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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화 (36/319)

34화

레위시아의 얼굴에 짓궂은 웃음기가 퍼졌다. 그를 매일 그림자처럼 따르던 호위 기사가 넌지시 물어보았다.

“좋은 일이 있으십니까?”

“내가?”

“아까부터 계속 웃고 계셔서.”

“난 원래 잘 웃잖아.”

“그래도 혼자서 그렇게 으흐흐흐 웃으며 걷는 모습을 처음 봅니다.”

“내가 그렇게 변태 같이 웃었다고?”

레위시아가 창문 유리에 제 얼굴을 비춰 보았다. 그의 눈에는 별반 다르지 않은 얼굴인데, 뒤에 서 있던 호위 기사가 하하하 웃더니 그렇게 봐서는 모른다고 말했다.

“율리아 시녀가 옵니다.”

가슴이 뜨끔했다. 혼자 상상만 했을 뿐인데 머릿속을 들킨 것 같은 기분이었다.

“전하.”

“무슨 일이지?”

레위시아가 뒷짐을 지고 허리를 폈다. 본래도 부드러운 편인 목소리가 중저음으로 나왔다. 그런 자신의 모습이 꽤 권위 있는 왕족처럼 보여 만족스러웠다.

그런데 율리아는 그와 눈조차 마주치지 않은 채 말했다.

“항구에서 해방군이 선동적인 유인물을 배포하고 있다고 해요. 지금 궁내부가 그 일 때문에 뒤숭숭해요. 알고 계셨어요?”

“그래, 해방…… 해방군?”

“네, 제가 복사본을 가져왔어요.”

율리아가 들고 있던 종이를 내밀었다. 레위시아는 떨떠름한 얼굴로 그 종이를 받았다. 누군가 베껴 쓴 것으로 보이는 글이 종이 가득 빽빽하게 쓰여 있었다.

“난 해방군이니 그런 애들한테 별로 관심이 없어.”

“그럼 이제부터 관심을 가지셔야 할 거예요.”

“왜?”

“곧 남부 함대의 사령관이 바뀔 예정이거든요. 그러면 새 제독이 부임할 텐데, 항구에서 오르테가의 청년들이 이런 걸 뿌리면서 백성들을 선동하고 있으면…….”

“어이없고 화나겠지.”

“황제의 귀에 들어갈 거예요.”

레위시아가 빠르게 얼굴을 굳혔다.

오르테가는 바이칸 제국이 시작한 정복 전쟁에서 거의 유일하게 아무런 피해 없이 국경을 보존한 국가였다.

국왕이 당시 황제 앞에서 네 발로 엎드려 벌벌 기었기 때문이다.

싸워 보기도 전에 항복 선언을 받은 황제는 오르테가를 정복하는 대신, 남부 바다에 제국의 함대를 주둔시키는 것으로 만족하고 돌아섰다.

보호 동맹이라는 건 사실 국왕이 귀족들을 달래기 위해 만든 허울 좋은 말로, 바이칸 제국에서 오르테가는 속국 내지는 식민지 취급을 받았다.

해방군이라니. 새로 부임하는 제독이 오르테가에 불온 세력이 있고 그들이 독립을 꿈꾸고 있다고 황제에게 보고하는 순간, 남부 함대 군함 전체가 오르테가를 향해 포문을 열게 될 것이다.

심각해진 레위시아가 율리아에게 물었다.

“부왕께선 알고 계시겠지?”

“궁내부에서 바로 보고한다는 것 같았어요. 아마 지금쯤 이걸 읽고 계시겠죠.”

“다 죽여야 하나?”

레위시아가 냉정하게 물었다. 그러나 그렇게 말하는 그의 얼굴은 칼에 찔린 사람처럼 아파 보였다.

“국왕께선 다 죽이라고 명령하실 겁니다.”

율리아는 빙 돌려서 말하지 않았다.

지난 삶에서도, 그 이전의 삶에서도 해방군은 언제나 잔인하게 처형되었다. 한때 왕궁 앞 광장은 해방군 청년들의 시신으로 피가 마를 날이 없을 정도였다.

이번에도 다르지 않을 것이다. 카루스 란케아가 1년이나 일찍 나타났으니 해방군의 움직임도 그에 맞춰 빨라질 가능성이 컸다.

“귀족들이 모이는 곳에 좀 가 봐야겠어.”

레위시아가 중얼거렸다. 왕궁 밖에서 귀족들의 사교 장소를 돌아다니며 그들이 이 일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아볼 요량인 것 같았다.

율리아가 괜찮다는 뜻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레위시아는 국왕이나 마조람과는 다른 길을 가야 하는 사람이니까, 지금은 최대한 많은 사람의 이야기를 들어 두는 편이 좋았다.

“몰래 나가셔야 해요. 전하께서 독립을 주장하는 귀족들을 만나고 다닌다는 소문이라도 돌게 되면, 왕위 후보가 되기도 전에 거센 공격을 받으실 겁니다.”

“이래 봬도 난 왕족이야. 몰래 나가다니, 그게 가능하겠어?”

레위시아의 호위 기사들도 그의 말에 공감하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왕족의 외출은 모두 기록되게 되어 있었다. 그리고 왕족의 안전을 위해 호위와 시중드는 사람이 줄줄이 따라다니기도 했다.

“다른 사람인 척 변장이라도 하면 모를까…….”

마침 율리아에게 아주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드레스를 입으세요.”

레위시아가 물었다.

“드레스?”

레위시아 왕자는 아름다운 사람이었다. 화려하거나 강렬한 미인은 아니었으나 남자 치곤 선이 가늘고 인상이 부드러웠다. 그래서 화려한 옷이나 장신구도 다 잘 어울리는 편이었다.

율리아는 자신 있게 말했다.

“아무도 못 알아볼 거예요.”

레위시아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얼굴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그는 남자였다. 여자와는 신체적으로 많은 차이가 있었다. 하지만 율리아는 간단한 눈속임으로 그 차이를 메울 수 있다고 자신 있게 말했다.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만들어 드릴게요.”

드레스는 어렵지 않게 구할 수 있었다. 왕자궁엔 손님용 옷이 몇 벌 마련되어 있었고, 그건 체형에 상관없이 끈으로 조여 아무나 입을 수 있게끔 만들어진 드레스였다.

가발과 화장품은 코코의 것을 썼고, 장신구는 왕자가 가지고 있는 게 워낙 많았다.

“보세요.”

치장을 마친 율리아가 자신 있게 말했다.

레위시아는 진짜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다.

검은색 드레스에 다이아몬드가 알알이 박힌 목걸이, 진주색 장갑과 겹겹이 덧댄 허리띠가 매혹적이었다.

코코가 말을 잃은 채 레위시아를 바라보았다. 그는 거울 앞에 바짝 붙어 서서 제 얼굴을 살피느라 여념이 없었다. 아까부터 그의 입에선 계속 감탄사가 터져 나오는 중이었다.

“나 좀…….”

“말하지 마세요.”

“예쁜 것 같은데.”

코코는 반박할 말을 찾지 못했다. 진짜 예뻤으니까.

긴 금발을 구불구불하게 말아 한쪽으로 늘어뜨리고, 장식용 가발로 풍성한 앞머리와 땋은 머리를 이어 붙였다. 눈 화장은 약간의 퇴폐미가 드러나도록 진하게 하되 입술은 창백하게 표현하고, 얼굴이 둥글어 보이도록 음영을 지웠다.

골격을 감추면서 마른 손목과 빗장뼈는 드러내고, 굵은 목걸이로 목을 감았다.

그러자 레위시아 왕자는 사라지고, 그 자리에 웬 고혹적인 귀부인만 남아 있었다.

평상시에도 아름다운 사람이라고 생각하긴 했지만, 이렇게 정성스레 치장해 놓고 보니 오르테가 최고의 미인은 왕의 애첩이 아니라 그 아들인 레위시아 왕자가 아닌가 생각되었다.

“이러고 나갔다가 남자들이 나한테 반하면 어떡해. 그건 너무 소름 끼치는데.”

코코는 그게 뭔 개소리냐고 쏘아붙이고 싶었다. 만약 어떤 여자가 제 앞에서 그런 말을 했다면 큰 소리로 비웃었을 것이다.

그런데 어쩐지 진짜 그런 일이 일어날 것 같아서 웃을 수가 없었다.

“내가 나한테 반하겠어.”

레위시아가 만족스럽게 웃었다. 처음 여장을 하자고 했을 때는 시큰둥했던, 심지어 조금 화난 것 같았던 그의 태도가 완전히 바뀌어 있었다.

“율리아 말이 맞아. 아무도 못 알아볼 거야. 알아보면 그게 이상한 놈이지.”

“어떤 누구와도 자유롭게 어울릴 수 있고, 왕궁을 드나들 때도 유리할 거예요. 왕족의 외출에는 시선이 집중되지만, 이름 모를 귀부인은 하루에도 최소 수십 명은 드나드니까요. 기록조차 남지 않을걸요.”

“그렇군. 몰래 나가려고 애쓸 필요도 없었잖아?”

“되도록 말은 하지 마세요. 제가 함께 있을 때는 귓속말을 하는 척하세요. 그러면 제가 적당히 둘러댈게요. 누가 묻거든, 목에 병이 있다고 할게요.”

“좋아.”

“귀부인처럼 도도하게 상대하세요. 수다쟁이들은 무관심한 척하면서 적당히 들어 주는 사람에게 더 많은 이야기를 털어놓고 싶어 하거든요.”

준비는 끝났다. 율리아는 긴 머리를 틀어 올려 모자 속에 넣고, 레위시아의 시중을 드는 하녀처럼 차려입었다.

“가실까요?”

율리아는 별다른 생각 없이 레위시아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런데 그가 가만히 서서 율리아의 손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전하?”

“아무것도 아니야.”

레위시아가 율리아의 손을 덥석 잡았다.

“구두가 익숙해질 때까지는 어쩔 수 없지. 내가 꼴사납게 넘어져서 남자인 걸 들키게 될 수도 있으니까.”

“네, 전하.”

“놓지 말고 꼭 잡고 있어.”

호위 기사의 손을 잡으셔도 될 텐데. 율리아는 레위시아를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는 호위 기사를 떠올렸다.

하긴, 남자들은 같은 남자랑 손잡는 걸 싫어하니까.

“제가 잘 잡아 드릴게요. 걱정하지 마세요.”

“내가 넘어지면 다 네 탓이야. 알겠어?”

율리아는 이번에도 별다른 생각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한 손으로는 레위시아의 손을 꼭 잡은 채였다.

말없이 그 모습을 바라보던 코코가 들으란 듯 크게 한숨을 내쉬더니 입꼬리를 내리고 입술을 사선으로 비틀면서 빈정거리기 시작했다.

“세 살이에요? 그 구두는 굽도 없고, 바닥도 물렁거리거든요? 너무 키 큰 여자는 눈에 띈다고 일부러 편한 신발로 골라 놓고는 넘어지긴 왜 넘어져요? 그거 신고 넘어지면 전하께서 걸음마를 잘못 배운 거예요.”

“익숙하지 않아서 그래. 게다가 드레스는 무겁고 불편하단 말이야.”

“그 드레스가 왜 무거워요? 전하께서 외출할 때마다 입고 다니던 경량 갑옷은 그것보다 훨씬 무거울 텐데요? 갑자기 힘을 잃었어요? 어떡해. 이제 밥도 떠먹여 드릴까요, 아기 레위시아 전하?”

“코코, 닥쳐.”

“싫어요.”

“우리끼리 놀러 나간다고 질투 좀 하지 마. 친구 없는 걸 왜 나한테 화풀이야?”

율리아는 코코가 또 입술로 욕하는 걸 보았다. 이러다 외출하기 전에 싸움부터 할 것 같아서, 그녀는 서둘러 레위시아의 손을 끌어당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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