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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화 (35/319)

33화

“율리아?”

레위시아가 잘 못 들었다는 얼굴로 되물었다.

그제야 고개를 들어 올린 율리아가 담담하게 말했다.

“동화는 주인공에게조차 친절하지 않잖아요. 진짜로 그런 삶을 살고 싶은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 마왕에게 납치당하고, 마녀의 저주에 걸려 고통받고……. 그런 아픔이 동화 속 왕자님의 사랑으로 치유될 리도 없고.”

“그래서 사랑을 믿지 않는다?”

“굳이 말하자면…… 제 사랑은 무가치하다는 뜻이었어요.”

“어째서?”

“금방 물거품처럼 사라질 거거든요.”

율리아의 말투는 그녀가 레위시아에게 제왕학을 가르칠 때와 하나도 다르지 않았다.

책을 읽는 것처럼 무미건조한 목소리에, 이번에는 코코가 질렸다는 얼굴로 혀를 찼다.

하지만 레위시아는 율리아의 말을 가볍게 넘겨들을 수 없었다.

사랑이 무가치하다니. 그는 여자에게 그런 말을 처음 들었다.

그의 어린 시절을 지배하고 있는 절대적인 여성은 어머니였고, 그의 어머니는 사랑 하나 때문에 자신의 삶과 하나뿐인 아들까지 포기한 사람이었다.

“세상엔…… 사랑이 영원할 거라고 믿는 사람도 있어.”

“있겠죠. 어딘가에는.”

율리아가 이제 잡담은 그만하고 책을 보라고 잔소리를 하려던 순간이었다. 레위시아가 갑작스럽게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하!”

호탕한 웃음소리였다. 깜짝 놀란 율리아가 눈을 크게 떴다. 코코는 드디어 미친 거냐고, 공부가 아무리 하기 싫어도 미치지는 말라고 중얼거렸다.

그렇게 한참 웃던 레위시아가 웃음을 뚝 그치고 말했다.

“코코, 난 동화가 싫어.”

“뭔 뜬금없는 소리예요, 진짜.”

“그래서 너희가 좋아. 더럽게 비관적이고 현실적이거든. 어쩌다 내 머릿속이 꽃밭이 되거들랑, 꼭 오늘처럼 찬물을 냅다 들이붓도록 해. 정신이 번쩍 나도록.”

창밖을 보니 창백한 달이 떠 있었다. 사람을 매혹한다는 눈썹달이었다. 싱숭생숭해진 레위시아가 혼잣말하듯 중얼거렸다.

“여기서 도망치고 싶다고 말하면…… 너흰 나한테 실망하겠지?”

어딘가 슬프게 들리는 목소리였다. 그는 습관이 된 미소를 입에 물고, 율리아와 코코에게 물었다.

“도망치는 게 나빠?”

“전하.”

“너무 싫고 끔찍해서 도망치는 게 나쁘냐고. 나는 싸우기 싫은데. 누굴 죽이고 싶지도 않고, 내가 증오하는 사람이랑 똑같은 짓을 하고 싶지도 않은데. 그래도 도망가는 게 나쁘냐고.”

“안 나빠요. 그건 용감한 거예요. 전하를 지키는 거니까.”

“근데 너희는 왜 나한테 자꾸 싸우라고 해?”

“전하에겐 숨을 곳이 없으니까요.”

율리아는 그를 달래지 않았다.

레위시아가 웃었다. 그의 아름다운 얼굴에 슬픔이 가득했다.

매일 능글맞은 농담만 쏟아내던 입술이 살짝 떨려, 그렇게 슬퍼 보일 수가 없었다. 레위시아 오르테가는 눈동자보다 입술이 더 슬픈 남자였다.

“난 결국 죽겠지?”

“전하.”

“부왕의 손에 죽거나…… 형제들의 손에 죽거나. 그것도 아니면…… 어딘가에서 아무도 모르게 비명횡사하게 되려나.”

코코의 숨소리가 빨라졌다. 율리아는 코코가 두 손을 꽉 맞잡은 채 숨을 고르고 있다는 걸 알았다.

레위시아는 이러다 정이 들어서 우리가 가족이 될 수도 있겠다고 농담을 했지만, 코코에게 그는 오래전부터 가족이었다.

어린 코코가 하얀 요람에 혼자 누워 우는 외로운 아기를 만났던 날부터, 레위시아 왕자는 그녀의 친동생이었다.

이전의 삶에서 레위시아는 결국 죽었다. 마조람 후작과 국왕, 그리고 귀족들이 결탁한 일이었다. 레위시아는 바이칸 제국의 황실로 팔려 가다시피 떠났고, 가는 길에 비참하게 죽었다.

그때 코코는 아주 많이 울었다. 첫사랑에 실패했을 때보다 많이 운 거라고 했다. 부모님이 돌아가셨을 때처럼, 가족을 잃은 사람의 얼굴로 울었다.

율리아는 그때의 코코를 대신해서 말했다.

“저희가 같이 있을게요.”

“뭐?”

“전하를 죽게 내버려 두지도 않겠지만…… 그런데도 운명이라는 게 존재해서 전하가 결국 죽게 된다면요. 어딘가에서 아무도 모르게 죽게 하지 않아요. 코코와 제가 꼭 함께 있을 거예요.”

“뭐야. 나랑 같이 죽으려고?”

“못할 것도 없어요.”

“뭐? ……진심이야?”

“네.”

또 비슷한 말투였다. 단호하고, 담담한 말투. 감정이 느껴지지 않아서 더 속이 울렁거리는 그런 말투.

레위시아는 율리아에게 거짓말하지 말라면서 웃었다. 하지만 그렇게 말하는 그의 눈동자에 잔물결이 번지고 있었다.

레위시아도 율리아와 마찬가지로 사랑을 믿지 않았다.

특히 여자가 남자의 사랑에 매달려 우는 걸 가장 끔찍하게 생각했다. 어린 시절 그를 가장 괴롭게 했던 어머니의 모습을 떠올리게 했기 때문이다.

그는 바실리가 매달리고 율리아가 차갑게 구는 걸 볼 때마다, 그 두 사람을 부왕과 어머니에 빗대어 즐거운 상상을 하곤 했다.

유치하고 치졸했지만, 그런 상상을 할 때마다 속이 시원해지곤 했기 때문에 죄책감은 느껴지지 않았다.

그런데도 그날 율리아의 고백은 그의 가슴 안에 무겁게 가라앉았다.

사랑이 무가치하다니.

다른 이유도 아니고, 물거품처럼 사라질 감정이기 때문에 그렇다니.

“뭐 하세요?”

혼자 숙제하라고 내버려 뒀더니 창문에 달라붙어 꼼짝도 하지 않는 그에게 코코가 다가왔다.

“전하, 농땡이 치지 말고…….”

“율리아를 어떻게 생각해?”

또 뜬금없는 질문이었다. 코코가 붉은 눈에 힘을 주고 그를 노려보았다. 그러자 레위시아가 두 손을 살짝 들고 항복하는 자세를 취하더니, 이내 창밖을 가리켰다.

“저길 봐.”

“뭔데요.”

“율리아의 후원자가 또 선물을 보냈어. 이번엔 상자가 작네. 전에는 드레스랑 구두…… 뭐 그런 거였지.”

“금화 한 상자도 있었죠.”

“어떡하냐. 난 해 줄 수 있는 게 하나도 없는데.”

코코가 그게 무슨 소리냐고 물었다. 율리아는 레위시아의 시녀이지만, 아마 드레스나 장신구를 바라고 왕궁에 들어온 건 아닐 거라면서.

“그럼 쟤는 나한테 뭘 바라고 여기 들어온 걸까.”

그건 레위시아의 혼잣말이었지만, 코코에게는 그렇게 들리지 않았다. 그녀는 누군가와 이야기를 나누는 율리아를 지켜보았다.

“전하는 마조람 후작에게서 율리아를 지켜 줄 수 없었어요.”

“그래. 나도 그게 너무 충격이었는데…… 인정할 건 인정해야지. 그러니까 더 이상하잖아. 나 같으면 뭐 이런 왕족이 다 있느냐면서 뒤도 안 돌아보고 도망갈 것 같은데.”

레위시아는 자신이 율리아에게 있어 든든한 방패가 아니라는 사실이 드러났으니, 그녀가 왕궁을 떠나야 정상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율리아는 그런 건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더욱 그에게 가까이 다가왔고 그의 마음에 깊숙이 새겨졌다.

레위시아가 시선으로 율리아를 쫓았다. 동그란 정수리에서 길고 우아한 목선을 따라, 단정하고 곧은 허리를 따라, 길게 늘어진 치맛자락을 따라 움직였다.

“레위시아 전하.”

코코가 손바닥으로 그의 눈을 가렸다.

“왜 이래.”

“율리아는 안 돼요.”

“무슨 소리야?”

“전하께서 아직 첫사랑조차 하지 않은 어린애라는 건 아는데요. 그래도 율리아는 건드리지 마세요. 다른 여자는 아무나 다 괜찮아요. 남자도 괜찮아요. 그런데 율리아는 안 돼요.”

레위시아가 웃으며 코코의 손을 잡아 내렸다.

“나 참……. 그런 거 아냐. 그리고! 듣다 보니까 영 이상하네? 다 되는데 율리아는 왜 안 돼? 오히려 다른 사람은 안 돼도 율리아는 믿을 수 있으니까 괜찮아야 하는 거 아냐?”

“쟤는 전하가 감당할 수 있는 여자가 아니에요.”

코코가 엄하게 말했다.

레위시아는 이번에도 해괴한 농담으로 대화를 이어 가려 했지만, 어쩐지 입이 벌어지지 않았다. 그가 어색한 얼굴을 하고 굳은 채로 서 있자, 코코가 또 한 번 경고했다.

“상처받으실 거예요. 저는 율리아가 마음에 들지만, 전하에게 상처 줄 게 뻔한 애와의 사랑을 응원할 수는 없어요.”

“코코.”

“들으셨잖아요. 사랑이 무가치하다던 말.”

“그거야…….”

“그게 평범한 스물한 살의 입에서 나올 수 있는 말이라고 생각하세요? 바실리 마조람을 가지고 노는 것도 옆에서 다 지켜보셨잖아요.”

코코의 말이 옳았다. 레위시아가 알았으니까 걱정하지 말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제발 정신 차리라는 충고와 함께, 코코가 불안한 한숨을 내쉬었다.

사랑에 빠지지 말라는 말은 사랑에 빠지는 주문과도 같다.

레위시아는 언젠가 자서전 같은 걸 쓰게 된다면, 이 말을 첫 문장으로 삼을 거라고 다짐했다.

그는 그냥 별생각 없었을 뿐인데 코코가 그렇게 진심으로 경고하니까 자꾸 율리아가 눈에 밟혔다. 평소엔 그냥 대충 인사나 받아 주고 지나치던 순간도 꼭 한마디 더 말을 걸게 되었다.

레위시아는 성인이었지만 아직 진짜 사랑을 해 본 적이 없었다.

어릴 때야 여자애들 앞에 서면 쑥스럽고 긴장돼서 바보 같은 실수를 하기도 했는데, 다 자란 뒤에는 그런 일도 없었다. 그에게 사랑이란 동화 속에나 나오는 환상, 혹은 그의 어머니 같은 사람을 병들게 하는 나쁜 것이었다.

‘사랑은 개뿔.’

한번 상상해 보았다.

율리아가 그의 연인이며, 시녀인 상상을. 왕족은 신분이 낮은 연인을 가까이에 두기 위해 시녀로 들이기도 하니까.

아침에 일어나면 제일 먼저 만나게 되려나. 시녀는 왕족의 일상을 함께하는 자이니, 온종일 함께 있게 될지도 모른다.

연회에 누굴 파트너로 데려갈지 고민하지 않아도 되고, 마음을 나눌 친구가 없어 외로움이 사무치는 날에도 혼자 견디지 않아도 되려나.

율리아는 인상이 차가운 편이니 쑥스러움을 많이 타는 성격일 거라 생각되었다. 그러면 사랑한다거나 보고 싶었다는 표현은 솔직한 레위시아가 주로 하게 될 것 같았다.

그러면 율리아는 웃을까. 아니면 부끄러움을 감추기 위해 화를 낼까.

부끄러움이라니. 저 완벽한 시녀님에게 정말 어울리지 않는 감정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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