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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화 (45/319)

42화

손바닥보다 더 작은 상자였다. 은은한 진주색 상자에 진한 보라색 리본이 대비되어 포장이 아주 예뻤다.

“이게 뭔데?”

“저희도 몰라요. 선물인 것 같은데…… 빨리 열어 보세요!”

“흥.”

코코가 코웃음 치며 손가락을 움직였다. 외박하더니 또 어디서 길거리 과자라도 사 온 모양이라고 투덜거리기도 했다. 그러면서도 입에 침이 고여, 코코의 얼굴이 느슨하게 풀어졌다.

그녀는 예쁘게 매듭지어진 리본을 풀고, 작은 상자의 뚜껑을 열었다. 그러곤 그 안에 들어 있는 것을 손가락으로 집어 밖으로 꺼내 보았다.

“어머나!”

“아가씨, 세상에…… 너무 예뻐요!”

그건 아주 예쁜 머리핀이었다.

길고 얇은 핀에 물망초를 닮은 꽃이 빼곡하게 장식되어 있고, 꽃잎 사이사이 진주가 이슬처럼 알알이 박혀 몹시 화려하고 아름다웠다.

코코의 곁에서 상자가 열리기만을 기다리던 하녀들이 감탄하며 머리핀을 바라보았다.

코코가 조그만 소리로 중얼거렸다.

“어떻게 알았지.”

왕자궁엔 코코의 생일 날짜에 대해 아는 사람이 많지 않았다. 기껏해야 전속 하녀들과 레위시아 왕자 정도일 것이다.

“너희가 말했니?”

“아뇨. 저희는 아니에요.”

“그럼 레위시아 님인가?”

“왕자 전하께서도…… 아닐 것 같아요. 매해 까먹으시잖아요. 전하께서 아가씨 생일을 기억한 적이 있나요?”

“없지.”

레위시아는 자기 생일도 잘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코코도 마찬가지였다.

“누가 말해 줬겠죠. 그나저나 정말 예쁜 머리핀이네요. 게다가 아주 비싸 보여요. 율리아 시녀님은 도대체 그 많은 돈이 다 어디서 났을까요? 가난해서 귀족들의 후원을 받았었다고 들었는데…….”

“시끄러워. 남의 일에 웬 관심이 그렇게 많니?”

“부러워서요!”

하녀들이 애교 있게 웃었다. 코코는 그들에게 늦었으니 너희도 어서 가서 자라는 말을 하고는 침실에 혼자 남았다.

달빛이 밝았다. 커튼을 치고 거울 앞에 앉은 코코가 머리핀을 다시 꺼내 들었다.

“율리아 아르테.”

어떻게 알았을까. 정말 레위시아 왕자가 알려 준 건가. 왕자는 요즘 눈코 뜰 새 없이 바빠서 코코의 생일 같은 건 기억할 여유가 없었을 텐데.

이 머리핀을 보니 율리아가 사례라며 억지로 씌워 줬던 티아라가 떠올랐다. 코코는 장신구 함에서 그것도 꺼내 화장대 위에 나란히 올려놓았다.

종류는 다르지만 모두 진주였다. 코코가 가장 좋아하는 보석.

사람들은 그녀의 화려한 외모만 보고 자수정이나 사파이어, 루비를 주로 선물하곤 했다. 하지만 코코가 세상에서 제일 좋아하는 건 우아한 진주였다.

“내 취향은 어떻게 알았지.”

율리아 아르테. 분명 이번에 처음 알게 된 아이였다. 레위시아 왕자가 귀찮아 죽겠다고 투덜거리면서 나갔던 브레웨 아카데미 졸업식에서 만나 데려온 아이.

처음엔 맹랑한 평민이라고 생각했다. 겁 없고, 무모한 아이라고. 그러다 며칠 지나고 보니 맹랑하기만 한 줄 알았던 그 아이가 제법 강단 있고 똑똑하다는 것도 알게 됐다.

가까워진 계기도 어이없었다.

코코는 율리아가 평민이라는 이유로 핍박받는 게 싫었다. 레위시아 왕자가 직접 임명한 시녀인데, 하녀보다 못한 대우를 받아서는 왕자의 체면이 서질 않았다.

그래서 대신 화를 냈다. 코코는 왕궁 안에서 손꼽히게 영향력 있는 시녀였으니까.

율리아는 그걸 당연하다는 듯 받아들였다. 사실 코코는 그 점이 가장 이상했다. 어색해하거나 불편해하거나, 혹은 고마워하며 의지하거나. 그래야 하는 것 아닌가.

율리아는 어느 쪽도 아니었다. 그녀는 마치 코코가 그렇게 반응할 줄 알았다는 얼굴을 하고선 일이 커지지 않도록 자연스레 수습했다.

이게 스물한 살짜리 여자애가 처음 들어온 왕궁에서 처음 만난 귀족들을 상대로 할 수 있는 행동인가.

“아니야.”

코코는 부정적이었다.

“노련한 시녀장이면 모를까.”

의심스러운데 의심할 수가 없다. 율리아의 과거는 너무 확실해서 의뭉스러운 구석이 없었다. 마조람 후작가에 가지는 반감도 백번 이해가 됐다. 레위시아의 궁으로 온 것도 아주 잘한 선택이었다고 생각한다.

게다가 이제는 율리아가 레위시아에게 아주 중요한 사람이 되었다는 걸 안다. 시녀로서, 스승으로서, 또 여자로서.

“율리아 아르테…….”

아무래도 조금 더 눈여겨봐야 할 것 같다. 코코는 율리아가 마음에 들었다. 오랜만에 만난 호감이 가는 상대였다. 그래서 이 작은 위화감이 부정적으로 변하지 않길 바랐다.

물망초를 닮은 꽃에 진주 장식이라.

코코가 스치듯 짧은 미소를 머금고 머리핀을 집었다. 그러곤 화장대 보석함 제일 위에 올려놓았다.

* * *

다음 날 평소보다 조금 일찍 일어난 코코가 1층으로 내려와 율리아에게 물었다.

“너 솔직히 말해. 오늘이 내 생일인 건 어떻게 알았어?”

율리아는 하녀들과 함께 궁을 장식할 꽃 장식을 만들고 있었다. 하녀들이 만든 건 하나 같이 예쁜데, 율리아가 만든 건 괴상하기 짝이 없었다. 솜씨가 영 좋지 못한 그녀 때문에 하녀들이 웃음을 참느라 입술을 실룩거렸다.

“코코, 일찍 일어났네요.”

“말 돌리지 마. 내 생일은 어떻게 알았냐니까?”

“몰랐는데요.”

율리아가 천연덕스럽게 웃었다. 그러곤 코코에게 되물었다.

“오늘이 생일이었어요? 축하해요, 코코.”

코코가 한쪽 눈썹을 휙 들어 올렸다. 그러곤 의심스러워하는 기색으로 율리아의 얼굴을 자세히 살펴보며 물었다.

“진짜 몰랐다고?”

“제가 코코 생일을 어떻게 알아요. 어제 그 선물은요. 바깥에서 돌아다니는데, 너무 예쁜 게 있길래 코코한테 어울릴 것 같아서 그냥 산 거예요. 그동안 왕궁에 적응할 수 있게 도와준 것도 고맙고…….”

“너답지 않게 말이 긴 걸 보니까 거짓말이구나?”

코코가 턱을 슬쩍 올리며 웃었다. 율리아는 그렇다고도, 아니라고도 하지 않았다.

“야, 난 빚지고는 못 사는 성격이야. 두 배, 세 배로 돌려줘야 속이 편하다고. 율리아 아르테. 어제 그 머리핀이 생일 선물이 아니라면, 그럼 뇌물이니? 도대체 나한테 원하는 게 뭔데?”

“작은 부탁이 하나 있어서요.”

율리아가 냉큼 말했다. 그녀가 끝까지 아니라고 발뺌할 줄 알았던 코코는 살짝 당황한 얼굴로 율리아를 바라보았다.

“뭐? 무슨 부탁?”

“저랑 둘이 얘기 좀 해요.”

율리아가 꽃 장식을 내려놓고 코코에게 다가왔다. 그러곤 자신의 방으로 이끌었다.

아직도 전속 하녀 없이 혼자 모든 걸 해결하는 율리아의 방은 삭막함 그 자체였다. 넓고 깨끗하긴 했으나 기본적인 장식만 있을 뿐, 그 흔한 인형이나 꽃병 하나 보이지 않았다.

“도대체 뭔데 이래?”

“하녀들 있는 데선 말하기 곤란해서요.”

“그러니까 나한테 그렇게 은밀하게 해야 할 얘기가 뭔데 이러냐고 묻잖아. 누가 보면 내가 네 보모라도 되는 줄…….”

“첩자가 있어요.”

“뭐야?”

코코가 확 짜증을 내더니, 입술을 비틀고 혀를 쯧 찼다.

“네가 뭔가 착각한 건 아니고? 왕궁에 첩자가 많은 건 나도 아는데, 적어도 여긴 아니야. 마조람 후작 같은 변태가 아니고서야 첩자를 들여보낼 만큼 레위시아 왕자님을 경계하는 놈은 없어.”

“이름이 트루디였나. 새로 들어온 하녀가 의심스러워요.”

“야, 궁내부 새끼들이 아무리 개 같아도 그렇게 막무가내로 굴지는 않을 거…….”

“엊그제 외출하자마자 길거리에서 습격을 당했어요. 하이에나였고, 자살을 각오한 것 같았어요. 제가 운 좋게 길에서 일행을 만나지 않았다면 당신은 오늘 제 시체를 확인하고 있었을 거예요.”

“뭐? ……야.”

“이른 시간이었고, 제가 외출하는 걸 본 사람은 세 명뿐이에요. 새로 들어온 하녀와 입구 경비병, 그리고 제가 타고 나간 마차의 마부.”

“그 마부나 병사는 왜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마차는 아무거나 골라 탔고, 병사님은 지난번에 코코가 믿을 만한 사람이라고 말했으니까.”

“이 빌어먹을 궁내부 놈들이.”

코코가 욕설을 중얼거렸다. 그녀의 하얀 얼굴이 잔뜩 찡그려져 있었다.

율리아는 코코에게 조금 더 다가가 그녀의 귓가에 속삭였다.

“부탁이 있어요.”

“시끄러워. 너 당장 나가서 그 새로 들어왔다는 계집애 데리고 들어와. 영혼까지 쥐어짜서라도 자백하게 만들어서 궁내부를 뒤집어 버릴 테니까.”

“그건 너무 소모적이에요. 우리가 그럴수록 놈들은 더 교묘하고 은밀하게 첩자를 들일 거예요. 마조람 후작은 오르테가 왕궁 어디에나 자신의 눈과 귀가 있기를 바랄 테니까요.”

“그럼 뭘 어떻게 하겠다는 거야? 그 자식이 원하는 대로 정보를 줄줄 흘려주기라도 하겠다는 거…….”

거기까지 말하던 코코가 붉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말했다.

“너 설마.”

“코코, 부탁이 있어요.”

“야, 너 진짜.”

“새로 들어온 하녀를 제 전속 하녀로 배정해 주세요.”

“이 나쁜 계집애.”

코코가 속삭이듯 중얼거렸다. 율리아는 그런 칭찬 많이 들어 봤다는 말로 그녀를 짜증 나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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