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화
악마가 속삭이는 것 같았다. 거칠고 낮은 남자의 목소리가 이토록 달콤하게 들릴 수도 있었다. 이 늑대는 애써 사냥할 필요가 없었다. 웃으며 기꺼이 심장을 바칠 먹잇감이 천지에 깔렸을 것이다.
“내 손을 잡아.”
이토록 황홀하게 느껴지는 고백이 또 있을까.
“네 복수와 내 임무가 다르지 않으니, 우리는 누구보다 믿을 수 있는 벗이 될 것이다.”
이 말을 원했다.
카루스 란케아의 손을 잡은 건 이번 삶이 처음이었지만 처음 그와의 동행을 계획했을 때부터 간절하게 이 말을 원했다. 그가 자신을 필요하다 여겨서 먼저 손 내밀기를 기도하고, 또 기도했다.
카루스가 다시 물었다.
“율리아 아르테, 그렇게 하겠어?”
율리아는 두 번 고민하지 않고 그가 내민 손 위에 자신의 손을 얹었다.
“기꺼이.”
율리아가 웃자, 카루스가 그녀를 따라 웃었다. 다정하거나 따스하지는 않은 미소였다. 그는 꼭 사냥감의 목덜미에 이빨을 박아 넣은 맹수 같았다.
물론 누가 맹수이고, 누가 사냥감인지는 두고 봐야 알 일이었다.
카루스가 위험해 보이는 미소를 입가에 머금고 말했다.
“너는 이제 쉽게 죽어선 안 돼. 앞으로는 내가 너를 지킬 테니, 하이에나 따위가 네 목숨을 노리는 일은 두 번 다시 일어나지 않을 거다.”
“네.”
“마조람 후작과 그와 손잡은 세력을 모두 무너뜨릴 때까지 최선을 다해 너를 돕겠다. 내가 직접 움직이면 전쟁이 일어날 테니, 당분간은 뒤에서 돕는 것밖에 할 수 없겠지만.”
충분하다. 충분하다 못해 넘쳤다. 율리아는 맹세할 수도 있었다. 마조람을 무너뜨릴 수만 있다면, 그녀는 카루스 란케아를 위해 무엇이든 할 수 있었다.
‘드디어.’
늑대를 얻었다. 그토록 원했던 늑대였다. 이 세상에서 가장 매혹적이고, 가장 강력한 아군.
카루스 란케아.
가슴에 희열이 일었다. 어떻게 이 마음을 표현해야 할까. 사랑에 빠졌을 때보다, 천금을 얻었을 때보다 더 기뻤다. 쾌락에 가까운 아찔함에 손끝이 떨렸다.
카루스가 자신을 완전히 믿지 않는다고 해도 괜찮았다. 이렇게 한 편이 되어 주기만 한다면, 율리아는 그에게 황제보다 더 많은 걸 해 줄 수 있었다.
남부의 황금, 영웅이란 칭호, 무엇이든.
고민하던 율리아가 카루스의 손을 꽉 붙잡았다. 거칠고 커다란 손이었다. 그녀는 카루스의 손을 가까이 끌어당긴 뒤에 몸을 숙였다. 그러곤 그의 손바닥에 이마를 갖다 댔다.
나는 당신을 위한다.
그런 의미의 맹세였다.
그 순간 카루스의 표정이 어땠는지, 고개를 숙이고 있던 율리아는 알 수 없었다.
* * *
이른 아침 왕궁으로 돌아가기 위해 채비를 마친 율리아가 여관 앞으로 나왔다.
맥스웰은 보이지 않았다. 그는 카루스가 내린 임무를 수행하려면 바삐 움직여야 한다며 새벽부터 여관을 나섰다. 바바슬로프도, 다른 기사들의 모습도 보이지 않았다.
율리아는 혼자서 마차를 잡기 위해 큰길로 나가는 길이었다. 그런데 여관 문이 열리더니 뒤에서 카루스가 걸어 나왔다.
그는 어제와 다른 색깔의 망토를 걸치고 있었다. 옷차림도 훨씬 가벼워졌다. 한동안 남부 함대에 정착해야 할 테니, 한결 여유로워진 모습이었다.
“같이 가지.”
“네? 괜찮아요. 혼자 갈 수 있어요.”
카루스는 율리아의 말을 들어주지 않았다. 성큼성큼 걸어 큰길로 나간 그가 손을 흔들자, 근처에 있던 마부가 큰 소리로 인사하며 이쪽으로 다가왔다.
“어서 오십쇼! 손님, 어디까지 가십니까?”
“왕궁 앞 광장까지.”
“안전하게 모시겠습니다!”
마부가 싱글벙글 웃었다. 카루스가 마차 삯이 얼마인지 묻지도 않고 금화를 던져 주었기 때문이다.
율리아는 카루스가 내민 손을 잡고 마차에 올랐다. 그가 맞은편에 앉아 팔짱을 꼈다.
마차가 출발하고, 바깥 소음으로부터 차단되어 조용해진 공간에서 침묵을 지키던 두 사람이 동시에 입을 열었다.
“저는 정말…….”
“너는 이제…….”
그리고 동시에 입을 닫았다.
율리아는 카루스가 말하길 기다렸고, 카루스도 율리아가 먼저 말하길 기다렸다.
그렇게 또 잠시간 침묵을 유지하던 두 사람은 서로를 바라보다가 그냥 입을 닫았다.
굳이 말할 필요가 없었다. 어젯밤의 대화나 앞으로의 일, 혹은 지금 기분이 어떤지. 그런 건 이제 중요하지 않았다.
마차가 규칙적으로 흔들렸다. 율리아의 시선이 창문으로 향했다. 그녀는 창밖을 스쳐 지나가는 오르테가의 풍경을 눈에 담았다.
카루스는 운명을 믿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건 율리아도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두 사람이 만난 건 운명이 아니라 우연이라 생각했고, 우연을 운명으로 만드는 건 바로 사람의 힘이라고 믿었다.
율리아는 지난 밤 카루스가 내민 손을 잡았다. 아홉 번을 사는 동안 처음이었다. 그 눈보라 치는 산속에서 만난 이래, 두 사람은 처음으로 서로를 제대로 마주한 것 같은 기분이었다.
이제 두 사람의 관계는 완전히 달라졌다. 가늠할 수 없을 만큼 멀기만 했던 거리가 부쩍 가깝게 느껴졌다. 그동안 두 사람 사이에 가득했던 건 날 선 긴장감이었는데, 이제는 그보다 낯선 어색함이 자리를 잡았다.
창문 틈으로 바람이 들어와 율리아의 긴 머리카락이 흩날렸다.
카루스의 시선이 그녀의 머리카락을 따라 움직였다. 그늘에선 물기 머금은 흙처럼 묵직해 보였다가, 햇빛을 받으면 잠자리 날개처럼 빛나는 머리카락이었다.
바람에 흩날릴 때마다 아슬아슬하게 그녀의 얼굴을 스치고 지나가는 가느다란 머리카락을 바라보고 있자니, 자꾸만 손끝이 간지러웠다.
이상한 여자. 거슬리는 여자. 그리고 이제는 그에게 꼭 필요한 여자.
“다 왔습니다!”
마부가 큰소리로 외쳤다.
꽤 먼 거리의 길이라고 생각했는데 눈 깜짝할 사이에 도착하고 말았다. 카루스는 창문을 통해 바깥을 한 번 확인하고, 율리아가 마차에서 내리려는 걸 손을 내밀어 막았다. 그러곤 자신이 먼저 마차 밖으로 나갔다.
“율리아.”
카루스가 손을 내밀었다. 율리아는 잠시간 말없이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왜 그러지?”
그가 물었다. 율리아가 마차에서 내리지 않고 가만히 있자, 눈썹을 살짝 찡그리기도 했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율리아는 카루스의 얼굴에 고정되어 있던 시선을 그의 손으로 내렸다. 그러곤 조심스레 손을 내밀어 그의 손끝에 살짝 얹었다. 그랬더니 카루스가 율리아의 손을 단단히 잡아서 자신에게로 가까이 당겼다.
“안녕히 가십쇼!”
마차에서 내린 두 사람에게 마부가 웃는 얼굴로 인사를 남기고 멀어졌다.
율리아는 마부의 인사를 받아 줄 수 없었다. 그녀의 신경은 온통 카루스에게 잡힌 자신의 손에 모여 있었다. 그냥 마차에서 내리는 걸 도와주는 줄 알았는데, 그가 손을 놓지 않았다.
자연스럽게 늘어뜨려서 빼려고 해도 소용없었다. 카루스의 긴 손가락이 율리아의 손을 틈 없이 단단하게 감싸 쥐었다.
아무래도 놔 달라고 말로 해야 할 것 같았다. 천천히 눈을 깜박이던 율리아가 그를 향해 입을 열었다.
“카루스 님, 손을…….”
“뭐?”
그가 되물었다. 못 들은 것 같은 얼굴이었다. 율리아는 다시 말하려다가 아무것도 아니라며 그냥 고개를 저었다.
“어디서 하이에나가 나타날지 모르니까 내 바로 앞에서 걸어라. 망토를 줄 테니 두르고 있어. 놈들이 네가 너라는 사실을 조금이라도 늦게 눈치챌 수 있도록.”
“알겠습니다.”
카루스는 율리아를 반걸음 앞으로 보내고 살짝 뒤에서 걸었다. 누군가 가까이 다가오기라도 하면 그녀의 손을 자신에게로 끌어당기거나 위치를 옮겨서 몸으로 막았다.
두 사람은 그렇게 걸어서 왕궁 바로 앞으로 갔다.
“고맙습니다.”
율리아가 진심을 가득 담아 그에게 인사를 건넸다.
카루스는 대답하지 않고 그녀에게서 한 걸음 물러섰다.
잡은 손을 놓는 속도가 느렸다. 손바닥이 먼저 떨어지고, 손가락이 하나씩 제 자리를 찾아갔다. 벌어진 사이로 찬바람이 흘러들어 심장이 바짝 움츠러들었다. 오소소 소름이 돋아 괜히 주먹을 꽉 말아 쥐게 되었다.
율리아는 끝까지 그에게 고맙다는 말만 남기고 왕궁을 향해 돌아섰다.
‘남자랑 손을 잡고 있네.’
레위시아는 멍하니 생각했다.
하룻밤 외박하겠다는 율리아의 연락을 받은 레위시아는 지난밤 왜인지 모르게 잠을 설쳤고, 평소보다 훨씬 이른 시간에 일어나 호위를 이끌고 왕궁 앞까지 나왔다.
그리고 웬 남자의 손을 잡고 왕궁으로 들어오는 율리아를 목격했다.
레위시아는 그 자리에 서서 움직이지 않았다. 기분이 나쁘거나 화가 나는 건 아니었다. 그냥 좀 이상했다. 가슴이 묵직해지고, 목이 따가운 느낌.
“왕자 전하.”
레위시아가 한 자리에 서서 움직이지 않자, 호위 기사가 걱정스레 그를 불렀다.
“왜 그러십니까?”
“아무것도 아니야.”
레위시아는 빙그레 웃으며 몸을 돌렸다. 그러곤 아무렇지도 않게 왔던 길로 다시 걸었다.
이럴 거면 왜 여기까지 나온 건지 호위 기사가 궁금해했지만, 이유를 알려 주지는 않았다.
율리아가 왕자궁으로 돌아온 뒤에도 마찬가지였다. 레위시아는 평소와 조금도 다르지 않은 모습으로 그녀를 반겼다. 율리아가 간밤에 어디에서 누굴 만나고 왔는지, 그런 것도 묻지 않았다.
율리아는 레위시아의 암행을 도와줄 사람을 구했다고 말했고, 그는 잘 알겠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뒤엔 오후가 다 되어서야 일어난 코코와 함께 식사하고, 밤에는 율리아에게 제왕학을 배웠다.
그렇게 하루가 지났다. 캄캄한 밤하늘에 창백한 달이 떠 있었다.
수업이 끝나고 책을 정리하는 율리아에게 레위시아가 말을 걸었다.
“율리아.”
“네?”
“넌 첫사랑이 뭐라고 생각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