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화
처음엔 장난이었다. 그가 말했던 대로, 바실리 마조람의 우스운 꼬락서니를 몇 번 구경한 뒤엔 금화나 두둑하게 쥐여 주고 내쫓을 생각이었다.
브레웨 훈장을 손에 쥐고 왕족을 협박하다니. 그렇게 많은 사람 앞에서 율리아의 소원을 이뤄 주지 않았다가는 왕족으로서 그의 체면이 손상되었으리라.
그렇게 장난삼아 들인 평민 시녀가 그의 일상을 조곤조곤 뒤흔들더니, 아주 산산조각을 내다 못해 새로운 세상에 가져다 놓았다.
율리아는 아마 상상도 하지 못했을 것이다. 레위시아 오르테가에게 왕위 후계자의 자격을 묻는 사람이 생겼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레위시아 자신조차 영원히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 거라 단정 짓고 살아왔는데.
“전하, 열두 살에 제왕학을 때려치우셨다면서요?”
“다 커서 이런 식으로 잔소리를 듣게 될 줄은 몰랐는데.”
“열두 살이면 시작하자마자 때려치우셨다는 말인데, 왜 그러셨어요.”
“코코가 일렀어?”
레위시아가 억울하다는 얼굴로 코코를 노려보았다. 코코는 재밌어 죽겠다는 얼굴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율리아가 한숨을 내쉬더니 다시 말했다.
“꼭 왕이 되셔야 한다는 말은 아니었어요. 저희가 전하께 원하는 것도 그런 건 아니에요.”
“지금 날 갖고 노는 거야? 제왕학을 때려치웠다고 혼내고 있으면서 왕이 되지 말라니?”
“되지 말라는 말도 아니고요.”
어쩌라는 거야. 레위시아가 예쁜 얼굴을 구기며 일어섰다. 잔소리는 듣고 싶지 않으니 밖으로 나갈 생각이었다.
그때 율리아가 그의 발목을 잡았다.
“왕위 후보가 되어야 전하께서 살 수 있으니까 하는 말입니다.”
“……뭐?”
“후계자도 아닌 애첩의 아들, 심지어 전하는 이렇게 젊고 아름다우시죠. 제가 만약 마조람 후작이라면 국왕 전하를 움직여서 왕자 전하를 제물 삼아 혼인 외교를 추진할 겁니다.”
레위시아가 충격받은 얼굴로 걸음을 멈췄다. 그는 그런 생각은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었다.
오르테가의 주변엔 혼인 외교를 할 만한 이웃이 없었다. 좁은 반도 모양의 이 나라와 닿아 있는 이웃이라곤 바이칸 제국뿐인데, 그곳의 황제는 혼인 외교 따위를 받아 줄 상대가 아니었다.
“난 남자야.”
“그래서 하는 말이에요.”
“뭐?”
“바이칸의 황실에선 황후나 황비도 첩을 들일 수 있거든요.”
율리아의 입에서 나오는 잔인한 이야기에 레위시아의 얼굴이 종잇장처럼 창백해졌다. 그는 다시 의자에 앉아 눈동자를 데굴데굴 굴렸다.
“바이칸에 황비가…… 둘이던가? 아, 하나가 죽었지. 그럼 하나네? 황후는 늙었으니까 이제 와 첩을 들이진 않을 것 같고.”
“그냥 하나의 가능성을 이야기한 거예요. 너무 심각하게 생각하지 마세요.”
“어떻게 그래! 내가 제국에 팔려 가게 생겼는데!”
“왕위 후보가 되면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아요. 전하를 지지하는 세력이 있는 이상 마조람 후작은 신중해질 거고, 국왕께선 저울질을 시작할 테니까.”
“어떤 애새끼가 제일 고분고분하려나, 그런 저울질?”
“비슷해요.”
살아남으려면 권력을 쥐어야 한다. 왕궁이란 그런 곳이었다. 이 안에서 아무것도 안 하고 평화롭게 사는 건 불가능하다. 그런 삶을 살고 싶다면 성인이 되기 전에 아주 먼 곳으로 도망쳤어야 했다.
“샤트린을 지지하라며.”
“일시적인 궁여지책이죠.”
레위시아는 율리아의 말을 이해했다. 전적으로 옳다고도 생각했다.
“그래도 이 나이에 제왕학을 다시 배우는 건 너무…….”
“국왕께 스승을 청하지는 않을 거예요. 잘 배우고 똑똑하다는 건 어린 시절에나 주목받는 거지, 전하는 이미 성인이니까.”
“그럼 어떡하라고?”
“제가 가르쳐 드릴게요.”
율리아가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레위시아는 못 들을 말을 들었다는 얼굴이었는데, 한참 동안 입술만 달싹이다가 이내 긴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브레웨 훈장의 주인이었지.”
“제왕학에 대한 금지가 풀려서 다행이지 뭐예요. 제가 아카데미에서 그걸 배우지 못했으면 어쩔 뻔했어요.”
레위시아는 율리아에게 가르침을 받아야 한다는 사실보다, 코코가 구석에서 자꾸만 못된 고양이처럼 웃고 있다는 사실이 더 거슬렸다.
“코코, 웃지 마.”
“싫은데요?”
“제발.”
“싫어요.”
레위시아가 화난 얼굴로 코코에게 나가라고 손가락질하자, 율리아가 그 손가락을 살며시 잡아 내리며 말했다.
“코코 시녀님도 함께 가르쳐 드릴 거예요. 저는 학문적으로 접근할 줄만 알지, 왕실의 역사에 빗대어 설명하는 건 코코 시녀님이 훨씬 더 잘하실 테니까요.”
코코가 사악한 미소를 지었다.
* * *
두 번째 경연 일이 되었다.
율리아는 궁내부 안에 심어 놓은 첩자로부터 이번 경연에 국왕이 직접 행차할 거라는 사실을 전해 들었다. 다들 왕의 생일을 빙자한 경연이니 당연하다고 말했지만, 율리아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왕은 샤트린의 기를 세워 주기 위해 나타날 것이다.
“다녀오세요.”
이번엔 율리아 대신 코코가 따라가기로 했다. 레위시아가 샤트린을 지지하겠다고 선언하는 날이니만큼, 눈에 띄는 자리를 피하려는 마음이었다.
“널 때린 애한테 왕이 되라고 말해야 한다니…… 벌써 기분 나빠.”
레위시아가 우울하게 중얼거리며 궁을 나섰다. 율리아는 별걸 다 신경 쓴다며 그를 달랬다.
두 사람이 왕자궁을 떠나고, 율리아는 서둘러서 외출 준비를 했다. 레위시아와 코코가 샤트린을 이용해 경연장을 뒤흔드는 동안 그녀에게는 따로 할 일이 있었다.
‘마조람 후작이 당분간 정신을 차리지 못하게 해야 해.’
비자금 경로가 뒤집힌 것도 모자라 후계자가 손쓸 수 없이 망가져 버린다면, 후작은 당분간 왕궁 안에서 일어나는 일에 신경을 쓸 수 없게 된다.
“어서 오십쇼!”
미리 대기하고 있던 마차에서 맥스웰이 손을 흔들었다.
“자, 그럼 적의 아가리 속으로 한번 들어가 보실까요?”
“진짜 가능한 거죠?”
“이 맥스웰이 지난 10년간 오르테가에서 제일 열심히 한 게 뭔지 아십니까? 바로 권력자들의 집에 몰래 들락거리는 거예요.”
“마조람 저택은 경비가 삼엄해요.”
“그런 곳일수록 취약한 부분이 있죠.”
맥스웰이 호언장담했다.
“바이칸의 성들은 성탑, 성문, 성벽으로 겹겹이 싸여 있거든요. 오르테가는 거의 울타리 수준이던데? 나라가 평화로워서 그런가, 개방적이라서 그런가.”
“건물을 높게 올리는 것보다 넓은 부지를 갖는 걸 더 선호하는 풍습이 있어요.”
“그래요? 아무튼, 마조람 저택도 들어갈 수는 있습니다. 특히 지하 감옥이라면 그중에서 제일 쉽죠. 경비 중에서도 말단이 가는 데예요. 거기가.”
그가 호언장담한 대로 율리아는 얼마 지나지 않아 마조람의 지하 감옥에 들어갈 수 있었다.
금화를 두둑하게 받은 두 명의 경비병이 갑옷을 벗어 놓고 슬그머니 사라졌다. 율리아와 맥스웰은 그 갑옷을 입고 투구로 얼굴을 가렸다.
“가실까요.”
“좋아요.”
율리아가 그를 따라 걸었다.
바실리는 넓고 쾌적한 감옥에 갇혀 있었다. 집사가 넣어 줬는지, 푹신한 침대와 식탁도 있었다.
율리아는 그 안에서 세상 모든 고뇌를 다 끌어안은 사람처럼 누워 있는 그를 발견했다.
“바실리.”
율리아가 투구를 벗었다.
“……율리아?”
네가 어떻게 여기에 있어. 바실리는 딱 그런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 멍청한 얼굴을 구경하고 있으려니 웃음을 참기가 어려웠다.
율리아가 저도 모르게 가벼운 웃음을 터뜨리자, 바실리가 마치 어둠 속에서 희망을 발견한 사람처럼 가까이 다가와 쇠창살을 부여잡았다.
“율리아, 너무 보고 싶었어.”
“넌 정말 여전히 이기적이구나. 사람의 눈이란 게 꼭 눈앞에 있는 걸 있는 그대로 보기만 하라고 달린 게 아닐 텐데.”
“뭐?”
“눈으로 보고 귀로 들은 것들을 바탕으로 생각이라는 걸 하라고 있는 거야. 특히 너처럼 권력이란 걸 손아귀에 쥐고 태어났으면, 항상 생각이란 걸 해야 해.”
“율리아, 여기까지 와서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다른 사람의 처지에서 생각하라.’”
율리아가 웃음기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타이르는 것 같기도 하고, 조롱하는 것 같기도 한 말투였다.
바실리의 눈동자가 조금씩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는 율리아의 미소가 과거와는 너무 다르다는 걸 이제야 알았다.
“이거 아주 어릴 때 배우는 거잖아. 도덕, 윤리, 바른 사람 되기. 아, 예절 시간에도 나오는구나. 너는 후작가의 도련님이니까 귀족에게 주어지는 도덕적 의무라고 배웠을까?”
“네가 무슨 말을 하려고 하는 건지 모르겠어. 율리아, 너 때문에 난 이런 꼴이 되었는데…….”
“네가 만약.”
율리아의 얼굴에서 한순간 미소가 사라졌다.
“나였다면, 하고 생각해 보라고. 처음 만났을 때부터 지금까지 쭉, 머리라는 게 달려 있다면 한번 생각해 보라고. 너와 내 입장이 반대였으면 어땠을까. 생각, 그걸 좀 해 보라고!”
“너…… 왜 그래?”
“내 마음에 공감해 주는 건 바라지도 않아. 그런 건 포기한 지 오래돼서. 그래도 바실리, 최소한 이해는 해야 할 거 아냐. 내가 왜 이러는지, 왜 이렇게 변했는지.”
이렇게 말해 봐야 소용없다는 건 알고 있다. 사람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 특히 바실리처럼 시야가 좁고 이기적인 사람은 더더욱.
“그러는 너는…… 뭐가 그렇게 억울한데?”
이것 보라. 바실리는 결국 율리아를 탓했다.
“우리 가문의 후원을 받은 덕에 하고 싶었던 공부도 했고, 편하게 살았잖아. 크리스틴은 어릴 때 널 친구라고 생각했던 적도 있었어. 나도 그랬고!”
이게 아주 꼴값을 떨고 있네?
율리아는 그렇게 말하려다가 그가 뭐라고 지껄여 대는지 더 지켜볼 생각에 가만히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