은 그녀를 성격 좋은 아이라고 입을 모아 칭찬했다.
“궁내부 관리님께는 한 달에 한 번 보고하게 되어 있어요. 주로 왕자궁에서 일어나는 일이나 왕자님과 시녀님들의 관계, 혹은 자주 찾아오는 손님 명단이죠.”
“하이에나들은?”
“하이에나들은 율리아 시녀님이 언제 외출하는지, 누구를 만나는지, 이왕이면 어디로 외출하는지도 알려 달라고 했고요.”
“여기 들어온 지 며칠 되지 않았으니까 궁내부에 보고하려면 한 달이나 있어야 하네?”
“급한 일이 있거나 중요한 사건이 일어났을 때는 연락할 수 있어요. 하녀들은 궁을 옮기고 싶을 때나 일을 그만두고 싶을 때, 궁내부에 가기도 하니까요.”
“곧 하이에나들이 연락할 거야.”
“네?”
트루디가 어색하게 웃으며 물었다. 아무리 대담한 그녀라도 암살자들과 접촉하는 건 꺼림칙한 모양이었다.
율리아는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날 죽이는 데 실패했으니, 어떻게 지내는지 알아보려 하겠지. 그들이 네게 접근하거든 이렇게 말해.”
“어떻게요?”
“율리아 시녀가 겁을 먹었는지 개인 호위를 들이려고 한다고. 코코 시녀의 반대가 심했지만, 레위시아 왕자 전하께서 너그러이 허락해 주셨다고. 평민 시녀라서 왕궁 인력을 쓸 수는 없기에, 밖에서 호위를 고용하겠다고 했다고.”
“그렇게 말해요? 그러면 하이에나들이 정체를 감추고 시녀님의 호위가 되겠다며 찾아올 텐데…….”
“그러라고 하는 거야.”
이제 귀찮은 하이에나를 소탕할 차례였다.
율리아의 눈빛이 차가웠다. 트루디는 저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키고 재빨리 고개를 끄덕였다.
* * *
트루디는 율리아가 시키는 대로 했다. 그리고 며칠 뒤 그녀의 개인 호위가 되겠다며 두 명의 남자가 찾아왔다.
그들은 모두 멀쩡해 보이는 신분증을 가지고 있었다. 한 명은 은퇴한 용병이었고, 다른 한 명은 왕실 경비로 일했던 경력을 가지고 있었다.
율리아는 그들이 내민 신분증을 믿지 않았다. 어차피 둘 다 하이에나일 테니 남의 것을 그대로 베껴 조작했을 것이다.
“두 분 모두 고용할게요. 왕궁 안에 있을 때는 호위가 필요 없으니 근처에서 숙소를 잡고 대기하세요.”
“알겠습니다.”
그런 뒤엔 맥스웰을 찾았다. 그는 여느 때처럼 율리아의 후원자가 보낸 사람인 양 왕궁을 찾았고, 그녀에게서 하이에나로 추정되는 호위를 고용했다는 말을 들었다.
“나 참, 시녀님이 겁 없는 사람이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건 좀 심한 거 아닙니까? 자기를 죽이려는 하이에나를 가지고 놀다니요.”
“추적해 주실 수 있나요? 은신처를 찾아내서 일망타진할 수 있다면 좋을 것 같아서요.”
“물론입니다. 며칠만 주시죠.”
맥스웰은 그 길로 돌아가 율리아가 고용했다는 두 명의 남자에게 추적을 붙였다.
그들은 며칠 동안 왕궁 앞 숙소에서 움직이지 않았으나, 그림자 정보상의 꼼꼼한 눈을 피할 수는 없었다.
“은신처를 찾았습니다. 그런데 점조직으로 운영되는 암살 길드라서 우두머리가 어디 있는지는 파악하지 못했어요.”
며칠 뒤 나타난 맥스웰은 하이에나들의 은신처를 하나 찾았다며, 율리아에게 이렇게 말했다.
“맡겨 주시죠. 우리 후원자님께서 알아서 하실 겁니다.”
“카루스 님이요?”
“나오는 길에 보고했더니 당장이라도 쳐들어갈 기세였거들랑요. 바바슬로프도 같이 있었는데…… 도끼를 들고 갈까, 철퇴를 들고 갈까 고민에 빠져 있었습니다.”
그토록 고귀한 사람들에게 고작 하이에나 사냥이나 시켜도 되는 건가.
율리아는 잠깐 그런 생각을 했다가 얼떨떨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맥스웰이 능청스럽게 웃는 얼굴로 이렇게 말했기 때문이었다.
“맡겨 보세요. 그 양반이 나쁜 새끼들 때려잡는 데는 아주 도가 텄거든요. 바바슬로프도 따라간다고 지랄할 게 뻔하고, 저도 함께할 예정이니까 걱정할 일은 없을 겁니다. 아니지. 걱정은 그 새끼들이 해야죠.”
“걱정이라기보다는…….”
“마조람 후작과 연결되어 있다는 증언이나 증거를 찾을 수 있다면 좋을 텐데 말입니다.”
그건 아마 찾을 수 없을 것이다. 율리아는 회의적이었다. 이전의 삶에서도, 그 이전의 삶에서도 하이에나들은 철저하게 흔적을 지웠다.
“내일 오후에 외출할게요.”
“대기합죠.”
맥스웰이 신난다고 어깨를 들썩거리며 물러가고, 율리아는 트루디를 통해 숙소에 있는 두 명의 호위 용병에게 내일 오후에 외출할 테니 동행해 달라는 연락을 넣었다.
다음 날 약속한 시각이 되었다. 왕궁 앞에서 대기하고 있던 두 명의 호위 용병은 마차 안에 율리아가 혼자 있다는 걸 확인하고는 저들끼리 은밀하게 눈짓을 주고받았다.
아무리 대담무쌍한 하이에나라도 왕궁 바로 앞에서 살인을 저지를 수는 없었다. 그들은 마부석에 앉아 마차가 왕궁에서 멀어지기를 기다렸다.
사실 그들로서는 의뢰를 세 번이나 실패했다는 것 자체가 수치였다. 아무 힘없는 여자 하나, 그것도 돌봐 주는 사람 없는 평민 고아. 이번 의뢰는 그들에게 파리 사냥이나 다를 바 없어야 정상이었다.
그런데 율리아 아르테는 무슨 행운의 신에게 축복이라도 받았는지, 매번 미꾸라지처럼 그들의 손아귀에서 빠져나갔다.
왕궁 앞 광장을 벗어나 한적한 골목에 접어들기만 하면 이 지긋지긋한 의뢰도 끝이다. 빨리 후작에게 여자의 죽음을 확인시켜 줘야 한다. 잔금도 잔금이지만, 후작가의 압박을 더는 견디기 어려웠다.
그들은 그런 생각을 하며 마차를 몰았다.
그런데 광장을 벗어나기가 무섭게 웬 남자 셋이 말을 타고 오더니 마차 옆에 바짝 따라붙었다.
카루스와 맥스웰, 바바슬로프였다.
“저리 비키시오! 위험하게 무슨 짓을…….”
“아아, 걱정하지 마쇼. 우리는 저 안에 있는 아가씨 친구들이니까. 동행할까 해서 온 거야.”
“뭐요?”
더벅머리의 사내, 맥스웰이 히죽 웃으며 말했다.
“왜, 부딪칠까 봐 무서워? 하이에나가 겁도 많네?”
“뭐라고?”
“하. 이. 에. 나.”
맥스웰이 입을 쩍쩍 벌리고 늘이면서 정확하게 말했다.
들켰다.
두 명의 하이에나가 순식간에 무기를 꺼내 들었다.
이제 그들에게 마차는 중요하지 않았다. 고삐를 내던지다시피 놓아 버린 그들이 무기를 들고 몸을 움직였다. 그러자 검은 망토의 사내, 카루스가 말 위에서 곡예 하듯 마차로 자리를 옮겼다.
그리고 또 한 사람, 말 위에서 언제 공격할까 시기를 재고 있던 마지막 사내가 이를 갈며 말했다.
“야, 똑바로 말해. 너희가 우리 복덩이 괴롭혔냐?”
바바슬로프였다.
그의 손에서 도끼와 철퇴가 동시에 움직였다. 오른손엔 도끼, 왼손엔 철퇴를 든 바바슬로프가 무시무시한 소리를 내며 하이에나에게 덤벼들었다.
두 명의 하이에나는 반항 한 번 제대로 하지 못하고 붙잡혔다. 분노한 바바슬로프의 주먹에 코뼈와 앞니가 다 나가도록 얻어맞은 그들은 온몸이 꽁꽁 묶인 채 마차 안에 구겨 넣어졌다.
“은신처를 불어라.”
카루스가 엎드린 그들의 머리 위에 한쪽 발을 올렸다.
하이에나들은 대답하지 않았다.
암살자들은 죽거나 고문을 당해도 절대 발설해서는 안 되는 게 세 가지 있었다. 은신처와 의뢰인, 그리고 자신의 이름이었다.
카루스의 발에 점점 힘이 들어갔다. 마차 바닥에 쓸려 상처가 벌어지자, 하이에나들의 입에서 고통스러운 신음이 흘러나왔다.
카루스는 그런 그들의 모습을 재미없다는 듯 내려다보다가 심드렁하게 말했다.
“은신처는 여기서 바닷가 반대로 가면 나오는 언덕 위에 있다지. 건조 육류 창고였나. 의뢰인은 마조람 후작일 테고. 네놈들 이름이야 알 바 아니고.”
어떻게 알았지. 하이에나들이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카루스를 바라보았다.
“은신처 하나를 털다 보면 누구 하나는 그다음 은신처를 불겠지. 그럼 그다음 은신처로 가서 똑같은 짓을 반복하는 거야. 그러다 보면 언젠가는 우두머리도 볼 수 있을 거고.”
“끄으……!”
“난 이렇게 말할 거다.”
카루스가 검은 눈을 살짝 휘었다.
“오르테가의 하이에나 따위가 감히 황제 폐하의 두 번째 기사이자 바이칸 제국의 영웅인 카루스 란케아를 해치려 했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