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화
복도로 나와 율리아의 방으로 가는 짧은 시간 동안 카루스의 머릿속은 여러 가지 생각으로 뒤엉켜 복잡하기 그지없었다.
‘황제는 의뭉스러운 사람이다.’
바이칸의 황제는 속을 전혀 알 수 없는 군주였다. 어떤 자들은 그를 자비 없는 폭군이라 불렀고, 또 어떤 자들은 너그러운 현인이라고 불렀다.
정복 전쟁이 한창이던 당시에는 그의 시선이 닿는 곳에 피가 마를 날이 없었는데, 황비 데네브라가 남편인 황제를 외면하고 카루스 란케아에게 집착하는 건 용서하고 눈감아 주었다.
황제를 가장 가까이에서 모시는 자들조차 그의 마음을 한 치도 읽을 수 없어 늘 긴장 속에 살았다. 카루스도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율리아는 그런 황제가 어떤 결정을 내릴지 이미 알고 있었다.
아홉 번째를 살고 있다던 그녀의 말이 자꾸만 뇌리에 맴돌았다. 만약 그 말이 사실이라면, 카루스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율리아 아르테를 손에 넣어야만 했다.
‘말도 안 되는 소리지만 그게 사실이라면…….’
생각만으로도 헛웃음이 튀어나올 일인데, 이제는 마냥 무시할 수도 없게 되었다.
율리아가 잠들어 있다는 방문 앞에서 카루스는 잠시 걸음을 멈추었다. 그리고 그녀에 대해 생각했다.
율리아가 선택할 수 없었던 과거와 피할 수 없었던 비극에 대해서, 또 두 사람의 첫 만남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끊어 낼 수 있는 기회가 여러 번 있었음에도 그녀를 끝내 내치지 못했던 자신에 대해서도.
* * *
깊은 밤이었다. 율리아는 오랜만에 악몽을 꿨다.
죽음에 대한 공포를 이겨 내는 것보다 그 공포를 이용해 분노를 키우는 방법을 선택해 살아온 그녀는, 악몽에 시달릴 때마다 과거의 자신을 지독하게 원망하곤 했다.
‘이번엔 얼마나 더 살게 될까.’
잠에서 깨어난 율리아가 눈꼬리에 매달린 눈물을 손가락으로 훔쳤다. 물기 묻은 손끝을 말없이 바라보던 그녀의 얼굴에 습관 같은 웃음기가 머물렀다.
눈물이라니 웃기지도 않는다.
무슨 꿈을 꿨을까. 죽는 꿈이었나. 어떻게 죽는 꿈이었을까. 목 졸려 죽은 적도 있었고, 맞아 죽은 적도, 사형을 당한 적도 있었다. 그러고 보니 꿈을 꾸고도 비명을 지르지 않게 된 건 언제부터였을까.
네 번째였나. 다섯 번째였나.
한때는 소중한 사람이 죽는 걸 보느니 내가 먼저 죽는 게 낫겠다고 생각하던 때도 있었다. 이후엔 소중한 사람이 모두 죽더라도 끝까지 살아남아 복수를 이어 가겠다고 결심하기도 했다.
이제는 그 모든 게 자신의 의지로만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걸 안다. 사람은 쉽게 변하지 않는데, 세상은 너무 쉽게 변하기 때문이다. 거대한 흐름은 사람의 힘으로 바꿀 수 없다.
“악몽이라도 꿨나?”
카루스가 물었다.
인기척이 느껴진다 했더니 어두운 방 한쪽에서 그가 감정 없는 눈으로 율리아를 관찰하고 있었다.
“왜 여기에 계세요?”
율리아의 입에서 갈라진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녀는 유령처럼 서 있는 카루스를 보고도 놀라지 않고 몸을 일으켜 침대에 기대앉았다.
“악몽을 꾸는 것 같아서.”
카루스도 벽에 기대어 선 채였다. 율리아는 그가 자신에게서 거리를 유지하려고 하는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악몽이라. 뭐라고 대답해야 할까. 고민하던 율리아가 설핏 웃었다.
“카루스 님은 악몽이 뭐라고 생각하세요?”
“나쁜 꿈이지.”
“제게 그런 건 없어요.”
가볍고 단호한 말투였다. 그러나 그 대답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카루스가 얼굴을 굳혔다.
그는 율리아의 말이 어떤 의미인지 이해하고 있었다.
그녀에게는 현실이 꿈보다 훨씬 끔찍하니까 그 어떤 악몽도 현실보다 더하지는 않다는 말.
“거슬려.”
카루스가 차갑게 말했다. 혼잣말, 혹은 중얼거림에 가까운 말이었다.
그냥 못 들은 척해도 되었을 텐데, 율리아는 그의 관심을 집요하게 붙들고 놓아주지 않았다.
“여자가 우는 걸 싫어하시나 봐요. 신경 쓰지 마세요. 이건 눈물이 아니라, 그냥 조건 반사 같은 거예요.”
“뭐?”
“하품하면 나오는 눈물 같은 거요. 그러니까 안쓰럽게 여기거나 걱정할 필요 없다는 말이었어요.”
“넌 도대체…….”
또 시작이었다. 율리아는 세상 누구보다 자신의 아픔을 우습게 여기는 여자였다. 카루스가 보기에 그녀는 자기 자신을 도구처럼 여기면서 학대하는 경향이 있었다.
“남의 심장에 박힌 칼보다 내 손톱의 거스러미가 더 아픈 게 인간이다. 그런데 너는 그 반대로 굴어. 신경이 쓰이지 않는 게 이상하잖아.”
“저를 왜 걱정하세요?”
율리아가 물었다. 바늘 같은 질문이었다.
“카루스 님이 저를 왜 걱정해요.”
율리아가 다시 말했다. 달래듯 부드러운 목소리였다. 누굴 달래는 건지는 알 수 없었다. 카루스일 수도, 율리아 자신일 수도 있었다. 아직 타인에 불과한 두 사람의 관계를 지적하는 말이기도 했다.
카루스의 얼굴엔 여전히 표정 변화가 없었지만, 그녀가 그어 놓은 선 앞에 선 그의 심장은 얼음물을 뒤집어쓴 듯 싸늘하게 가라앉았다.
“당신은 믿지 않는다고 말했지만…… 아홉 번을 사는 동안 제가 깨달은 것들이 있어요. 그중 하나가 뭔지 아세요?”
“모르겠어.”
“누군가를 죽이려 마음먹었을 때는 자신의 목숨도 걸어야 한다는 거예요. 저는 이 일에 제 모든 걸 걸었어요. 그중엔 당연히 목숨도 포함되어 있고요.”
“또 그 눈빛이로군.”
끝이 없는 숲. 폭풍을 부르는 바다.
율리아의 눈동자는 그런 것들과 비슷한 깊이를 가지고 있었다. 사람을 빨아들여 놓고 흔적조차 남기지 않고 먹어치우는 포악한 자연. 어둠 속에서 마주하니 그 야생성이 더욱 적나라하게 느껴졌다.
역시 눈빛이 좋은 여자였다. 카루스가 헛웃음을 흘렸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그랬다. 제국에서는 매일 마주치던 여자들의 눈동자가 무슨 색인지도 잘 기억나지 않았는데, 유독 율리아의 짙은 녹색 눈동자는 처음 만났을 때부터 선명하게 뇌리에 박혔다.
저 눈빛 때문이었다. 무저갱이 바닷속에 있다면 꼭 저런 모습일 것 같은, 독성 가득한 암녹색.
저런 여자를 어찌 죽이나. 아까워서 그런 짓은 절대 못 한다.
“좋아. 솔직하게 말하겠다.”
카루스가 율리아의 침대를 향해 성큼성큼 다가와 그녀에게 얼굴을 가까이했다.
그의 새카만 눈동자가 바로 눈앞에 있었다. 율리아는 그걸 피하지 않고 똑바로 마주 바라봤다.
“황제 폐하에겐 신기한 새들이 있어. 먼 거리에 있는 자에게도 신속하게 명령을 전달해 주지.”
황제는 카루스에게 그 새를 보냈다.
“폐하께선 나를 제국군 남부 함대의 신임 제독으로 삼으셨다.”
완벽하게 감정을 배제한 목소리였다. 율리아는 그저 가만히 앉아 듣고만 있었다.
“율리아. 너는 맥스웰에게 이렇게 말했어. 황제 폐하에겐 내가 보낸 부족한 증거만으로도 충분할 거라고. 결과를 받아 보면 알게 될 거라고 했지. 마치 그분이 어떤 명령을 내릴지 미리 알고 있었던 것처럼.”
율리아는 여전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내가 제국으로 돌아가지 못하게 될 거라는 걸, 너는 이미 알고 있었던 거야.”
당연하다. 그는 지금까지 율리아가 살았던 모든 삶에서 늘 황제의 명령으로 남부 함대의 새로운 제독이 되었다.
“너는 예언자인가? 아니면, 아홉 번을 살고 있다던 네 말을 믿어야 하나? 내가 그걸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지?”
“카루스 님.”
“저주 같은 건 믿지 않는다. 나는 불확실한 걸 싫어해.”
“이해해요.”
“그런데 이젠 믿지 않을 수도 없게 되었어. 너의 그 빌어먹을 예언은 단 한 번도 틀리지를 않았으니까.”
그도 알고 있었다. 이게 정말 말도 안 되는 일이라는 걸. 하지만 그 눈보라 속에서 마주친 이래, 율리아의 말은 신탁보다 더 확실하게 이루어졌다.
“특히 그날.”
카루스가 중얼거렸다.
“오르테가로 오는 길, 하룻밤을 보냈던 벌판에서 너는 내게 말했어.”
율리아도 기억하고 있었다.
“‘당신은 마조람의 목을 쳐야 할 거예요.’”
그때 그녀는 소녀의 얼굴에 포악한 짐승의 미소를 짓고 있었다. 카루스가 으르렁거리듯 거친 소리로 물었다.
“말해 봐. 그때부터 모든 걸 예상했었나? 황제 폐하께선 내게 마조람 후작과 그의 죄업을 조사하라고도 명령하셨다. 건방진 오르테가의 귀족이 감히 명예로운 제국군을 능멸했다면서.”
예상했다. 하지만 율리아는 여전히 입을 다문 채였다. 대답할 필요가 없기도 했지만, 카루스가 그녀의 대답을 원하는 것 같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율리아.”
“네.”
“포기할 생각 없어?”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바실리 같은 애송이는 잊고 자유로이 사는 것 말이다. 하이에나 따위는 내가 얼마든지 막아 주마. 오르테가를 떠나서 바이칸 제국에 있는 내 영지로 가도 된다. 원하는 건 뭐든지 들어주고, 원하는 만큼의 지원을 해 주겠다. 부유하고, 여유롭게 살아라.”
“카루스 님, 왜 그러세요.”
카루스의 숨결이 가까웠다. 그는 뜨겁게 분노한 사람처럼 말하고 있었지만, 그녀를 바라보는 눈동자만은 서릿발처럼 차가웠다.
율리아는 그 온도 차가 좋았다. 그 틈이야말로 이 남자가 쌓아 온 경험과 능력이라고 생각했다. 뜨거운 머리에 차가운 눈, 혹은 차가운 얼굴에 뜨거운 심장. 악마 같은 감정 조절도 그래서 가능한 거였다.
늑대.
카루스 란케아는 늑대였다.
“그래도 복수를 포기하지 않겠다면…….”
그가 말했다. 달빛이 그의 얼굴에 비쳐 붉은 입술이 드러났다. 율리아는 그의 입술에 홀려 그가 내뱉는 말에 빠져들었다.
“내 손을 잡아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