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화
바실리는 자신이 선량한 사람이며, 그만큼 타인을 잘 배려한다고 생각하고 살아왔다.
심지어 그는 자기 자신을 객관적인 시선으로 바라보는 합리적인 사람이라고 믿었다. 그렇기에 자신의 의견은 대부분 옳았고, 다른 사람들은 멍청하고 시야가 좁아서 그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는 거라고 여겼다.
그게 얼마나 등신 같은 생각인 줄도 모르고.
“타인의 처지에서 생각하라고? 그게 무슨…….”
율리아는 이상해졌다. 입장을 달리 생각해 보라니, 그게 무슨 어린애 같은 투정이란 말인가. 사람은 누구나 자신만의 입장이 있고, 타인을 완전히 이해할 수 없었다.
기분이 더러웠다. 율리아가 한 말들이 상처가 되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그녀가 마지막에 던져 주었던 금화 주머니 때문이기도 했다.
“빌어먹을.”
갇혀 있던 바실리는 빈손이었고, 돈을 가지러 저택으로 돌아갈 수도 없었다.
율리아는 꼭 거지에게 적선하듯 그에게 금화 주머니를 던져 주었다. 그가 허리를 구부려 주울 수밖에 없도록, 지하실 바닥에 툭 던져 놓았다.
밤거리를 걸으며 혼자 중얼거리던 바실리가 주머니를 꺼냈다.
“도대체 얼마나 넣었길래, 아니…… 애초에 율리아한테 이런 돈이 있었나?”
그는 골목길 한가운데 서서 주머니를 열어 보았다.
“뭐야.”
번쩍거리는 금화가 가득했다. 언뜻 보기에도 상당한 액수였다. 바실리는 찝찝한 얼굴로 주머니 안에서 금화를 꺼내 달빛에 비추어 보았다.
“진짜잖아.”
골목길 안쪽을 오가던 부랑자들도 그 모습을 보았다.
그들의 눈빛이 순식간에 탐욕으로 물들었다. 바실리가 오싹함을 느낄 만큼 선명한 적의가 골목길을 가득 채웠다.
이런 미친.
미처 입 밖으로 꺼내지 못한 말이 머릿속에서 맴돌았다.
바실리는 주머니를 꽉 쥔 채 빠르게 걸었다. 어떻게든 큰길로 나가서 친구들이 모이는 클럽으로 가야만 했다. 거기까지만 갈 수 있다면, 그와 영원한 우정을 맹세한 친구들이 안식처를 내어 줄 것이다.
“이봐, 도련님.”
벽에 기대앉아 있던 거지가 걸걸한 목소리로 말을 걸었다.
“어딜 그렇게 급하게 가시나.”
달빛 아래 드러난 거지의 얼굴이 흉측했다. 상처와 오물로 뒤덮인 피부에, 드러난 이는 누렇고 까맸다.
“으, 으아아아아!”
바실리가 비틀거리며 달리기 시작했다. 어느새 그의 앞을 점령한 부랑자가 두 팔을 벌려 진로를 막았다. 당황한 바실리는 그만 발이 꼬여 그 자리에서 앞으로 고꾸라지고 말았다.
“으하하하!”
부랑자들이 큰 소리로 웃었다. 모두 끔찍한 흉터와 오물로 뒤덮인 남자들이었다. 항구에서 무슨 일을 하는 건지, 그들이 움직일 때마다 시큼한 생선 썩은 냄새가 났다.
“이것 봐라! 어딜 가려고?”
“도련님이네? 아니…… 자세히 좀 보자! 아가씬가? 응?”
율리아가 준 주머니를 빼앗기는 건 순식간이었다. 주머니 입구가 벌어지며 와르르 금화가 쏟아졌다. 바실리를 괴롭히던 부랑자뿐만 아니라, 지나가던 행인까지 달려들어 금화에 손을 뻗었다.
바실리는 그들이 가져간 돈을 돌려받을 생각도 못 하고, 그저 네발로 기어서 이 자리를 벗어나기 위해 애썼다.
“어딜 가! 신발도 좋아 보이고, 옷도 비싸고, 응? 머리카락도 아주 보드라운데? 다 잘라서 팔아야겠어. 옷은 나랑 바꿔 입자. 내 것도 아직 쓸 만하거든? 으하하!”
“외투는 내 거야! 더 뒤져 봐. 반지나 목걸이를 가지고 있을 수도 있잖아.”
온몸이 덜덜 떨렸다. 바실리는 그들을 뿌리치려 두 팔을 마구 휘저었지만 들려오는 비웃음만 커질 뿐이었다.
“비켜! 비키지 못해! 이것들이 내가 누군 줄 알고…….”
“누군데, 응? 누군데!”
“다 죽여 버릴 거야. 다…… 다 사형시켜 버릴 거야! 너희가 감히 귀족을 이런 식으로 건드리고도 무사할 줄 알아!”
“그렇게 말하면 우리가 도련님을 고이 보내 줄 수가 없잖아. 안 그래?”
누군가 아주 낮은 소리로 말했다. 바실리는 그제야 실수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냥 돈과 옷가지만 빼앗기면 끝날 일이었는데, 어느새 그를 놀리던 부랑자들이 아무도 웃지 않고 있었다.
“귀족 나으리, 그거 알아?”
부랑자 하나가 다가와 말했다.
“남부 해안 어딘가엔 식인 물고기 떼가 사는 곳이 있어. 사람을 담가 놓으면 있잖아. 응? 뼈만 남아서 올라온다고. 누군갈 흔적도 남기지 않고 처리할 때 아주 좋단 말이야.”
겁에 질린 바실리의 얼굴은 곧 부랑자들에 가려져 보이지 않게 되었다.
‘갇혀 있었다고 했지.’
율리아는 바실리가 했던 변명을 하나도 잊지 않고 있었다.
그녀는 새어 나오는 웃음을 굳이 감추지 않았다. 그렇게 말하면서 바실리는 억울하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율리아는 과거에 그의 말이 사실인지 집요하게 확인했다.
그녀가 눈보라 속에서 죽어 가고 있을 때, 바실리는 갇혀 있었다고 했다. 하지만 그가 생각하는 감금은 율리아가 생각한 감금과는 크게 달랐다.
바실리는 그날 충분히 빠져나올 수 있었다. 그를 감시하던 병사는 도련님이 나가게 해 달라고 말만 했을 뿐, 나가려고 어떤 적극적인 시도를 하지는 않았다고 했다.
만약 그랬다면 자신은 도련님을 다치게 할 수 없는 일개 병사이기에 어쩔 수 없었을 거라고.
바실리가 그날 최선을 다해서 율리아에게 오려고 했다면, 그는 중간에 붙잡혀 돌아갔을망정 자신의 방에서 빠져나올 수는 있었다.
마조람 후작이 보육원에 지원금을 끊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율리아는 그 사실을 나중에서야 알았다. 가난을 견디지 못한 원장이 가엾은 애들을 배에 팔아 버린 뒤에, 그들을 구할 수 없게 된 뒤에야 알았다.
하지만 바실리는 그것조차 이미 알고 있었다고 했다. 아버지를 말렸지만 어쩔 수 없었다고.
그럼 네 돈으로라도 도와주지 그랬냐고, 애들이 팔려 가지만은 않도록 구해 줄 수 있지 않았냐고, 율리아는 그에게 따져 물었다.
하지만 바실리는 정말 아무것도 몰랐다.
그 애들도 가난한 보육원에서 귀족에게 구걸하며 사는 것보다, 몸은 조금 힘들지언정 배에서 일하며 배불리 먹고 훌륭한 선원이 되는 편이 나을 거라고 했다.
해적의 배에 팔려 간 아이들은 노예가 되거나 가축처럼 일만 하다가 죽는다는 사실을 모르는 철부지 귀족이기에 할 수 있는 말이었다.
“그래서 저도 응원이나 하려고요.”
“네?”
“내뱉는 숨조차 비싼 귀족 가의 도련님이 부랑자들의 거리에 금화가 가득 들어 있는 주머니를 들고 걸어가면 어떤 일이 생기는지…… 저는 아무것도 모르니까요.”
천연덕스러운 얼굴에 노래하듯 음률이 느껴지는 목소리. 율리아의 이야기에 맥스웰이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하.”
“후작가의 울타리 안에서 세상을 모른 채 사는 것보다, 몸은 조금 힘들지언정 길에서 제대로 된 세상 공부를 하면 훌륭한 귀족이 될 수 있을 거예요.”
그렇지, 바실리?
율리아는 잔혹한 호의와 순수한 악의를 가득 담아 웃었다.
* * *
레위시아의 제왕학 수업은 순조로웠다. 율리아는 가르치는 일에 소질이 있었고, 레위시아는 배우는 일에 소질이 있었다.
무엇보다 그가 권위적인 왕족이 아니라는 점이 가장 큰 도움이 되었다.
“율리아, 샤트린이 준 선물은 다 받았어?”
“네, 장난 아니던데요? 왕자님 덕에 저는 평민치곤 엄청난 부자가 되었어요. 이대로 은퇴해도 잘 먹고 잘살걸요.”
“은퇴라니, 누구 맘대로?”
“나중에요. 저도 언젠가는 왕궁에서 나가게 되지 않을까요?”
“내가 제국에 첩으로 팔려 가지 않게 된 뒤에 말해.”
레위시아가 우울하게 중얼거렸다. 그는 그렇게 될지도 모른다는 사실에 적잖은 충격을 받았는지, 요 며칠 거울 앞에 서서 자신의 아름다운 얼굴을 저주하기도 했다.
두 번째 경연이 끝난 뒤 왕궁엔 활기가 넘쳤다. 특히 샤트린의 궁이 난리였다. 손님이 너무 많아 공주와 약속을 잡으려면 며칠씩 기다려야 한다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
레위시아는 낮에는 본래의 일정을 소화하고, 밤이 되면 율리아와 코코에게 제왕학을 배웠다.
두툼한 책에 머리를 박고 중얼거리던 레위시아가 시계를 확인하고 한탄하며 말했다.
“벌써 자정이야.”
“시계 좀 그만 봐요. 공부 못하는 애들이 꼭 저러더라.”
“코코, 옛말에 싸우다가 정든다고 했어. 우린 이러다 가족이 될지도 몰라.”
“무슨 그런 끔찍한 소리를 하세요?”
“몇백 년 전만 해도 왕족이 죽으면 그 왕족을 모시던 시녀들이 함께 죽기도 했다잖아. 무덤에 함께 묻히거나, 혹은 죽은 뒤에 무덤을 지키면서 살기도 했다던데. 그게 가족이 아니면 뭐야.”
이번에는 율리아가 대답했다.
“연인이었겠죠. 주군으로 섬기면서 충성을 바쳤거나.”
“삭막하긴.”
레위시아가 빙글 펜을 돌리더니 펜 끝으로 율리아의 얼굴을 가리켰다.
“율리아, 솔직하게 말해 봐.”
“네.”
“내 시녀로 들어오면서 한 번도 상상해 본 적 없어? 왕자님과 사랑에 빠져서 동화처럼 영원히 행복하게 사는 결말.”
“네.”
율리아는 레위시아를 보지 않고 그냥 말했다. 그녀의 시선은 흔들림 없이 두꺼운 책에 고정되어 있었다.
“진짜 없어?”
레위시아는 어쩐지 실망한 기색이었다.
“없어요.”
“왜?”
집요하게 그 이유를 묻는 레위시아에게, 코코가 율리아 대신 대답해 주었다.
“율리아가 왕자님과 사랑에 빠지고 싶을 리도 없겠지만, 만약 그렇다 해도 두 사람이 동화처럼 영원히 행복하게 사는 결말은 아니었을걸요. 잘 아시는 분이 왜 그런 유치한 질문을 하세요?”
“혹시 모르잖아.”
책장을 넘기며 레위시아가 외워야 할 부분을 표시하던 율리아가 책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말했다.
“저는 사랑을 믿지 않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