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화
촛불이 꺼지듯 훅하고 세상이 꺼졌다. 그녀는 소리와 빛, 차가운 바람으로부터 완전히 차단되었다. 어지간한 일에는 당황하지 않던 율리아가 순간적으로 숨을 멈추었다.
누군가 나타나서 남자가 휘두른 칼을 쳐냈고, 그 뒤엔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
머뭇거리던 율리아는 자신의 시야를 가리고 있는 게 새카만 망토라는 걸 알았다.
“카루스?”
왜 그 이름이 튀어나왔는지는 몰랐다. 얼굴은 보지도 못했는데.
망토 안에서 흘러나온 율리아의 목소리를 들었는지, 카루스가 낮게 물었다.
“죽여 줄까.”
거칠게 가라앉은 그의 목소리 너머로 하이에나가 빠르게 달아나는 소리가 들렸다.
자신을 구해 준 남자가 카루스라는 사실을 확인한 율리아는 숨을 짧게 멈췄다가 길게 내쉬며 그에게 말했다.
“아뇨. 놔주세요.”
저 하이에나를 붙잡아 봤자 아무 이득이 없다. 차라리 이대로 놓아주는 편이 그에겐 훨씬 지옥일 것이다. 얼굴이 노출된 채 암살에 실패했으니, 보상도 못 받은 채 제거당할 가능성이 컸다.
“전 괜찮아요.”
율리아가 망토를 끌어 내리며 차분히 말하자, 카루스가 말없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아직 근처에 남아 있을지도 몰라.”
“당신이 제 옆에 있는데, 바보가 아니고서야 다시 오겠어요?”
그렇게 말하는 율리아의 목소리엔 약간의 웃음기마저 묻어나 있었다. 그녀를 죽이러 온 살인자는 하이에나 중에서도 제법 실력이 있는 자이겠지만, 카루스 란케아 앞에서는 그저 하룻강아지에 불과할 테니.
“뭐 하는 거지?”
“네?”
“웃어?”
그런데 카루스가 화를 냈다.
“지금 죽을 뻔했는데…… 웃음이 나온다고? 제정신인가?”
그에게서 날 선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율리아는 그저 가만히 서서 눈을 깜박였다.
“이런 일을 겪은 뒤에는 두려워 어쩔 줄을 몰라야 정상 아닌가?”
카루스는 율리아가 아슬아슬하게 두르고 있는 망토를 거칠게 끌어올려 다시 그녀의 머리에 씌웠다. 그러곤 망토 아래 드러난 그녀의 두 눈을 차갑게 노려보며 물었다.
“죽고 싶나?”
“카루스 님.”
“아니면, 죽어도 상관없는 거냐?”
율리아는 대답하지 않았다. 카루스는 그녀가 제 목숨을 도구처럼 가벼이 여기고 있음을 알았다.
처음부터 그랬다. 눈보라 속에서 만났을 때부터 율리아는 늘 이렇게 무모하게 굴었다.
얼어 죽을 뻔했던 사람이 자기 몸을 돌보긴커녕 카루스와 부하들의 고된 여정에 덥석 동참했다. 심지어 하이에나들이 있는 곳으로 돌아가는데도 두려움이 없었다. 왕궁에 들어갈 때도, 왕족을 만났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율리아는 겁이 없었다.
“율리아, 대답해.”
“말씀드렸잖아요.”
“어차피 다시 시작할 테니, 죽는 건 아무렇지 않다고?”
율리아는 대답하지 않았다.
적당히 웃으며 거짓을 말하는 건 어렵지 않은 일이었으나, 어쩐지 카루스에겐 통하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또, 그에게 거짓말하고 싶지도 않았다.
“널 보면 화가 나.”
카루스가 중얼거렸다.
율리아는 그의 감정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래서 그를 달래려 하지도 않았다. 왜 당신이 화를 내나. 그런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내 말을 믿고 안 믿고는 당신의 자유이고, 그런 삶을 살아온 내가 제정신일 리 없다고, 그녀는 침묵으로 말했다.
카루스도 대답을 바란 건 아니었는지 금세 그녀에게서 시선을 돌려 하이에나가 달아난 방향을 바라보았다.
두 사람 사이에 한기 어린 침묵이 흐르고, 카루스가 먼저 입을 열었다.
“하이에나들은 멈추지 않겠지. 의뢰가 들어온 이상, 네가 살아 있다는 사실이 그들에게는 치욕일 거다.”
“여긴 왕궁 밖이라서 접근하기 쉬웠을 거예요. 왕궁으로 돌아가면 괜찮아질 거고요. 새로 들어온 하녀를 의심했어야 했는데, 미처 확인하지 못했어요. 제 실책입니다.”
“평생 이렇게 살 작정인가?”
카루스가 다시 율리아를 바라보았다. 어느새 그의 눈엔 분노가 남아 있지 않았다. 악마 같은 감정 조절이었다. 그는 처음 만났을 때와 같이 건조하고 황량한 시선으로 그녀를 응시했다.
가슴 한쪽으로 사막의 바람이 새어 들어오는 것 같았다. 율리아는 그런 자신을 비웃으며 말했다.
“제게 붙은 하이에나를 없애는 방법은 간단해요. 의뢰인이 의뢰를 취소하는 거죠.”
하이에나들은 의뢰인이 죽더라도 의뢰를 완수하려고 할 것이다. 그러니까 마조람 후작이 직접 의뢰를 취소하지 않는 한, 그들은 율리아를 포기하지 않을 거라는 말이었다.
“혹은 하이에나를 전부 죽이거나.”
카루스가 가만히 말했다.
율리아는 그 두 가지 모두 자신에게 당장은 불가능한 일이라고 여겼다. 하지만 카루스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언제 왕궁으로 돌아갈 생각이지?”
“맥스웰에게 부탁이 하나 있어요. 오래 걸리지 않는 일이라서, 저녁때까진 들어갈 계획이었는데…….”
“따라와라.”
카루스가 앞장서서 걸었다.
율리아는 그의 넓은 등을 바라보며 걷게 되었다. 그는 맥스웰의 전당포를 향해 가고 있었다.
망토가 무거웠다. 크고 긴 데다 두껍기까지 했다. 그래도 그녀는 카루스가 덮어 놓은 망토를 두 손으로 여미고 묵묵히 걸었다.
“어라? 두 분, 같이 오셨습니까?”
“앞에서 만났다.”
어떻게 그렇게 절묘한 순간에 마주쳤나 했더니, 카루스도 맥스웰을 만나러 오는 길이었다고 했다.
맥스웰은 카루스를 보곤 바짝 긴장한 얼굴로 경례했고, 율리아에게는 반가워하는 얼굴로 손을 흔들었다.
“한데 무슨 일이십니까?”
“율리아에게 습격이 있었다. 암살자가 또 붙었더군.”
“하이에나 말입니까?”
율리아가 대로변에서 죽을 뻔했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은 맥스웰의 얼굴이 심각해졌다. 그는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며 카루스의 눈치를 보더니, 율리아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냥 실력 있는 호위를 하나 데리고 다니면 되는 일 아닙니까?”
“맥스웰, 평민 시녀가 왕궁에 개인 호위까지 들일 수는 없어요.”
“외출할 때만이라도.”
“저는 괜찮아요.”
율리아는 습관적으로 괜찮다는 말을 입에 담았다. 그러곤 그 말을 내뱉자마자 코코를 떠올렸다.
만약 이 자리에 코코가 있었다면 그 뾰족한 어투로 잔소리를 쏟아냈을 것이다. 어쩌면 또 입을 꿰매 버리겠다며 협박했을지도 모른다. 코코를 떠올리자 절로 웃음이 났다.
반면 카루스는 미소 짓는 율리아를 보면서 이번에도 가슴에 못이 박힌 듯 불편한 기분을 느꼈다.
화가 나고, 답답했다.
그건 정말 그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감정이었다. 전쟁터에서 수십 번 칼을 맞댄 상대가 원한을 쏟아내며 죽었을 때도 이런 기분은 느끼지 못했다.
바이칸의 황비 데네브라가 그를 괴롭힐 때도 귀찮고 화가 나긴 했지만, 이토록 가슴이 답답하진 않았다.
율리아가 웃으면 화가 난다. 그녀는 어디 한군데가 크게 망가진 여자였다. 어떻게 사람이 자기 목숨을 그렇게 대수롭지 않게 여길 수가 있나. 두려워하거나 슬퍼하거나, 혹은 소리 지르고 화를 내야 정상이다.
그런데 율리아는 웃어 버렸다.
금 간 유리처럼 깨질 것 같은, 아슬아슬한 미소였다. 바라보는 사람을 아프게 하는 미소이기도 했다. 툭 치면 와르르 쏟아질 게 뻔해서 가까이 다가갈 수가 없었다.
카루스는 율리아를 설득하는 대신 맥스웰에게 명령을 내렸다.
“맥스웰.”
“예, 말씀하십쇼.”
“오르테가에서 활동하는 하이에나들을 색출해라. 그중 마조람 후작가와 연이 닿은 자라면 한 놈도 남김없이 찾아서 죽여 버려.”
“예?”
맥스웰이 얼빠진 얼굴로 그의 상관을 바라보았다.
카루스가 살벌한 눈으로 율리아를 노려보고 있었다.
“이 여자가 절대 죽지 않도록 조치해. 명령이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율리아는 카루스에게 목숨의 은인이었다. 게다가 남부 해군에 대한 엄청난 정보를 안겨 주기까지 했다.
그러니까 이건 과한 친절이 아니다. 동정심도, 간섭도 아니다.
오르테가를 떠나기 전에 은혜를 갚는 차원에서라도 그녀에게 이 정도는 해 주는 게 좋겠다고, 카루스는 그렇게 자신을 합리화했다.
그날 율리아는 저녁이 되기 전에 왕궁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 맥스웰과의 이야기가 길어졌기 때문이었다.
심부름꾼을 통해 왕궁에 오늘 하루 외박하겠다는 전언을 보내 놓고, 율리아는 맥스웰과 함께 카루스가 지내는 고급 여관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러니까…… 젊은 귀족들이 술 마시고 노는 자리에서 아무 위화감 없이 어울릴 수 있는 융통성 있고 약삭빠른 수행원이 필요하다는 거네요?”
“네.”
“얼굴이 알려지지 않은 자여야 하고, 그 문제의 여성 분께 집적거리는 난봉꾼들을 물리치려면 적당히 힘센 남자였으면 좋겠고, 결정적으로 입이 무거운 자여야 하고?”
“정답이에요.”
“난데?”
맥스웰이 손가락으로 자신을 가리켰다. 그러자 율리아가 만족스럽게 웃으며 동의했다.
“맞아요.”
“그 아름답다는 여성 분이 도대체 누군데요? 누군데 그런 식으로 암행을 다닙니까? 저도 정체를 몰라야 합니까?”
“레위시아 오르테가 2왕자 전하예요.”
“미친, 맙소사.”
맥스웰은 한동안 혼란스러워했다. 레위시아가 아무리 아름다운 남자라고는 해도 여장 좀 했다고 아무도 못 알아본다는 게 말이 되냐며, 오르테가의 귀족들은 다 눈이 삐었냐고 물었다.
“못 알아봤어요.”
“아무도?”
“아무도.”
“미친……. 일단 알겠습니다. 우리 시녀님이 하는 일인데 다 이유가 있고, 생각이 있겠죠. 다음부터는 제가 동행하죠.”
“고마워요, 맥스웰.”
맥스웰과 앞으로의 계획을 상의한 율리아는 카루스와 함께 저녁을 먹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