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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화 (30/319)

28화

며칠 사이 웃음을 잃고 핼쑥해진 얼굴로 궁을 오가는 레위시아를 보며, 율리아와 코코가 대화를 나누었다.

“하이에나가 배후를 불지 않고 죽었어. 하녀는 의뢰인이 누군지도 모르더라고. 마조람 후작의 짓인 걸 모두가 아는데, 그걸 증명할 방법이 없어.”

“이렇게 될 줄 알고 있었잖아요.”

코코가 짜증을 내며 말했다.

“마조람 후작이 그렇게 쉽게 낚일 물고기가 아니라는 건 알겠어. 그래도 이런 짓을 저질렀는데 그 밑에서 후작의 명령을 수행하는 팔다리 하나쯤은 잘라 낼 수 있어야 정상 아니야?”

“잘라 낼 거예요.”

“어떻게?”

율리아가 창가에 서서 목소리를 낮추었다.

“늑대가 마조람의 꼬리를 물었거든요.”

습격이 있던 날, 율리아는 왕자궁 정원에서 두 명의 하이에나를 죽이고 사라진 게 카루스의 부하인 맥스웰이라는 걸 알았다.

그리고 맥스웰이 바깥에서 자신을 지켜 주고 있었다는 건, 카루스가 남부 함대를 장악하고 사령관과 비자금을 모두 손에 넣었다는 걸 뜻했다.

‘역시 대단한 남자야.’

조만간 남부 함대의 사령관이 바뀔 것이다. 무혈 제독은 호락호락한 상대가 아니다. 해적들은 달아나 몸을 사리게 될 테고, 마조람은 가장 큰 돈줄을 잃게 되리라.

해적들은 마조람 후작가의 가장 큰 비자금 경로였다. 그 돈줄이 끊어지고 나면, 마조람의 창고는 구멍 뚫린 배처럼 천천히 가라앉게 될 것이다.

율리아가 노린 건 바로 이것이었다.

* * *

남부 함대의 사령관은 바이칸에서 오르테가로 파견된 지 10년이 넘은 자였다. 곧 은퇴할 나이가 되어 돈다발을 싸 들고 조국으로 돌아갈 생각에 잔뜩 들떠 있던 그는, 어느 날 바다 위에서 악마를 만났다.

무혈 제독 카루스 란케아.

그가 군함 하나를 통째로 장악하고 사령관에게 선전포고를 해 왔다.

도대체 어떻게 알았는지 묻고 싶었다. 애인이 배신한 건지, 아니면 붙잡혀 있는지. 하지만 카루스는 사령관에게 변명할 기회를 주지 않았다.

무혈 제독과 리바이어던 기사단이 그들을 벌하러 왔다는 말에, 남부 해군 전체가 술렁였다.

그들 중 대부분은 카루스와 싸우고 싶지 않아 했다. 카루스의 뒤에는 그를 신임하는 황제가 있었기 때문이다. 사령관의 기함을 제외한 모든 군함이 자발적으로 머리를 숙였다.

사령관은 끝까지 싸웠으나 무참히 패했다. 카루스는 부하들을 시켜 그를 제국까지 호송케 했다. 나머지는 즉결 처분했기에, 바다 위에 비명이 마를 날이 없었다.

“율리아.”

함대를 장악하고 육지로 돌아온 그가 가장 먼저 한 일은 맥스웰을 시켜 율리아를 데려오게 하는 것이었다.

“오랜만이에요. 카루스 님.”

마차에서 내린 율리아가 그를 보고 살짝 웃었다. 안 본 새 부쩍 얼굴이 좋아진 그녀는 백합처럼 우아한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습격을 받았다면서.”

“보시다시피 멀쩡해요. 맥스웰이 지켜 줬거든요.”

맥스웰은 자기가 지키고 있을 필요도 없었다면서 혀를 찼지만, 율리아는 그냥 그렇게 말했다.

“들어가자.”

카루스가 율리아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게 너무 자연스러워서 율리아는 저도 모르게 그의 손을 잡고 여관 계단을 올랐다.

“그동안 잘 지내셨어요? 오는 동안 맥스웰이 대충 얘기해 주긴 했는데, 다치진 않으셨죠? 바바슬로프는 괜찮나요?”

“너나 걱정해.”

카루스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바실리 마조람과 샤트린 공주에 관한 이야기는 잘 들었다. 왕궁에 들어가서 도대체 뭘 하려나 했더니, 아주 대담한 짓을 벌였더군.”

“무슨 말씀이세요. 저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어요.”

율리아가 뭉근하게 웃었다. 카루스는 그런 그녀의 얼굴을 슬쩍 훔쳐보곤 눈을 가늘게 떴다.

“식사는?”

“했어요.”

“보내 준 돈은 잘 받았나? 필요하면 더 요청해. 네 덕에 나는 아주 큰 부자가 되었으니까.”

“그럴 필요 없을 거예요.”

그들은 아무도 없는 여관 꼭대기 귀빈실로 들어가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마주 앉았다. 밖에서 맥스웰이 문을 지켰다.

율리아는 카루스에게 차를 내려 주려 했지만, 그가 거절했다.

“율리아, 원하는 게 있으면 말해. 오르테가를 떠나기 전에 이루어 주고 갈 테니.”

“네?”

“죽이고 싶은 사람이 있다면 죽여 주마. 복수를 끝내고 제국으로 따라와도 좋다. 난 널 귀족으로 만들어 줄 수도 있어.”

달콤한 제안이었다. 율리아가 어깨를 늘어뜨리며 젖은 한숨을 흘렸다. 오래전의 삶에서, 조금 더 일찍 그와 손을 잡았더라면 좋았을걸. 그러면 이렇게 미치기 전에 사람답게 살아볼 수도 있었을 텐데.

“카루스 님, 제가 원하는 건 모두 오르테가에 있어요.”

그러니까 나는 당신을 따라갈 수 없다. 완곡한 거절의 말이 꼭 벽을 세우는 것처럼 들렸다. 카루스는 율리아를 앞에 앉혀 놓고 그녀에 대해서 생각했다.

“넌 성공할 거다.”

한참 말이 없던 그가 불쑥 말을 꺼냈다. 율리아는 뜻밖의 칭찬을 들은 아이처럼 웃었다.

“고맙습니다.”

“언젠가 마조람을 무너뜨리고 나면, 그 뒤에는 어떻게 할 생각인지 물어보고 싶은데.”

“카루스 님.”

“함께 죽는다거나 흔적도 없이 사라질 거라고는 말하지 마. 복수에 성공한 자들이 꼭 그렇게 되리란 법은 없으니까.”

“제가 진짜 성공할 거라고 믿고 계시네요.”

그럼 거짓인 줄 알았냐고, 카루스가 건조하게 되물었다. 율리아는 빙긋이 한 번 웃고, 부드럽게 말을 돌렸다.

“이제부터 어떻게 하실 생각이세요?”

그가 언짢게 여긴대도 어쩔 수 없었다. 복수가 끝난 뒤의 일에 대해선 말하고 싶지 않았다. 율리아는 카루스가 혹시 화를 내진 않을까 염려하며 그를 바라보았다.

그런데 카루스가 웃었다.

주의 깊게 관찰하지 않으면 감정을 읽을 수 없을 만큼 표정이 없는 얼굴이라, 그가 웃으니 저도 모르게 시선을 빼앗기게 되었다.

지독하게 매력적이면서 차갑기 그지없는 웃음이었다.

“제국으로 돌아가야겠지.”

그가 말했다.

지금은 남부 함대의 사령관이 공석이라 임시로 남아 있지만, 곧 황제로부터 귀환 명령이 내려올 것이다. 카루스는 그가 조만간 제국으로 돌아가게 될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과연 그렇게 될까.

율리아는 새어 나오려는 말을 가볍게 삼켰다. 그는 제국으로 돌아가지 못한다. 황제는 그에게 귀환 명령을 내리지 않을 것이다.

이 모든 걸 미리 알려 줄 수도 있었다. 하지만 율리아는 현명하게 입을 다물었다. 그녀는 말해 줘도 되는 일과 꼭 말해 줘야 하는 일, 그리고 말해 주지 말아야 하는 일을 구분해야 했다.

“우리가 다시 만나는 일은 없을 거다. 내 함대와 기사단은 남부와는 먼 곳에 있어서.”

카루스의 목소리가 두 사람 사이에 낮게 깔렸다.

“……그렇군요.”

율리아는 그가 자신을 관찰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 채, 다시 말을 돌렸다.

“그럼 맥스웰을 좀 빌려주실래요? 왕궁에 사람을 심고 싶은데, 직접 움직일 수는 없어서요.”

카루스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얼마든지 갖다 써라.”

대화는 거기서 끊어져 더 이어지지 않았다. 두 사람 모두 각자의 생각에 빠져 있었기 때문이다. 율리아는 궁내부에 어떻게 사람을 심을지 고민하고 있었고, 카루스는 율리아의 속내를 파악하려 애쓰고 있었다.

“율리아!”

그때 율리아가 왔다는 소식을 뒤늦게 접한 바바슬로프가 여관 꼭대기까지 요란하게 뛰어 올라왔다.

그는 맥스웰을 힘으로 밀어낸 뒤에 카루스에게 들어가도 되냐고 묻지도 않고, 곧장 율리아에게 달려와 그녀를 번쩍 들어 올렸다.

“우리 복덩이!”

“또 그 이상한 소리를.”

율리아가 웃음을 터뜨렸다. 유리 종처럼 맑은 웃음이었다.

카루스는 살짝 벌렸던 입을 다물고 그녀의 얼굴을 무심히 바라보았다.

율리아 아르테는 단순히 복수에 미친 여자에 불과한가.

카루스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율리아의 목표가 마조람을 응징하는 것일지는 몰라도, 그녀의 영향력은 단순히 개인적인 복수에 국한되지 않을 것이다.

카루스의 머릿속에서 율리아가 했던 말들이 맞춰지지 않은 퍼즐처럼 돌아다녔다.

남부 함대 사령관의 신병을 확보하기만 해도 황제에겐 충분할 거라던, 결과를 받아 보면 알게 될 거라던 말.

저 여자는 그에 대해 무언가를 알고 있다. 그리고 그걸 자신에게 말해 주지 않으려 한다.

이대로 헤어져 영원히 만나지 않게 될 거라는 말은 일부러 흘린 것이었다. 바바슬로프와 제법 가깝게 지내는 것 같았으니, 조금이라도 서운함을 내비치려나 싶어서.

하지만 율리아는 인형처럼 무표정한 얼굴로 다른 고민에 빠져 있었다.

“어이, 복덩이. 저녁 먹고 갈 거지? 이 여관 주방장이 조개구이를 끝내주게 하는데, 나랑 한잔하고 가야지!”

“왕궁 시녀가 밖에서 술에 취해서 들어가면 그거 진짜 가관 아녜요?”

“그러면 안 되는 거야? 시녀는 술도 못 먹어?”

“제 술버릇이 고약하다는 말이었는데요.”

“나도 그래! 우리 둘이 의외의 공통점이 있네?”

바바슬로프가 으하하 웃자, 율리아가 그를 따라 웃었다.

슬프고 불행한 삶을 선택한 주제에, 왜 저렇게 웃는 건가.

카루스가 눈살을 찌푸렸다. 그는 율리아의 웃음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왠지 거슬렸다.

꼭 여름밤 한 철 동안 숨어서 빛을 내다 죽어 버리는 반딧불이 같아서.

가까이 들여다볼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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