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5화 (37/319)

35화

7. 망가진 덫에 사로잡힌 것들

어느 사교 클럽의 화려한 연회장. 젊은 귀족들의 은밀한 놀이터에 낯선 여자가 나타났다.

“누구지?”

연회장에서 살다시피 하는 파락호들도 처음 보는 여자였다.

긴 금발을 맵시 있게 늘어뜨린 늘씬한 체형의 미인. 어두운 조명 아래 드러난 창백한 피부와 진한 눈매엔 비밀스러운 매력이 있었다.

계단 앞에 서서 새카만 드레스를 성의 없이 휙 잡아 올린 그녀는 자신을 바라보는 많은 남자의 시선을 우습다는 듯 한 차례 내리깔았다. 그러곤 입가에 선명한 비웃음을 머금고 2층으로 올라갔다.

“도대체 누구지?”

한 남자가 중얼거렸다.

시끄럽던 연회장이 한순간에 조용해졌다. 그건 그녀의 아름다운 외모 때문이었지만, 타인에게 지독하게 무관심해 보이는 눈빛도 한몫했다.

“오르테가에 휴양 온 외국 귀족인가?”

“가서 이름이라도 물어봐.”

“남부 사람 같지도 않고, 북부 사람 같지도 않은데.”

남자들이 모여 수군거렸다. 드러내 놓고 관심을 표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2층 복도를 흘깃거리며 은근히 그녀의 동선을 확인하는 자도 있었다.

“결혼했을까?”

누군가 중얼거렸다. 그녀에게 첫눈에 반한 남자였다. 그러자 그와 함께 술을 마시던 친구들이 웃으며 떠들었다.

“그런 게 중요해?”

“애초에 저 여자가 너 같은 놈을 거들떠보기나 할 것 같냐? 꿈 깨시지.”

“그거야 모르는 일이지. 가서 말이라도 걸어 봐.”

연회장은 금세 다시 시끄러워졌다. 미련이 남은 몇몇 남자들이 2층을 흘깃거렸지만, 그녀는 한동안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연회장 2층의 접객실로 들어온 레위시아는 긴장한 얼굴이었다.

“어떡하지?”

“네?”

“다 나만 쳐다보는데? 알아본 사람이 있는 거 아냐? 율리아, 네가 잘 몰라서 그러는데…… 내가 이래 봬도 오르테가 귀족들에게 얼굴이 엄청 많이 알려져 있거든?”

“아무도 못 알아보는 것 같던데요.”

율리아가 의자 하나를 빼 주었다. 거추장스러운 드레스 자락을 발로 차 한쪽으로 치운 레위시아가 그 위에 앉았다.

“아무래도 안 되겠어. 오늘은 이만 돌아가자. 여기서 내가 큰 실수라도 해 버리면 귀족들 사이에서 두고두고 비웃음거리가 되고 말 거야.”

등장할 때는 그렇게 완벽하게 연기해 놓고, 방으로 들어오니 갑자기 소심해진 그였다.

율리아는 가볍게 웃으며 왕자에게 다가가 찬물을 담은 컵을 내밀었다.

“잘하셨어요.”

“응?”

“진짜 잘하셨어요. 완전히 다른 사람 같았어요. 왕궁에서 만나는 전하는 왕족이지만 친근한 느낌이거든요. 그런데 방금 연회장에 등장한 전하는 신비로운 이국의 여인 같았어요.”

“그거 진심이야?”

레위시아가 머뭇거리며 물었다. 칭찬을 해 줘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지 못할 만큼, 그는 잔뜩 긴장한 채였다.

율리아가 그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전하께는 재능이 있어요.”

“무슨 재능? 사기꾼 같은 재능?”

“아뇨. 관심을 끌어모으는 재능이죠.”

그건 왕족에게 아주 중요한 것이다. 율리아는 레위시아가 가진 최고의 재능은 바로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는 매력이라고 생각했다.

“양지에 레위시아 오르테가 2왕자 전하가 있어 잘 꾸며진 신하들의 얼굴을 마주하듯, 음지에서는 때때로 이렇게 다른 사람으로 나타나셔서 저들이 감춰 놓은 진심을 들으세요.”

“그게 가능할까.”

레위시아는 회의적이었다. 오르테가의 귀족들이 아무리 개방적인 성향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낯선 자신에게 그리 쉽게 진심을 털어놓지는 않을 거라고 말했다.

하지만 율리아의 생각은 달랐다.

“낯선 사람이기 때문에 더 대담해질 거예요. 죄책감을 느낄 필요가 없거든요. 익명성은 인간을 솔직한 괴물로 만들어요. 전하, 저들에게 존재하지 않는 익명의 친구가 되세요.”

“나는 저들에게 말을 할 수가 없잖아. 목소리를 들키면 안 되니까.”

“말을 할 수 없으니까 더 안심할 거예요. 소문내지 않으리라고 생각해서.”

그 후, 율리아는 레위시아에게 연회장으로 내려간 뒤에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를 하나하나 가르쳐 주었다.

제왕학을 가르칠 때와 마찬가지였다. 율리아는 좋은 선생이었고, 레위시아는 좋은 학생이었다.

가르쳐 주는 것들을 편견 없이 받아들이는 그를 보면서, 율리아는 자신의 선택이 옳았음을 다시금 깨달았다.

“여성스럽게 보이려고 애쓰지 마세요.”

“왜?”

“그런 건 자연스럽지 않으면 안 하니만 못해요. 목에 병이 있어 말을 할 수 없다는 것도 처음 한 번만 가르쳐 주면 추종자들이 알아서 설명해 줄 거예요. 직접 변명할 필요가 없다는 뜻이죠. 전하께서는 그냥 곤란해하는 표정만 지으면 돼요.”

“알았어.”

“술은 원래 잘 드시니 걱정하지 않을게요. 큰돈을 걸지 않는다면 오락의 수준에서 도박을 즐기는 건 괜찮아요. 다만 상스러운 욕이나 음담패설에 동조하진 마세요. 남을 깎아내리며 비난하는 농담에도 동조하지 마세요.”

자신의 격을 깎아내리는 행동만은 하지 말라는 율리아의 말에 레위시아가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누군가 전하를 당황하게 만들어도 공격적으로 반응하지 마세요.”

“뭐? 그건 왜?”

“적당히 거리를 두고 무시하세요. 유치한 도발보다는 조금 더 수준 높은 대화에 귀를 기울이세요. 전하의 작은 관심이 저들에게 자랑거리가 되게 하세요.”

“그렇군. ……알았어.”

레위시아가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곤 긴장으로 굳은 얼굴을 손등으로 툭툭 두드려 푼 뒤, 거울 앞으로 가서 모습을 정돈했다.

“율리아.”

“네?”

“이름은 뭐라고 해? 아무리 신비주의라곤 해도 이름까지 비밀로 하는 건 너무 이상하잖아.”

“이름이라면 코코와 함께 지어 둔 게 있어요.”

“뭔데?”

“티타니아.”

오르테가의 북부 국경 산맥 티타니아.

“좋은 이름이네.”

레위시아가 만족스러운 얼굴로 웃음을 흘렸다.

그는 20년 전 바이칸 제국의 남하를 막았던 가장 큰 요인은 국왕의 항복 선언이 아니라, 두 국가 사이를 가로막고 있는 높고 험준한 티타니아 산맥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그러니 티타니아야말로 레위시아 오르테가의 비밀스러운 이름으로 삼기에 제격이라고, 율리아는 생각했다.

“이제 됐어. 내려가자.”

2층 접객실 안에서 한동안 긴장을 추스른 레위시아가 치맛자락을 툭 차며 앞서 걸었다. 그와 함께 복도로 나온 율리아가 조심스레 눈동자를 굴렸다.

계단 앞에 다다르자 연회장에 있던 거의 모든 사람이 레위시아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호의와 경계, 호기심이 뒤섞인 시선이었다.

후우. 심호흡한 레위시아가 그들을 한차례 둘러보았다. 심장이 평소보다 조금 빠르게 뛰었다. 나쁘지 않은 긴장감과 낯선 해방감이 전신에 차올랐다.

레위시아는 율리아와 코코를 떠올렸다.

고요하게 가라앉아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위험하게 일렁이는 바다처럼 빨려 들어갈 것만 같은 율리아의 눈빛. 그리고 비웃는 듯 살짝 치켜 올라가 도도하고 매력적인 코코의 입매.

똑같이 따라 할 수는 없을 것이나, 적어도 흉내는 낼 수 있었다. 그는 그 두 명의 시녀를 가장 가까이에서 봐 온 자였다.

두 사람은 그에게 스승이자 친구이며, 형제와도 같았다.

레위시아의 얼굴에 미미한 변화가 일어났다. 그러자 그를 바라보던 몇몇 사람들의 눈동자가 황홀감에 젖어 들었다.

* * *

레위시아의 첫 번째 암행은 절반의 성공으로 끝났다.

두 사람이 갔던 곳은 오르테가에서 가장 큰 사교 클럽이었는데, 전체적으로 조명이 어둡고 가볍게 놀다 가는 젊은 귀족이 많아 암행 장소로 적당하다는 판단이었다.

그런데 그 귀족들은 해방군에 관한 진지한 담론을 나누긴커녕 아름다운 레위시아에게 관심을 표하느라 바빴다.

“이분은 도대체 어디서 오셨을까요? 처음 보는 것 같은데…… 오르테가 귀족은 아닌 것 같고.”

“하하! 이런 곳에서 가문에 관해 묻는 건 실례라오. 처음 만났지만 오래된 친구인 것처럼 놀다가 가는 거지. 어떻소? 내가 술 한 잔 사지!”

“유치한 고백인 줄 알지만, 당신은 제 이상형입니다. 꿈만 같달까요. 제발 연락처라도 알려 주십시오.”

첫눈에 반했다며 끈적끈적하게 구애하는 남성도 있었고, 친구가 되고 싶다면서 달라붙는 여성도 있었다.

그들을 물리치느라 시간을 다 써 버린 레위시아는 새벽녘이 되자 서둘러 왕궁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율리아는 ‘쓸 만한 정보를 얻을 순 없었으나 아무도 그를 알아보지 못했다는 점에서 절반의 성공’이라고 평가했다.

“이게 뭐야. 우리 왕국 귀족들이 다 저러고 노는 건 아니겠지? 뭐 대단한 이야기라도 나누는 줄 알았더니…… 죄다 내 얼굴만 쳐다보고.”

“처음이라 그래요.”

“이래서 너무 잘나게 태어나도 문제라니까. 내 어머니는 도대체 왜 나를 이렇게 예쁘게 낳으셨을까.”

“그래도 아주 잘하셨어요. 함부로 대할 수 없는 사람이라는 인상을 남기고 왔으니, 다음엔 한 단계 걸러진 사람들이 접근할 거예요.”

레위시아는 조금 실망한 기색이었다. 그러나 율리아는 절대 서둘러선 안 된다고 그를 달랬다.

“갈수록 나아질 거예요. 언젠가는 전하를 음지의 모임에 초대하는 사람이 나타날지도 모르죠. 전하와 친해지고 싶어 하는 사람이 많으면 많을수록 유리해질 거고요.”

모든 일에는 적절한 시기가 있다. 레위시아는 숨어서 커야 한다. 왕족으로서 존재감을 드러내기에 그는 아직 힘이 약했다.

“걱정하지 마. 암행은 계속 다닐 거야. 아무도 내가 누군지 알아보지 못한다는 게 이렇게 큰 해방감을 주는 줄은 몰랐거든.”

“전하.”

“그렇다고 나가서 마냥 놀기만 하겠다는 건 아냐. 율리아, 네가 했던 말도 다 기억하고 있어. 귀족들의 동향을 파악하고, 그들의 처지에서 왕국을 바라보라는 말. 해방군의 움직임을 주시하면서 백성들의 말에 귀 기울이라는 것도.”

레위시아가 율리아를 똑바로 바라봤다.

“사실 그거, 그 말 아냐? 네가 선택한 제왕학 교과서 첫 페이지에 나오잖아. 제왕은 무릇 백성의 처지에서 생각할 줄 알아야 한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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