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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화 (33/319)

31화

“왕족의 시녀가 되어서 그래? 이제 내가 필요 없어졌어? 솔직히 말해서, 내가 아니었다면 넌 그렇게 성공하지 못했을 거야.”

“그게 네 덕이라고?”

“그렇게 말하진 않았어.”

“재능도 없는 말장난하지 마. 넌 그냥 버거운 상황이 닥치면 그걸 헤쳐 나갈 용기도 의지도 없었던 실패자일 뿐이야.”

“하나만 묻자.”

바실리가 떨리는 눈을 들어 율리아를 바라보았다. 그는 제법 간절해 보였다.

“율리아, 날 사랑하긴 했어?”

“네가 보기엔 어떤 것 같은데?”

“날 이용한 거지? 내가 순진하니까, 날 유혹해서 돈을 얻어 내려고. 내 옆에 있으면 네가 그토록 원했던 귀족의 삶을 빼앗아 누릴 수 있으니까…… 그래서.”

“더 말해 봐.”

“아니, 미안해. 내가 미쳤었나 봐. 이런 말을 하려던 게 아닌데……. 율리아,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어. 돌아와. 난 아직 그대로야. 내겐 너 하나뿐이야.”

바실리는 혼란스러워했다. 이건 아마 그의 인생에 닥친, 상상조차 해 본 일 없는 엄청난 위기일 것이다.

그래, 나도 네 입장이 되어 봐야겠다. 이렇게 생각한 율리아가 바실리에게 한 걸음 가까이 다가갔다.

“샤트린 공주님이 너희 가문과 절연을 선언했어. 후작은 최선을 다해서 그걸 수습해야 했는데, 그보다 더 중요한 일을 처리하느라 왕궁에 얼굴조차 들이밀지 않았지.”

“아버지가? 왜?”

“바실리, 너는 아마 후작이 되지 못할 거야.”

잔인한 형벌이다. 미래가 정해져 있어 아무 걱정이 없었던 도련님을 삶의 전쟁터 한가운데에 버리는 꼴이었으니까.

“앞으론 크리스틴이 네 자리를 차지하겠지.”

“아니야.”

바실리는 아직 그 사실을 완전히 받아들이지 못한 것처럼 보였다.

그렇다면 이제 그를 동화 속 꿈나라에서 현실로 끌어내릴 시간이다. 자기가 천사인 줄 알고 살아온 괴물에게 거울을 보여 줄 것이다.

“넌 버려질 거야. 방계의 가신들처럼 평생 크리스틴에게 머리를 숙이고 그 애의 명령을 수행하면서 설설 기어야 해. 공주와의 결혼이 무산되었으니, 이번엔 다른 여자한테 팔리겠지. 그런 뒤엔 영원히 잊힐 거야.”

“아니야, 그럴 리가 없어!”

“그렇게 살아야 그나마 마조람으로 남을 수 있어. 정신 차려, 바실리.”

이건 충고였다. 적어도 율리아는 그렇게 생각했다.

“난 그렇게 살지 않아. 후작이 되지 못해도 상관없어! 하지만 그런 식으로 살지는 않을 거야. 난…… 난 아직 아무것도.”

아무것도 시도해 본 적이 없지. 내가 너라면, 새장을 벗어나려고 미친 듯이 날갯짓을 할 거야.

율리아의 눈에 날카로운 빛이 맴돌았다.

“율리아, 날 좀 꺼내 줘.”

바실리가 창살에 매달려 애원했다. 그의 손가락 마디가 하얗게 질려 있었다. 한동안 빛을 보지 못해 창백해진 얼굴에서 두려움과 간절함이 느껴졌다.

“여기 몰래 들어올 수 있었던 건 몰래 나갈 수도 있다는 뜻이지? 그래, 넌 영리하니까 어떻게든 방법을 찾았을 거고…… 율리아.”

“말해.”

“제발 날 꺼내 줘. 난 가문에서 도망칠 거야. 더는 아버지의 도구로 살지 않겠어. 그게 내 유일한 탈출구야.”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 너는 이 저택 밖에선 하루도 살 수 없어. 막말로 네가 돈을 벌어 본 적이 있어, 네 손으로 뭔갈 이뤄 본 적이 있어? 밖으로 나가자마자 울면서 집으로 돌아오게 될걸.”

“우습게 보지 마.”

“틀렸어. 우습게 안 봐. 하찮게 보는 거야.”

“너…… 그래, 알았어. 날 뭐라고 비난해도 괜찮아. 그냥 한 번만 도와줘. 날 여기서 꺼내 주면 다시는 네 앞에 나타나서 널 귀찮게 하지 않을 테니까.”

“정말이야?”

율리아가 기다렸다는 듯이 물었다. 마치 지금까지 그 말만을 기다린 사람처럼 반응이 빨랐다.

바실리가 상처받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다시는…….”

캄캄한 밤, 빠른 속도로 멀어지는 바실리의 뒷모습을 보면서 율리아가 가볍게 손을 털었다.

꼭 미뤄 왔던 청소를 마친 것 같은 모양새라, 그녀를 따라왔던 맥스웰이 헛웃음을 흘렸다.

“저 자식 저렇게 보내도 됩니까? 이틀 만에 돌아와서 시녀님이 탈출시켜 줬다고 고자질하는 거 아니에요?”

“상관없어요. 아니라고 잡아떼면 되니까. 그리고 그건 마조람 후작이 반성할 일이에요. 후작가의 지하 감옥이라는 게 아무나 드나들어도 되는 곳이란 소리거든요.”

“난 아무나가 아닌데.”

맥스웰이 어깨를 으쓱했다. 그의 능력이 아니었다면 불가능했을 일이란 걸 알기에, 율리아가 살짝 고개를 숙여 감사를 표했다.

“말도 안 되는 부탁 들어줘서 고마워요.”

“그럼 이거 바바슬로프한테 자랑해도 됩니까?”

“물론이에요.”

맥스웰이 씩 웃으며 팔을 내밀었다. 율리아는 아이처럼 웃으며 그에게 다가가 팔짱을 꼈다.

“근데 왜 안 죽이는 겁니까?”

맥스웰은 그게 정말 궁금했다. 죽이면 간단하게 해결될 일을, 이렇게 복잡하게 처리하는 그녀의 방식이 잘 이해되지 않았다.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고민하던 율리아가 노래하듯이 말했다.

“죽이는 건 너무 쉽잖아요. 복수는 공들여서 하는 주의라서요.”

“아…… 그런 거구나. 바실리가 시녀님처럼 살아 보길 바라시는군.”

이해가 빠른 사람은 이래서 참 좋다. 율리아가 기분 좋게 고개를 끄덕였다.

* * *

“샤트린을 지지합니다.”

레위시아가 그렇게 말한 순간, 소란스럽던 경연장이 시간이 멈춘 듯 고요해졌다.

샤트린과 국왕, 1왕자 모두 레위시아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2왕자, 지금 뭐라고 했느냐?”

국왕이 물었다.

레위시아는 율리아를 떠올렸다. 그를 이 자리까지 오게 만든 신통방통한 시녀. 만약 율리아가 여기 있었다면 구태여 설명하려 애쓰지 말고, 이렇게 말하라고 했을 것 같다.

“2왕자 레위시아는 왕위 후계자, 샤트린 오르테가를 지지하겠습니다.”

생일 선물을 가져오라고 했더니 빈손으로 나타나 이 한마디를 툭 던져 놓은 레위시아의 얼굴에 국왕의 시선이 아주 오랫동안 머물렀다.

“크리스틴 마조람 좀 보세요. 저러다 쓰러지겠는데요?”

코코가 즐거운 기색으로 말했다. 그녀의 말대로 레위시아의 지지 선언 이후, 크리스틴은 1왕자의 곁에서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무언가를 열심히 설명하고 있었다.

“좀…… 의외네.”

레위시아가 중얼거렸다.

국왕은 겉으로 드러내 놓고 기뻐하거나 말로 칭찬하지 않았다. 그는 그저 레위시아에게 잘 알았다고, 너의 결정을 존중한다고 말했을 뿐이었다.

하지만 이후 샤트린을 불러 뭐라고 말을 했는지, 공주가 환하게 밝은 얼굴을 하고 레위시아에게 다가왔다.

“난 네가 날 싫어하는 줄 알았는데, 레위시아.”

“좋아하진 않았지.”

“이제부턴 좋아해 줘. 나도 그러도록 노력할 테니까.”

“그게 그렇게 쉬워?”

“어려울 게 뭐 있어. 나의 적이 너의 적이잖아. 너도 그래서 날 택한 거잖아. 그 이유 하나만으로도 충분해.”

역시나. 샤트린은 뒤끝이 남부 해안만큼 긴 왕족이었다. 마조람이 싫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이토록 쉽게 마음을 바꾸다니.

레위시아가 떨떠름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레위시아? 우린 앞으로 사이좋은 남매가 될 텐데, 나만 선물을 받을 수는 없지. 원하는 게 있으면 말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뭐든 들어줄게.”

너한테 원하는 건 아무것도 없다고, 오늘은 불편하니까 이만 꺼져 달라고 말하고 싶었던 레위시아가 또 율리아를 떠올렸다.

퉁퉁 부은 뺨에 터진 입술을 하고도 화 한 번 내지 않던 고요한 얼굴.

그러고 보니 레위시아는 샤트린에게 원하는 게 있었다.

“내 시녀한테 사과해.”

“뭐?”

“네가 내 궁에 쳐들어와서 두 번이나 때린 시녀 말이야.”

샤트린이 의외라는 얼굴로 레위시아를 보았다.

“그 평민? 아끼는 애야?”

“그래.”

“알았어. 사과할게.”

샤트린은 망설이지도 않았다.

“그건 내 잘못이었어. 그 시녀는 아무 잘못이 없었는데, 내가 눈이 뒤집혔지. 때려 놓고 말로 사과하는 것도 웃기니까 선물을 좀 하는 게 좋겠지?”

샤트린이 손짓하자, 그녀를 따르던 시녀들이 다가와 귀를 기울였다.

“레위시아의 궁에 있는 평민 시녀 있잖아. 걔한테 선물 좀 보내 줘. 아주 휘황찬란한 것들로. 나한테 맞았다는 걸 잊어버릴 수 있을 만큼.”

“네, 전하.”

직접 찾아와서 사과하라는 말이었는데 샤트린은 그걸 값비싼 선물로 대체해 버렸다. 레위시아는 그 사실까지 지적하고 싶었지만, 코코가 자그맣게 고개를 젓자 어렵게 말을 삼켰다.

“고마워, 레위시아.”

샤트린이 마지막으로 웃으며 말했다.

“넌 싸우는 게 두려운 모양이지만, 난 그렇지 않아. 날 선택한 걸 후회하지 않게 해 줄게.”

“부디 그래 줘.”

그 말이 샤트린의 귓가에 닿았는지는 확실하지 않았다. 주위를 맴돌던 귀족들이 한꺼번에 몰려와 샤트린에게 축하 인사를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바실리 마조람의 일방적인 파혼 선언으로 바닥까지 떨어졌던 샤트린의 명예는, 레위시아의 지지 선언 덕에 본래보다 더 높은 위치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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