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화
레위시아의 궁에는 시녀장이 없었다. 율리아가 들어오기 전엔 시녀가 코코 하나뿐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모두가 왕자궁의 시녀장은 코코라고 생각하고 살았다.
“신입, 넌 오늘부터 율리아 시녀의 전속 하녀 일을 하도록 해. 평민이라고는 해도 왕자 전하께서 직접 임명하신 측근 시녀에게 전속 하녀가 하나도 없다는 건 말이 안 되는 일이니까.”
“알겠습니다, 코코 시녀님.”
트루디는 붙임성이 좋아 왕자궁에 들어온 지 며칠 만에 다른 하녀들과 꽤 친해진 상태였다.
그녀가 율리아의 전속으로 배정되자, 다른 하녀들이 다가와 축하 인사를 건넸다.
“잘됐다! 율리아 시녀님은 진짜 좋은 분이야. 친절하고, 부지런하셔. 넌 아마 우리 궁에서 제일 편한 하녀가 될 거야.”
“과자를 좋아하시니까 때마다 간식이나 잘 챙겨드리면 될걸?”
하녀들이 모여서 재잘재잘 떠들었다. 코코가 팔짱을 낀 채 그들의 대화를 듣다가 사악해 보이는 미소를 띠고 말했다.
“참 이상하네? 내 귀엔 너희 말이 왜…… 율리아 시녀님은 착하고 좋은데, 코코 시녀님은 성격이 더럽고 까탈스럽다는 말로 들리는 걸까? 지금까지 내 전속 하녀한테는 우리 궁에서 제일 힘든 일을 하게 되었다고 위로라도 해 왔니?”
하녀들이 그런 거 아니라면서 고개를 마구 흔들었다.
“네? 코코 시녀님, 무슨 그런 말씀을 하세요. 저희가 언제!”
코코가 악당 같은 웃음을 머금고 한 사람, 한 사람을 노려보았다. 그러자 하녀들이 슬그머니 딴청을 부리더니 각자 할 일이 있다며 뒷걸음질을 쳤다.
“어머, 빨래가 다 말랐는지 가서 확인해야겠어요.”
“저는 물 올려놓은 걸 깜박해서…….”
“복도 청소나 할까? 아니면 창문?”
하녀들이 각자 일터를 향해 흩어진 뒤, 코코가 트루디에게 고갯짓을 하며 말했다.
“따라와.”
“네! 코코 시녀님.”
트루디가 생긋 웃으며 코코의 뒤를 따라 걸었다.
젊고 빠릿빠릿한 아이였다. 친근한 성격은 둘째치고서라도 일머리가 야무지지 않으면 저 약아빠진 하녀 애들이 이 아이를 이렇게 예뻐할 리가 없다.
코코는 창문 유리를 곁눈질하며 트루디의 표정과 태도, 걸음걸이를 살폈다.
“알고 있겠지만, 우리 궁에서 율리아의 신분은 중요하지 않아. 왕자 전하께서 친히 뽑아 데려온 시녀라는 것만 기억해. 하물며 왕자궁에서 둘뿐인 측근 시녀 중에 하나니까 성심성의껏 보살피도록 하고.”
“네! 명심하겠습니다.”
트루디가 생글생글 웃는 얼굴로 대답했다. 몸가짐은 다소곳한데 목소리는 야무지고 힘이 있는 아이였다.
코코는 트루디를 관찰하는 걸 멈추고, 율리아의 방 앞에 섰다.
“나야.”
“오셨어요?”
율리아가 웃으며 문을 열었다. 그녀의 시선이 코코의 뒤로 움직였다. 트루디가 얌전하게 보이려 애쓰면서 고개를 살짝 숙이고 있었다.
율리아가 어서 오라며 문을 활짝 열자, 코코가 빠르게 걸어 방 안으로 들어갔다. 슬쩍 눈치를 보던 트루디도 코코를 따라 율리아의 방으로 들어갔다.
“거기 앉아.”
그런데 둥근 테이블 앞엔 의자가 하나뿐이었다. 트루디는 순간 당황해서 율리아와 코코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제가 앉아요?”
“그래, 너 앉으라고 둔 의자야.”
“두 분은…….”
“앉아. 여러 말 하지 말고.”
코코가 짜증을 냈다. 평소처럼 까칠하긴 했어도 기분이 나빠 보이진 않았는데, 갑자기 자신을 향해 적대적인 시선을 보내는 코코 때문에 긴장한 트루디가 꿀꺽 침을 삼켰다.
“앉아.”
율리아의 얼굴에도 웃음기가 없었다.
트루디가 의자에 앉았다. 그녀는 무릎 위에서 두 손을 모아 잡고, 겁먹은 토끼처럼 율리아와 코코를 올려다보았다.
그러자 코코가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웃었다.
“이것 좀 보게. 연기 잘하네.”
“저기, 두 분 시녀님…… 왜 이러세요? 제가 무슨 잘못이라도…….”
율리아가 코코에게 공감한다는 눈빛을 보냈다.
트루디는 연기를 잘했다. 적당히 긴장하고, 적당히 무서워하는 얼굴. 그러면서도 두 사람의 반응을 놓치지 않으려는 듯 부지런하게 시선을 굴렸다.
이번에는 코코가 율리아에게 눈짓했다. 너 알아서 하라는 뜻이었다.
고개를 끄덕거린 율리아가 트루디에게 물었다.
“이름이 뭐지?”
“네? 제 이름은…… 트루디입니다.”
“진짜 이름.”
“율리아 시녀님, 정말 왜 이러시는 거예요? 제 이름은 트루디가 맞아요. 제가 뭘 잘못했는지 알려 주세요.”
트루디는 영문을 몰라 당황하고 있었다.
율리아는 그녀가 지금까지는 아주 잘해 왔다고 생각했다. 하녀가 왕궁에서 첩자 노릇을 하려면 이 정도 배짱은 있어야 한다.
“널 왕자궁으로 보낸 사람은 궁내부 관리겠지? 내가 외출하자마자 하이에나들에게 연락했을 거고……. 트루디, 난 그 모든 과정을 알고 싶어.”
트루디의 눈동자가 동그랗게 커졌다. 입을 헤 벌린 그녀가 그게 무슨 말이냐고, 하나도 못 알아듣겠다는 얼굴로 율리아를 바라보았다.
코코가 비웃으며 한마디 거들었다.
“연기 잘한다니까.”
율리아는 시간을 들여 트루디를 설득하려 하지 않았다. 그런 건 아군으로 만들 가치가 있고, 서로에게 신뢰가 필요한 상대에게나 들이는 수고였다.
이럴 때는 설득보다 협박이 낫다.
“난 하이에나에게 총 세 번 죽을 뻔했어. 세 번째 죽을 뻔했던 건 네 덕이었고. 이제는 나도 널 봐줄 수가 없어.”
“시녀님…….”
“난 이대로 너를 끌고 왕실 기사단이나 치안대로 갈 수도 있어. 왕자 전하께 말씀드린 다음에, 널 지하 감옥에 가두어 두고 고문하거나 처형할 수도 있지. 그리고 그 사실을 궁내부와 하이에나에게 알리는 거야.”
트루디가 짧게 숨을 멈추었다. 율리아는 그 변화를 놓치지 않았다.
“트루디라는 첩자가 하이에나와 손을 잡고 레위시아 왕자님의 측근 시녀를 살해하려다 붙잡혔다고 소문을 내거나.”
“시녀님, 저는.”
“이 모든 게 마조람 후작의 명령이었다고 자백했다고.”
“아니에요!”
트루디가 날카롭게 소리쳤다.
“아니에요, 시녀님. 저는 시골에서 자라서…… 도시에 아는 사람이 하나도 없어요. 왕궁에 들어온 건 아버지가 지방의 작은 영주 성에서 일하는 분이어서, 제가 영리하고 일을 잘한다고 영주님께 추천하는 바람에!”
“첩자에게는 언제나 잘 꾸며진 배경이 있지.”
“어릴 때부터 왕궁에서 일하는 걸 동경해 왔어요. 그래서 시험을 여섯 번이나 치렀단 말이에요. 시골 출신이라 복잡한 왕실 법도를 외우는 건 너무 어려웠지만, 마지막 성적은 좋았어요. 믿어 주세요!”
“트루디, 어제 나를 쫓던 하이에나는 죽었을 거야.”
율리아가 말했다. 단조로운 말투였다.
“날 죽이지 못했으니까 당연히 제거되었겠지. 이제 너도 마찬가지일 거고.”
트루디의 호흡이 조금씩 빨라졌다. 그녀는 제법 잘 발뺌하고 있었지만, 율리아는 거기에 속아 줄 상대가 아니었다.
율리아가 마지막으로 말했다.
“첩자를 제거할 때는 그와 연관된 자들까지 모두 꼬리를 잘라. 그게 기본이지. 그들이 네게 얼마를 제시했는지는 모르지만, 우리에게 들킨 이상 너와 네 가족은 동전 하나 받지 못한 채 모두 제거될 거야.”
왕궁에 첩자를 심을 때는 대부분 가족을 인질로 잡는다. 배신할 경우를 대비하기 위함이었다.
율리아는 이 모든 걸 코코에게 배웠다. 동의를 구하기 위해 그녀를 바라보자, 코코가 단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트루디, 누구에게 충성하는지 말해.”
“아니에요. 저는…… 억울해요. 저는 아무 짓도 하지 않았는데, 시녀님이 저를…….”
그때였다.
“답답해서 안 되겠다.”
말없이 서 있던 코코가 앞으로 걸어 나와 손을 뻗었다. 그러곤 트루디의 머리채를 휘어잡고 가까이 끌어당겼다.
“아악!”
트루디가 비명을 질렀다.
코코는 트루디의 시야에 자신의 두 눈만이 담기도록 아주 가까운 거리에서 그녀를 노려보며 말했다.
“영리한 애가 왜 이렇게 답답하게 구니. 여기서 네가 누구에게 충성하느냐에 따라 얻고 잃는 게 달라질 수 있다고 말하는 거잖아. 우리가 왜 널 깔끔하게 죽여 없애지 않고 이렇게 몰래 데려왔다고 생각해?”
트루디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그녀는 연기를 이어 가면서도 맹렬하게 머리를 굴렸다.
어떻게 하면 여기서 벗어날 수 있나. 벗어날 수 없다면 어떻게 해야 하나. 누구의 손을 잡아야 목숨을 부지할 수 있을까.
코코는 잡았던 머리채를 놓고 손을 털어 낸 뒤, 트루디에게 생각할 수 있는 시간을 주었다.
“저는, 저는…….”
사실 그녀가 첩자라는 걸 들킨 이상, 선택지는 하나뿐이었다.
애처롭게 흔들리던 트루디의 눈동자에 명료한 빛이 돌아왔다.
“살려 주세요.”
계산을 마친 그녀는 피가 나도록 입술을 세게 깨물고, 그 자리에 엎드렸다. 그러곤 율리아와 코코에게 빌었다.
“살려 주세요. 염치없는 줄 알지만…… 저도 어쩔 수 없었어요. 가족을 지키려면 무슨 일이라도 해야만 했어요. 몇 년만 여기서 성실하게 일하면서 왕자님과 율리아 시녀님을 지켜보라고 했어요. 그게 다예요.”
“트루디.”
“연락은 심부름꾼을 통해서 했어요. 왕궁엔 바깥으로 소식을 물어 나르는 심부름꾼이 있어서, 그에게 부탁했어요.”
“그게 누군데?”
“식료품 상인이요. 궁을 수시로 들락거리면서 달걀이나 채소를 배달해 줘요. 제게 2왕자궁으로 들어가라고 하신 분은 궁내부 사람이었지만, 율리아 시녀님을 지켜보라고 한 건 암살자들이었어요.”
“그럼 너 때문에 율리아가 죽을 거라는 걸 알면서 그 짓을 했다는 거네?”
코코가 입술을 비틀었다. 트루디의 머리채를 다시 잡으려던 그녀는 그만하라는 율리아의 만류에 버럭 짜증을 냈다.
“얘 때문에 죽을 뻔했잖아! 넌 그게 아무렇지도 않니? 나 같으면 아주 뼈째로 갈아 마시고 싶을 텐데!”
“화내서 이로울 일이 아니잖아요. 우리 이성적으로 생각해요.”
“사람이란 건 있잖아. 때로는 머리가 아니라 가슴으로 판단하기도 하는 거야. 그러라고 신께서 심장이란 걸 만들었거든? 그러니까 이럴 때는 이 계집애 머리채를 잡고 흔들다가 뺨을 후려치고, 너도 한번 당해 보라고 목을 졸라도 된다는 뜻이야!”
코코가 고함을 지르자, 트루디가 겁먹은 얼굴로 율리아를 바라보았다. 살려 달라고 매달리고 빌어야 할지, 아니면 이대로 입을 다무는 게 좋을지 판단이 서지 않는 모양이었다.
율리아는 그중 어느 쪽도 바라지 않았다. 그녀가 원하는 건 따로 있었다.
“트루디, 이름을 말해.”
“네?”
“너에게 그런 명령을 내린 사람, 너를 여기 데려온 사람, 너를 선택한 사람, 네 심부름을 해 준 사람, 모두.”
“율리아 시녀님!”
“그러면 이걸 주지.”
율리아가 묵직한 주머니를 바닥에 툭 내려놓았다. 바닥에 엎드려 있던 트루디는 그 안에 번쩍거리는 금화가 가득 들어 있다는 걸 눈치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