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화
레위시아는 꼭 스승에게 첫사랑 이야기를 해 달라고 조르는 학생처럼 호기심 많은 눈을 하고 있었다. 응접실 한쪽에서 코코가 그를 비웃었지만 꿋꿋하게 무시하며 율리아를 바라보았다.
율리아가 고개를 한쪽으로 기울이며 물었다.
“전하, 바실리 얘기를 하고 싶으신 거예요?”
“뭐? 거기서 왜 바실리 그 자식 얘기가 나와? 나는 네가 생각하는 첫사랑의 정의를 물었을 뿐인데.”
“제 첫사랑이니까요.”
“아니라고 해. 다른 사람이 그러면 모를까, 너 스스로 그렇게 생각하는 건 좀 이상해.”
레위시아가 질색하며 고개를 저었다. 율리아는 그가 무슨 말을 하고 싶어 하는지 몰라 다시 물었다.
“뭐가 이상해요?”
“사랑이 아니었을 거라고 부정하고, 그 자식한테 속아서 그랬던 거라고 욕을 해야지. 진짜 사랑은 아니었을 거라고, 착각이었다고. 그렇게 생각해야지.”
“왜 그래야 하는데요?”
“첫사랑은 보통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잖아. 그런데 너는…….”
이제야 그가 하고 싶은 말이 뭔지 깨달은 율리아가 들고 있던 책을 하나씩 책꽂이에 꽂으며 말했다.
“저는 그렇게 생각 안 해요. 첫사랑이라는 건 보통 철없는 시절에 꾸는 악몽 같은 거예요. 유니콘이나 날개 달린 악마처럼 불가해한 존재가 아니라 수치스러워 숨기고 싶은 실수 같은 거죠. 운 좋은 누군가에게는 그냥 스치고 지나가는 간이주점일지도 모르고.”
레위시아가 저도 모르게 입을 떡 벌렸다.
“네가 냉소적인 사람이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로 사랑에 대해 부정적인 줄은 몰랐는데……. 아니구나. 바실리 그 자식 때문이니까 당연한 건가.”
“그런데 정말 그런 건 왜 물어보시는 거예요? 전하, 설마 좋아하는 사람이라도 있으세요?”
율리아가 책 정리를 끝내고 레위시아에게 다가와 물었다. 그는 자신을 똑바로 응시하는 그녀의 눈동자를 슬그머니 피하더니 시선을 어중간하게 미끄러뜨렸다.
“아니, 그냥…… 궁금해서.”
왜 제왕학을 공부하던 사람이 갑자기 첫사랑에 대해 궁금해하는 걸까. 율리아는 의아해하면서도 성실한 스승답게 그의 질문에 답하기 위해 노력했다.
“저는 그렇게 생각해요. 인간은 늘 과거에 얽매여 살아가는 존재이기 때문에, 첫사랑이라는 찰나의 순간을 어떻게든 멋지고 아름답게 기억하고 싶어서 포장에 포장을 더하는 거라고요.”
“어…… 그렇구나.”
레위시아가 그러냐며, 잘 알았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전하, 오늘도 늦게까지 공부하느라 고생하셨어요.”
“너도 수고했어.”
수업을 마치고 자리에서 일어난 레위시아는 뻐근한 어깨를 주무르며 기지개를 켰다. 그러면서도 그의 머릿속은 온통 율리아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다.
첫사랑. 부르기만 해도 간질간질한 단어였다. 적어도 레위시아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 역시 현실적이고 비관적인 사고방식을 가진 축에 속했지만, 생애 한 번뿐인 첫사랑까지 이성적으로 바라볼 수는 없으리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율리아의 경우를 생각하면 제 생각이 옳다고는 도저히 말할 수 없었다.
그녀는 바실리라는 희대의 이기주의자를 만나, 남들은 추억으로 간직하는 첫사랑 간이주점에서 연인 한정 살인마가 되어 서로의 심장에 칼을 찔러 넣었으니까.
그래서 그리움은 복수심으로, 설렘은 증오로, 슬픔은 광기로 변하고 말았다.
“이만 들어가 보겠습니다.”
율리아가 예의 바르게 인사하고 먼저 방을 나섰다. 레위시아는 그녀에게 푹 쉬라는 말로 하루를 마무리했다.
코코가 기다렸다는 듯 그를 불러세웠다.
“전하.”
왜 여느 때처럼 수업이 끝나자마자 쌩하니 자신의 방으로 돌아가지 않나 했더니, 레위시아에게 할 말이 남은 모양이었다.
“왜, 왜?”
그녀가 무슨 잔소리를 쏟아낼지 뻔히 아는 레위시아는 빨리 이 자리를 피하고 싶었다.
엉거주춤한 자세로 문을 향해 움직이는 그를 향해 코코가 싸늘한 일침을 날렸다.
“다른 건 몰라도 사랑은 평범하게 하세요.”
“어?”
“왕의 아들로 태어나 왕족으로 살았으니, 하나부터 열까지 필부와는 다른 삶을 사셔야겠죠. 그런데 전하, 사랑은 평범하게 하세요. 진심으로 하는 충고예요.”
“내가 뭘?”
“전하가 사랑을 주었을 때, 조금이라도 그걸 담을 수 있을 만큼 마음에 여유가 있는 애를 선택하란 말이에요.”
마음에 구멍이 휑하게 뚫려서 물거품처럼 사라질 애가 아니라.
이어지는 코코의 중얼거림까지 들은 레위시아가 애써 부정했다.
“코코, 아니야.”
“이런 얘기 싫어하시는 건 알지만 국왕 전하와 어머님을 생각하세요. 그분들이 왜 그런 비극적인 선택을 하고도 서로를 놓지 못했는지 전하는 알잖아요.”
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레위시아는 알고 있다. 어린 시절 그의 세상은 온통 어머니뿐이었으니까.
“국왕은 사랑도 하면 안 되는 사람이라고, 그렇게 말하고 싶은 거야?”
“아뇨. 마음에 여유가 없는 사람들끼리 서로 사랑해 봤자 남는 게 없다는 말이었어요.”
세상에는 늘 마음이 텅 비어 있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 사람들은 누군가를 사랑하거나, 혹은 누군가에게 사랑받아도 언제나 고독에 몸부림치게 되어 있다. 그래서 상대에게 집착하고 괴롭히다가 모두를 불행하게 만들어 버린다.
밖으로 나가려던 레위시아가 도로 자리에 앉았다. 그는 코코의 시선을 피해 율리아가 앉아 있던 의자를 응시하며 물었다.
“율리아는 텅 빈 사람이니까 마음 주지 말라는 얘기야? 영리하고 쓸 만한 시녀니까 왕위 다툼에는 이용하되, 정은 주지 말라는 건가?”
코코가 단호하게 부정했다.
“아뇨.”
“그럼?”
“전하도 그 애처럼 텅 빈 사람이니까 조심하라는 말이었어요. 호기심이 관심으로, 관심이 사랑으로, 사랑이 집착으로 변하기 전에 멈추라고요.”
레위시아의 동공이 크게 확장되었다. 그는 코코의 입으로 그런 말을 들을 줄은 몰랐다는 듯, 조금 멍한 얼굴을 하고 물었다.
“내가 그런 사람이라고?”
“전하의 어머님이 가지고 계신 사랑에 대한 비정상적인 갈망, 국왕께서 가지고 계신 애정에 대한 비틀린 집착, 전하는 그 두 가지를 다 가지고 있어요.”
“날 나쁜 새끼로 만드네.”
“그렇게 되기 전에 정신 차리라고 말씀드리는 거예요. 기분 나쁘셨다면 저한테도 똑같이 욕하세요. 미쳤다거나, 거지 같다거나, 개 같다거나. 뭐라고 하셔도 괜찮아요.”
“내가 어떻게 그래.”
레위시아가 허탈하게 웃으며 중얼거렸다.
“코코, 아니야. 뭘 걱정하는지 알겠는데…… 사랑 같이 거창한 그런 게 아니야. 내가 미치지 않고서야 내 궁에서 일하는 시녀를, 그것도 저렇게 힘들게 사는 애를 건드리려고 하겠어?”
“그렇다면 다행이고요.”
“신기해서 그래. 저런 애를 처음 봐서. 내가 아는 여자는 어머니랑 코델리아 힌치뿐이라서.”
슬픈 여자와 무서운 여자.
코코가 짜증스레 얼굴을 구겼다. 레위시아는 그런 그녀를 보면서 하하 웃었다.
“알잖아. 난 아직 누군가를 사랑해 본 적이 없어. 사랑이란 감정이 어떤 건지도 모른다고. 율리아가 신기하고 걱정되긴 하는데, 세상 사람들이 그런 걸 사랑이라고 부르진 않잖아.”
“변명 안 하셔도 돼요. 잔소리는 이제 그만할 생각이니까.”
“코코.”
“주무세요, 전하.”
“내 첫사랑은 분명 멍청하고 고집스럽고, 치정과 거짓이 난무하는 비극일 거야.”
“그게 무슨…….”
“그때 내가 상처받아서 애새끼처럼 질질 짜고 있으면 와서 따귀를 후려갈겨.”
“왕족 모독죄인데요.”
“사면해 줄게.”
레위시아가 어깨를 으쓱하더니 능글맞은 미소를 머금었다. 평소의 그와 조금도 다르지 않은 모습이었다.
하지만 코코의 눈에는 그의 행동이 꼭 어른스럽게 보이려 애쓰는 사춘기 소년처럼 보였다.
첫사랑이라.
코코는 율리아의 말이 틀렸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 아이처럼 사랑했던 사람에게 호되게 배신을 당하면, 그렇게 비관적으로 변하는 게 당연하다.
하지만 그 반대의 경우도 분명 있었다.
어떤 이는 첫사랑을 평생 간직하기도 한다. 고백은커녕 제대로 바라보지도 못한 채, 죽을 때까지 가슴에 묻어 두고 오래오래 그리워만 한다.
그래서 다시는 아무도 사랑하지 못하게 되기도 한다.
부디 레위시아만은 그러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코코는 돌아선 그의 뒷모습에 대고 중얼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