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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화 (40/319)

38화

가만 보면 그와는 꽤 자주 식사하게 되는 것 같았다. 카루스는 가리는 음식 없이 아무거나 잘 먹는 편이었지만 속도가 너무 빨라서 언제나 율리아보다 먼저 식사를 마치고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곤 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그와 마주 앉아 말없이 식사를 이어가던 율리아는 얼굴에서 느껴지는 까칠한 시선에 눈을 들었다.

카루스가 그녀를 보고 있었다.

눈은 이쪽에 고정되어 있는데 생각은 전혀 다른 곳에 있는 것 같았다. 딴생각을 어찌나 깊이 하는지, 카루스는 율리아가 그를 힐끔거리고 있다는 사실조차 깨닫지 못했다.

“카루스 님.”

아무래도 그가 자신에게 할 말이 있는 모양이라고, 율리아는 생각했다. 그녀는 가볍게 바바슬로프의 안부를 묻기로 했다.

“바바슬로프는 어디에 있기에 보이지 않나요?”

카루스가 싫어하는 주제로 이야기를 시작할 수도 있었다. 실제로 율리아는 상대의 평정심을 깨뜨려야 할 때 그런 식의 화법을 잘 쓰는 편이었다. 하지만 그녀가 제 목숨을 가벼이 여긴다는 이유로 화를 내는 남자 앞에서 그렇게까지 못되게 굴고 싶진 않았다.

딴생각에서 빠져나온 카루스가 무뚝뚝하게 대답했다.

“남부 함대 사령관을 사로잡는 과정에서 기함이 일부 파손되었다. 그걸 수리하려면 좋은 기술자가 필요해서 항구에서 사람을 수소문하고 있지.”

“오르테가 동쪽 옛 부두에 노련한 기술자가 많아요. 은퇴한 기술자들이 가끔 해적들의 배를 고쳐 주기 위해 바다 위로 출장을 떠나기도 하는데, 그들을 잘 이용하면 유용한 정보를 얻을 수도 있을 거예요.”

“해적선 따위가 왜 그렇게 튼튼한가 했더니, 군함 기술자들이 손을 대서 그런가.”

“오르테가 해안엔 해적과 제국군을 딱히 구분하지 않는 사람이 많거든요.”

바이칸 제국인인 카루스에게는 기분이 나쁠 수도 있는 말이었다. 오르테가의 고집 센 장인들이 제국군을 해적과 다를 바 없는 무법자, 혹은 강도로 여기고 있다는 뜻이었으니까.

하지만 카루스는 화내지 않았다. 바이칸의 황제에게 충성하는 기사로서 수많은 정복 전쟁에 앞장서 온 그였지만, 패전국의 백성들을 누구보다 가까운 곳에서 바라봐 왔기 때문이었다.

“율리아.”

“말씀하세요.”

“아까 말했듯이, 네게 진 목숨 빚은 이렇게 갚겠다. 우리가 오르테가에 머무르는 동안 너를 노리는 하이에나들을 모두 처리하는 것으로.”

무슨 생각을 하나 했더니 계속 하이에나에 대해서 고민하고 있었나. 뒤늦게 식사를 마친 율리아가 그에게 말했다.

“카루스 님이 제게 갚아야 할 빚 같은 건 없어요. 오히려 그동안 이것저것 도와주셨으니 빚은 제가 갚아야 할 거예요.”

“하이에나는?”

“못 미더우시겠지만, 제가 알아서 대처할 수 있어요.”

“못 미덥다는 건 잘 알고 있나 보군.”

카루스가 피식 웃으며 핀잔을 주었다. 율리아는 그가 더 뭐라고 하기 전에 재빨리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

“오늘은 피곤해서 일찍 잘 생각이었는데 너무 많이 먹었나 봐요. 여관에 소화에 도움이 되는 차가 있으려나 모르겠네요.”

율리아가 또 대놓고 말을 돌리자, 카루스는 하, 하고 기막혀하더니 손짓으로 그녀를 내쫓았다.

* * *

“전령인가 본데요.”

맥스웰이 눈으로 창문을 가리켰다. 창백한 달빛을 몸에 두른 검은 새가 창틀에 앉아 카루스를 응시하고 있었다.

“폐하의 새인가.”

카루스가 중얼거렸다.

새는 그의 말을 알아듣기라도 한 것처럼 우아하게 움직였다. 가느다란 목을 한차례 부르르 떨더니 부리를 위로 까딱이며 어서 이리 오라고 신호를 보냈다. 새의 몸짓을 알아본 카루스가 그리로 다가가자, 푸드덕 날아올라 그의 어깨에 앉았다.

생각보다 큰 새였다. 매와 독수리의 중간 정도 되는. 그런데 생김새가 특이해 종을 알 수가 없었다. 검은 깃털에 검푸른 부리, 눈동자는 노란색이었다.

“뭐라고 쓰여 있습니까?”

맥스웰이 궁금함을 못 참고 보채듯 물었다. 카루스는 새의 발목에 묶여 있는 작은 통에서 편지 한 장을 꺼내 읽었다.

아주 짧은 명령서였다.

그걸 읽은 카루스의 얼굴에서 서서히 표정이 사라졌다. 평소에도 무표정한 편인 그였으나, 이번엔 아예 숨도 쉬지 않는 것 같은 고요였다.

그의 어깨에 앉아 있던 새가 끼르르 소리를 내었다. 그러곤 그가 명령서를 다 읽었다는 것을 확인한 뒤, 다시 날아올랐다.

카루스는 새가 창밖으로 날아가 사라진 것을 확인하고 입을 열었다.

“맥스웰.”

땅 밑 저 깊은 곳까지 파고 들어갈 것 같은 목소리였다. 맥스웰의 팔뚝에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

“왜요, 왜 그렇게 부르십니까.”

“폐하께서 나를 남부 함대의 신임 제독으로 임명하셨다.”

“신임 뭐요? 남부 함대? 미친…… 아이고, 죄송합니다.”

맥스웰이 손바닥으로 제 입을 철썩 때렸다. 그러더니 갑자기 자리에서 펄쩍 뛰면서 더 큰 소리로 말했다.

“미친, 미친! 아이고! 아니, 그런데 뭐라고요? 남부 제독이요? 폐하가 미치지 않고서야…… 죄송합니다.”

이건 호들갑 떠는 정도로 끝날 일이 아니었다. 맥스웰은 벌렁거리는 가슴을 지그시 누르며 슬그머니 카루스의 눈치를 살폈다. 지금 미친놈처럼 화를 내야 하는 건 카루스지, 그가 아니었다.

그런데 카루스는 화를 내지 않았다. 속을 알 수 없는 얼굴로 깊은 생각에 빠져 있을 따름이었다.

“저기, 괜찮으십니까?”

맥스웰이 조심스레 물었다. 이럴 때 바바슬로프가 함께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넉살 좋은 그 녀석이라면 카루스의 비위를 맞춰 줄 수도 있었을 것이다.

카루스는 여전히 말이 없었다. 화가 난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한 얼굴이었다.

맥스웰은 그의 상관이 이렇게 숨 고르는 맹수처럼 가만히 있을 때 얼마나 무시무시한 사람인지를 떠올렸다.

그래서 아무 말이나 일단 지껄여 보기로 했다.

“제가 이렇게 말해도 되는지는 모르겠는데요. 폐하도 진짜 너무하시는 거 아닙니까? 카루스 님이 그동안 세운 무훈을 생각하면 이러면 안 되는 거죠. 단순 공적으로만 계산해도 최소 공작입니다. 그런데 남부 함대라뇨. 여긴 그냥…… 유배지잖아요.”

맥스웰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오르테가 해상에 주둔하고 있는 해군 함대는 제국 바이칸의 입장에선 유배지나 다를 바 없었고, 남부 제독이란 지위도 이름만 거창한 한직에 불과했다.

실제로 카루스 란케아가 바이칸 제국에서 지휘하던 리바이어던 함대는 이곳 오르테가 남부 함대보다 세 배 이상 큰 규모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니까 그에게 여기서 신임 제독 노릇이나 하고 있으란 건, 한동안 중앙에 발을 들이지 말라는 말과 같았다.

“항의하십시오. 폐하의 뜻이야 저 같은 놈이 알 수 없겠지만, 이건 진짜 아닌 것 같습니다. 저희가 그동안 바친 충성의 대가가 고작 이런 거라면…….”

긴 시간 오르테가에서 정보상으로 일하던 맥스웰도 이런 기분일진대, 바바슬로프나 리바이어던 기사단처럼 카루스의 최측근임을 자랑스레 여기는 부하들이 알게 된다면 어떻게 될까.

“저희는 바이칸 제국이나 황제 폐하가 아니라 카루스 님께 충성합니다. 알고 계시지요?”

그들의 충성심에 상처가 날 것이다. 카루스의 기분도 중요하지만, 부하들의 명예도 중요하다. 맥스웰은 그들이 황제에게 반감을 갖게 될까 봐 그게 걱정스러웠다.

“카루스 님.”

“맥스웰, 율리아 아르테에 대해 지금까지 조사한 내용을 읊어 봐.”

“예?”

여기서 갑자기 율리아 아르테가 왜 나옵니까. 맥스웰이 물었다. 그런데 카루스는 그에게 다른 얘긴 됐고, 율리아에 대해 알려 달라고 재촉했다.

“전에 조사해 보라고 했잖아. 그새 까먹었나?”

“아, 알았어요. 알았다고요! 그러니까…… 지금까지 알아본 바에 의하면 율리아 시녀님은 오르테가 외곽 동쪽 부둣가에 있는 보육원 출신이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그런데 그 보육원에 처음 맡겨진 게 아홉 살쯤이래요.”

“그 이전에 어디서 뭘 하고 살았는지는 아무도 모르고?”

“예, 모른답니다. 보육원 동기들은 원장이 죄다 배에 팔아 버려서 생사를 확인하기 어려웠습니다. 간신히 알아낸 두 명도 이미 죽은 거로 확인이 됐고요.”

“계속 말해 봐.”

“어릴 때부터 기이하게 영리해서 용돈을 직접 벌어서 썼답니다. 원장이 돈 벌어 오라고 일부러 밖에 내보낼 정도였대요. 그러다 치안대에도 몇 번 붙잡혔고, 또 그러다 귀족들의 눈에 띄어서 공부도 하게 되었고.”

“치안대?”

“도둑질을 좀 했다는데, 뭘 훔쳤는지는 기록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피해자도 없고요.”

“브레웨 아카데미에선 친하게 지내던 사람이 없었나? 특별히 영향을 받은 스승이라던가.”

“아카데미에 들어가기 전까지는 크리스틴 마조람과 친구처럼 지냈다는 얘기가 있습니다. 또 바실리 마조람이 번화가에 자주 데리고 다니면서 옷도 사 주고, 뭐 이것저것 사 줬대요. 아카데미에서는 그 일 때문에 기생충 평민이라고 불렸답니다.”

“뭐?”

“따돌림을 좀 당했던 모양인데, 워낙 지독하게 공부만 해서 괴롭히는 재미가 없었대요. 그래서 그냥 기생충이라고 부르면서 무시했다고.”

어처구니없는 이야기였다. 아무리 철이 없어도 그렇지, 열등감을 그런 식으로 표현하다니. 듣다 보니 괜히 속이 쓰렸다. 하지만 카루스가 궁금해하는 건 그런 게 아니었다.

“바이칸 제국에 방문한 적은?”

“예? 없습니다. 오르테가를 벗어난 적이 한 번도 없을걸요.”

“가까이 지내던 바이칸 사람이 있다거나, 혹은 마조람 후작에게 후원을 받던 당시에 권력자들과 일을 했다거나.”

“없습니다. 뭐…… 후작이 자질구레하게 이것저것 시킨 것 같긴 한데, 진짜 중요한 정보 같은 걸 평민 고아에게 맡겼을 리가 없죠.”

“그럼 그 여자는 나에 대해서 어떻게 그렇게 잘 알고 있는 거지?”

카루스가 손에 들고 있던 황제의 명령서를 책상 위에 집어 던지며 말했다. 답답해서 한 행동이었지만, 화들짝 놀란 맥스웰이 괜스레 기겁하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왜 그러십니까. 나쁜 건 황제 폐하인데, 왜 애꿎은 율리아 시녀님을.”

“율리아는 폐하께서 내게 이런 명령을 내릴 거라는 걸 알고 있었어.”

“예?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그래서 네놈에게도 그렇게 말한 거다. 증거는 없어도 된다고. 두고 보면 알게 될 거라고.”

“아니…… 그럴 리가 없잖아요. 무슨 예언자도 아니고.”

“거슬려.”

카루스가 한 손으로 머리카락을 쓸어 올렸다. 얼굴을 반쯤 덮을 만큼 자란 검은 머리가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와 흘러내렸다.

죽여야 하나. 차갑게 굳은 눈동자에 찰나의 살기가 머물렀다.

카루스는 불확실한 걸 좋아하지 않았다. 불확실하고 위험한 것은 더욱 좋아하지 않았다.

율리아는 불확실하고 위험한 여자였다. 그녀가 그들의 목숨을 구해 준 은인이 아니었다면 이미 죽이거나 잡아 가두라고 명령했을 것이다.

“맥스웰.”

“말씀하십쇼.”

“더 조사해 봐. 할 수 있다면 어린 시절을 캐서라도.”

“시도는 해 보겠습니다. 그래도 너무 기대하진 마십쇼. 워낙 오래전이고, 보육원 출신이라 알려진 게 많지 않아요.”

답답함에 셔츠 소매를 팔꿈치까지 걷어 올린 카루스가 맥스웰에게 물었다.

“율리아의 방이 어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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