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6화 (38/319)

36화

“기억력이 아주 좋으시네요.”

“그 정도는 배우지 않아도 추측할 수 있어. 그리고 율리아, 난 어린애가 아니야. 그렇게 일일이 칭찬해 주지 않아도 내가 뭘 잘하고 못하는지 알아.”

대놓고 가르쳐 줘도 못 알아듣는 사람이 더 많다. 그리고 자신은 레위시아를 어린애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정말 잘하니까 잘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율리아는 그렇게 얘기하려다가 그냥 입을 다물었다.

“다음부터는 혼자 나가 볼 거야. 언제까지 널 보모처럼 달고 다닐 수는 없으니까.”

“그래도 호위는 있어야 해요.”

다른 사람은 몰라도 호위는 꼭 데리고 다녀야 한다. 게다가 남자 목소리를 감추기 위해 목에 병이 있다고 둘러대었으니, 레위시아의 의사를 대신 전달해 줄 눈치 빠른 시종도 필요했다.

율리아는 그 역할을 계속 자신이 할 수 없으리란 걸 잘 알고 있었다.

“왕궁 사람은 안 돼요. 전하는 밖에서 귀족을 주로 만나게 될 텐데, 왕궁 사람이 붙어 있으면 결국에 누군가는 알아보게 될 테니까요.”

“그렇다고 믿을 수도 없는 사람을 외부에서 데려올 수는 없잖아. 나한테 이런 비밀을 목숨 걸고 지켜 줄 만한 동료가 있는 것도 아니고.”

“제가 알아보겠습니다.”

“네가?”

“괜찮은 사람이 있어요.”

마침 떠오르는 사람이 있었다.

맥스웰.

율리아가 마조람 저택의 지하 감옥을 그토록 수월하게 침입할 수 있었던 건 맥스웰의 유능함 덕분이었다. 그는 그림자 정보상으로 긴 시간을 보냈던 만큼 암행에 걸맞은 재능을 가지고 있었다.

결정적으로, 맥스웰은 믿을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는 카루스 란케아의 부하였고, 율리아가 카루스에게 유용한 정보를 손에 쥐고 있는 이상, 두 사람의 신뢰 관계는 깨지지 않을 것이다.

다음 날 아침이었다. 외출 준비를 마치고 밖으로 나가려는 율리아에게 이번에 새로 들어온 하녀, 트루디가 다가와 인사를 건넸다.

“율리아 시녀님? 지금 외출하시는 거예요? 아침 식사는요?”

“괜찮아요.”

“제가 차려 드릴 수 있는데.”

트루디가 애교 있게 웃으며 식사를 권했다. 신입치고는 굉장히 붙임성 있는 하녀였다. 다른 하녀들은 율리아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몰라 며칠 동안 약간의 거리를 두고 대했는데, 이 하녀는 처음부터 그런 게 없었다.

율리아는 그런 트루디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정말 괜찮아요.”

“그럼 언제쯤 돌아오실 거예요? 코코 시녀님과 왕자 전하께서 물어보시면 뭐라고 할까요?”

“외출했다고만 전해 주세요.”

레위시아와 코코는 이날도 늦잠을 자고 있었다. 밤새도록 깨어 있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평소와 다를 바 없이 일찍 일어난 그녀가 이상한 거였다.

율리아는 왕궁 입구에서 무작위로 마차를 골라 탔고, 밖으로 나간 뒤에는 혼자 움직였다.

맥스웰의 전당포가 어디에 있는지는 알고 있었다. 그가 알려 준 적은 없으나, 그림자 정보상이란 별명을 듣자마자 과거에 유흥가 골목 어딘가에 물건 대신 정보를 거래하는 전당포가 있다는 소문을 접했던 기억이 났다.

율리아는 드레스 위에 평범한 코트를 걸치고, 머리카락은 바짝 묶어 모자를 쓰고 있었다. 얼굴까지 가리면 그쪽이 더 수상해 보일 것이기에 베일은 쓰지 않았다. 그리고 되도록 사람이 많은 길로 다녔다.

하이에나 때문이었다.

마조람 후작은 암살 의뢰를 취소하지 않았을 것이다. 보수를 높이면 높였지, 포기하지는 않았으리라.

왕궁에 침입하는 데는 성공했으나 율리아를 암살하는 데 실패한 하이에나들은 그녀가 밖으로 나오기만을 고대하고 있을 가능성이 컸다.

그래도 율리아는 걸음을 늦추지 않았다. 침입자가 들이닥쳤던 날, 마조람의 첩자였던 하녀를 골라냈으니 당분간은 괜찮을지도 모른다.

‘다시 암살을 시도하더라도, 그게 오늘은 아니겠지.’

이 판단이 잘못된 것이라고 해도 어쩔 수 없었다. 어차피 다시 시작하면 될 일이다.

위험하다는 이유로 몸을 사리다가는 원하는 것을 쟁취할 수 없다. 언제나 그랬다. 과감하게 움직일수록 많은 정보를 얻었다. 목숨을 걸면 꼭 그만큼의 보상이 돌아왔다. 그래서 이토록 무모해졌는지도 몰랐다.

삶을 여러 번 반복하는 동안 그녀는 아주 많은 걸 포기해야 했다. 그중엔 자신의 안전도 포함되어 있었다.

율리아에게 있어 소모해도 되는 최선의 대가는 언제나 자기 자신이었다.

맥스웰의 전당포가 얼마 남지 않은 대로변이었다. 율리아는 갑자기 뒷덜미를 오르내리는 선득한 느낌에 두 눈을 빠르게 깜박였다.

‘하이에나인가.’

죽음을 여러 번 반복하다 보니 이렇게 특별한 감각이 생기기도 한다.

율리아는 그녀의 목숨을 노리는 하이에나가 가까이에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재수도 더럽게 없지. 외출하자마자 놈들의 눈에 띄다니. 하이에나는 누구일까. 율리아의 머리가 바쁘게 돌아갔다.

맞은편에서 느릿느릿 걸어오는 저 남자일까, 아니면 건너편에서 이쪽을 노려보는 저 여자일까. 좌판 앞에 있는 상인일 수도 있고, 빈 마차를 몰고 다니는 마부일 수도 있었다.

율리아는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큰길을 지나 안쪽으로 조금만 더 걸어가면 맥스웰의 전당포가 있었다.

그때 한 남자가 그녀에게 다가왔다.

술에 취한 듯 보이는 남자였다. 검게 탄 피부에 붉게 달아오른 얼굴, 나이를 가늠할 수 없을 만큼 지저분한 수염이 얼굴을 뒤덮고 있었다.

비틀거리면서도 교묘하게 사람들을 피해 빠른 걸음으로 율리아에게 다가온 남자는, 몇 걸음 앞에서 그녀를 똑바로 노려보며 살기를 내뿜었다.

‘이런 곳에서? 곤란해질 텐데.’

의아했다. 이곳은 오르테가에서도 손에 꼽힐 만큼 번화한 길이었다. 인구도 많았고, 경비대가 수시로 순찰을 다녔다.

남자가 한 손을 재킷 안에 넣더니 무기로 짐작되는 무언가를 움켜쥐었다.

율리아는 남자의 눈을 보면서 깨달았다.

‘날 죽이고 나서 자살할 생각이구나.’

삶을 포기하면 무서운 게 없어진다. 살인을 저지른 뒤에 찾아올 죄책감이나 무거운 형벌, 모두 살아남을 수 있을 때나 걱정할 것들이다. 남자는 그 모든 걸 진즉 포기한 상태였다.

무엇을 대가로 받았으려나. 율리아는 그 순간에도 그게 궁금했다.

돈일까. 돈이라면 얼마나 될까. 얼마를 제시해야 저렇게 가볍게 목숨을 버릴 수 있을까.

가족을 인질로 잡고 협박이라도 했나. 하이에나들이라면 가능한 얘기였다.

남자가 재킷 속에서 한 손을 꺼냈다. 퍼렇게 날이 선 칼이 튀어나왔다. 그는 어설프게 움직이지 않았다. 시선은 율리아의 목에 고정돼 있고, 칼을 쥔 손은 단단하고 떨림이 없었다.

‘이번 삶은 여기까지인가?’

재빨리 주위를 둘러본 율리아가 생각했다.

그에게서 달아날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그녀는 드레스에 구두 차림이었다. 소리를 질러서 도움을 요청해도 소용없을 것이다. 거리가 너무 가까웠다.

아홉 번째는 좀 짧게 끝날 모양이다. 또 실패였다. 실패를 거듭하다 보니 아쉬움보다 분노가 먼저였다. 바로 자신에 대한 분노였다.

‘내가 왕궁 밖으로 나온 건 어떻게 알았지?’

웃는 얼굴로 다가와 식사를 권했던 하녀, 트루디가 생각났다.

쫓겨난 첩자의 빈자리에 새로 들어온 사람이었는데, 궁내부에서 신원이 확실하니 믿을 만하다고 보장한 여자였다.

경비병이나 마부가 첩자일 거라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경비병은 율리아가 위험에 처했을 때 진심으로 걱정해 준 사람이었고, 마부는 율리아가 누군지도 모르는 사람이었다.

첩자를 하나 잡으니까 그 자리에 새로운 첩자가 들어오다니 우습지도 않았다. 실수였다. 이중, 삼중으로 의심했어야 했다.

그래도 궁내부에 하이에나와 줄이 닿아 있는 마조람의 끄나풀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으니 중요한 정보 하나는 건진 셈이었다.

그 대가가 자신의 목숨이라 차마 기뻐할 수는 없었지만.

카루스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는 이번에도 율리아를 눈보라 속에서 구해낼 것이고, 그녀가 정신을 차리자마자 그 냉담한 얼굴로 똑같이 말할 것이다.

‘나도 똑같이 시작해야겠지. 그래도 죽지 못하는 저주를 받았다는 얘기는 안 하는 게 좋으려나.’

아픔이 짧았으면 좋겠다. 죽는 순간은 너무 고통스러워 시간이 지나도 잊히지 않는다. 덜 아플 수는 없으니까 짧기라도 했으면.

죽어.

하이에나가 온몸으로 소리쳤다. 가까이에서 보니 덩치가 율리아의 두 배는 되어 보이는 남자였다.

반항하는 게 효과가 있을까. 아마 없을 것이다.

율리아는 그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녀의 초록색 눈동자에 파도가 일었다. 태풍을 품은 바다처럼 무시무시한 고요가 그 안에 있었다.

죽어.

하이에나가 칼을 휘둘렀다.

율리아는 여전히 눈을 감지 않았다. 죽는 순간에도 살인자의 얼굴을 똑똑히 기억해 두기 위해서였다. 그것은 삶을 반복해 온 그녀에게 오기와도 같이 남아 있는 자존심이었다.

다시 시작하면 반드시 네놈을 죽이고야 말겠다. 그 얼굴을 똑똑히 기억해 두고, 이 고통을 열 배로 돌려줄 것이다.

그녀는 그렇게 다짐했다.

“율리아.”

그런데 갑자기 시야가 캄캄해졌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