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화
6. 물거품처럼 사라질 거예요
제국군 남부 함대와의 연락이 모두 끊기고, 해적들이 바다 위에서 사라졌다.
처음엔 무슨 일인지 몰라 혼란스러워하던 오르테가의 귀족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 남부 함대 사령관이 비리를 저질러 비밀리에 제국으로 송환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마조람 후작은 당황하고, 분노했으며, 이내 몹시 불안해졌다.
그는 샤트린과 바실리 문제를 해결하라며 재촉하는 국왕의 부름에도 응답하지 않은 채 집무실에 틀어박혀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다.
보이지 않는 적이 그의 그림자 속에 숨어 칼을 갈고 있는 기분이었다.
후작은 그동안 모아 두었던 장부를 비밀 금고에 꼭꼭 감추었다. 그리고 그가 적들과 내통하고 있었다는 증거를 없애기 시작했다. 의심 많고 조심스러운 그다운 결정이었다.
비자금 돈줄이 끊기는 건 피를 토할 만큼 아까웠지만, 어쩐지 그래야 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비밀리에 후작의 수족 노릇을 하던 몇 명의 부하가 입막음을 위해 죽었다. 돈세탁을 거들었던 가신 가문 중 한 곳은 아예 국외로 쫓겨나게 되었다.
그 일을 해결하느라 마조람 후작은 한동안 왕궁 출입을 자제하며 몸을 낮추었다.
그사이, 율리아는 코코의 조언과 맥스웰의 도움으로 왕궁 여기저기에 사람을 심는 데 성공했다.
첫 경연이 지난 후 샤트린 공주의 파혼 때문에 좋지 않은 분위기였던 왕궁에 두 번째 경연 소식이 전해졌다. 한동안 왕궁에 올 일이 없었던 젊은 귀족들에겐 희소식이었다.
율리아는 두 번째 경연이 무엇인지 레위시아에게 미리 알려 주지 않을 생각이었다. 그가 자신을 수상하게 여겨 봤자 좋을 게 없었으니까.
그런데 어느 날 레위시아가 떨떠름한 얼굴을 하고 궁으로 돌아와 율리아와 코코를 불러다 놓고 말했다.
“다가오는 부왕의 생일을 기념하여 가장 마음에 드는 선물을 가져오는 자를 승자로 삼을 거래.”
코코가 그게 무슨 미친 소리냐고 물었다. 왕궁 경연이 애들 장난도 아니고, 국왕의 기분이나 친분에 의해 좌우될 게 뻔한 그런 시험을 누가 내겠느냐는 것이다.
레위시아도 코코와 같은 생각이었다.
“그런데 이걸 말해 준 놈의 누이가 왕비의 시녀거든.”
“믿을 만한 정보라는 거예요?”
“미리 생각해 봐서 나쁠 거 없잖아. 왕궁 경연에 진심으로 임하라며.”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이상하잖아요. 어차피 크리스틴 마조람이나 1왕자가 뭘 가져다줘도 왕은 그걸 고를 거예요. 똥을 싸서 갖다 줘도 건강해서 좋다고 할걸요.”
“나도 그렇게 생각하긴 하는데…… 더러워 죽겠네.”
그러나 여기엔 한 가지 걸리는 점이 있었다. 레위시아와 코코뿐만 아니라, 경연에 참여하는 모든 사람이 똑같을 것이다.
왕의 의중이 무엇인지 모르겠다.
“율리아, 네 생각은 어때?”
레위시아가 이번에는 율리아에게 물었다. 그녀는 아까부터 말없이 혼자 고심에 빠져 있었다.
“사실일 거예요.”
“뭐? 왜?”
“그리고 진짜 선물을 받을 사람은 국왕이 아닐 거고요.”
본래 이전의 삶에서 두 번째 경연은 승마대회였다.
단순히 말을 타고 빨리 달리는 게 목적인 대회가 아니라, 장애물과 규칙을 정해 놓고 누가 말과 가장 가까이 교감하며 기술적인 승마를 잘하는지 겨루는 대회였다.
그건 샤트린 공주를 위한 경연이었다. 승마의 달인이었던 공주가 바실리와의 결혼을 앞두고 우울해하자 그런 딸을 달래기 위해 왕이 억지로 끼워 넣은 거였다.
한데 이번엔 공주가 우울해하는 정도가 아니라, 파혼하고 마조람과의 절연을 선언하기까지 했다. 후작이 바실리를 지하에 감금했어도 공주의 기분은 풀리지 않았을 것이다.
“샤트린 공주를 위한 거구나.”
앞뒤 정황을 깨달은 코코가 비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마조람 후작에게 공주의 기분을 풀어 주라고 압박을 넣을 수가 없으니까, 경연을 이용하려는 거야. 웃기고 영리한 방법이네.”
“그렇구나. 샤트린은 경연을 좋아하니까.”
왕에게 바치는 생일 선물처럼 보이되, 샤트린 공주의 명예를 회복시켜 주는 선물이어야만 한다니.
어려웠다. 레위시아가 끄응 신음을 흘리며 테이블 위에 엎드렸다. 그로선 정답이 뭔지 알 수가 없었다.
코코와 율리아는 레위시아 왕자가 충분히 고민하도록 시간을 주다가, 뒤늦게 입을 열었다.
시작은 코코였다.
“둘 중 하나일 거예요.”
“뭐가?”
“샤트린 공주가 좋아하는 걸 왕에게 선물하거나, 샤트린 공주에게 청혼하거나.”
“뭐? 그게…… 뭐? 진짜?”
레위시아는 코코의 말을 듣고 더 큰 혼란에 빠졌다.
“부왕을 통해 샤트린에게 뇌물을 주거나…… 청혼을 해서 명예를 회복시킨다고? 진짜 그렇게 유치한 짓을 한다고?”
“바실리 마조람에게 차였잖아요. 둘 중 하나는 해야죠. 뇌물로 공주의 권력이 공고함을 알리거나, 청혼으로 공주의 매력이 공고함을 알리거나.”
물론 그게 진짜 결혼으로 이어지지는 않을 것이다. 이건 그냥 서로에게 기분 좋은 사교적 속임수에 불과하다.
“나는 어느 쪽도 할 수 없잖아. 혈육에게 뇌물을 줄 수도 없고, 걔한테 청혼할 수도 없고.”
“그러니까 빨리 더 좋은 방법을 생각해 내세요. 그동안 공부한 건 다 얻다 팔아먹었어요?”
“이게 공부랑 무슨 상관이야?”
토닥거리며 다투던 두 사람이 자연스럽게 율리아를 바라보았다. 어차피 저 신통방통한 시녀에게 정답이 있을 테니, 두 사람이 계속 싸우는 건 무의미한 짓이었다.
“전하.”
율리아가 레위시아 앞에 서서 두 손을 모았다. 그녀의 눈동자가 진하게 가라앉았다.
레위시아가 떨떠름한 얼굴로 물었다.
“왜 이래. 무슨 말을 하려고?”
“화내지 말고 들어 주세요.”
“와, 불안한데.”
“국왕 전하 앞에서 샤트린 공주님을 지지하세요.”
레위시아는 대답하지 않았다.
늘 짓궂은 미소를 짓던 왕자의 얼굴에서 감정이 사라졌다. 그는 너무 당황한 나머지 어떻게 반응해야 하는지를 잊어버린 사람 같았다.
“샤트린을 지지해?”
레위시아가 되물었다. 이게 지금 무슨 소리냐며, 침묵하는 코코를 원망하듯 바라보기도 했다.
코코는 레위시아의 편을 들어주지 않았다.
“하……. 설명 좀.”
레위시아의 한숨이 깊었다. 그는 머리가 아프다며 일어나 창문을 열었다.
율리아가 그에게 찬물을 한 컵 가져다주며 말했다.
“지금 샤트린 공주님이 가장 원하는 게 뭘까요.”
“바실리의 모가지?”
“마조람을 엿 먹이는 거예요.”
단순한 문제였다. 사람들은 국왕의 심중을 파악하고 싶어서 애를 쓰겠지만, 율리아가 보기에 이건 간단하다 못해 단순한 문제였다.
“권력을 혐오해 방랑객처럼 살았던 전하께서 별안간 공주님을 지지한다고 하면 국왕께서 어떻게 생각하실까요.”
“미친놈인가, 하겠지.”
율리아가 살짝 웃었다.
“후계 구도가 흔들릴 거예요.”
“부왕께서 그걸 바란다고?”
“1왕자는 마조람이 드러내 놓고 지원하는 후계자예요. 그래서 지금껏 경쟁자가 없었어요. 마조람과 절연을 선언한 샤트린 전하께서 2왕자 전하의 지지를 등에 업고 이 싸움판에서 한 걸음 앞으로 걸어 나온다면.”
“마조람 후작이 밤잠 좀 설치겠구나.”
“국왕께선 기뻐하실 겁니다.”
레위시아는 다른 건 몰라도 그건 아니라고 생각했다. 왕가와 마조람의 관계는 단단하고도 복잡해서, 서로의 심장을 움켜쥔 부부와도 같았다.
하지만 그가 간과하고 있는 게 하나 있었으니, 최근 마조람 후작이 왕의 부름을 계속 거절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샤트린 공주님의 일로 국왕 전하의 심기가 어지러워요. 그런 와중에 레위시아 전하께서 마조람의 적은 나의 친구라며 샤트린 공주님의 손을 잡아 준다면, 국왕께선 아무도 없는 곳에서 혼자 손뼉 치며 좋아하실걸요.”
“……그렇구나. 게다가 아무도 의심 안 하겠지. 나는 옛날부터 마조람을 경멸해 왔으니까.”
“경연에서 승리하실 필요는 없어요. 하지만 전하는 왕의 사랑받는 딸이라는 대단한 아군을 하나 얻게 되실 거예요.”
레위시아는 마음이 복잡하다고 중얼거렸다. 샤트린을 지지하다니, 꿈에서도 해 본 적 없는 일이었다. 그들은 멱살 잡고 싸운 적은 없어도, 평생 데면데면했던 사이였다.
“그러다 진짜 샤트린이 왕이 되면 어떡해? 마조람은 내란을 일으키고도 남을 인사야.”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 거예요.”
율리아가 부드럽게 웃으며 찬물이 담긴 컵을 왕자에게 밀어 주었다.
“왕은 전하께서 해도 되잖아요.”
자연스럽게 컵을 들어 물을 마시려던 레위시아가 그걸 내팽개치더니 율리아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그러곤 코코에게 소리쳤다.
“엄마! 얘가 날 죽이려고 해!”
이날 코코가 드디어 육성으로 욕을 했다.
레위시아는 염세적인 사람이었다. 코코는 왕자를 철부지 어린애라고 말했지만, 사실 그는 철이 너무 빨리 들어서 문제인 편에 속했다.
어머니의 사랑만이 삶의 전부였던 어린 시절이 지나간 뒤, 레위시아는 이 세상 모든 인간은 다 이기적이고 가식적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특히 높은 자리에 앉아 있는 사람일수록 남에게 보이기 위한 삶을 산다고 믿었다. 그런 사람에게 진심이나 사랑, 희생 같은 건 존재하지 않았다.
그는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고 아무에게도 기대지 않으면서 살았다.
코코를 가족처럼 여기지만 그녀에게도 언제든 마음대로 집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자유를 주었다. 시녀를 더 들이지 않았던 이유도 그것이었다.
이 빌어먹도록 외로운 왕궁 안에서 가까운 사람을 만들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그런데 율리아 아르테가 나타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