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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화 (29/319)

27화

왕족의 궁에 암살자를 들이는 건 쉽지 않은 일이었다. 갑작스러운 폭우가 아니었다면 저 인부들도 왕자궁에 들어오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러니까 하이에나들은 이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으리라.

이게 혼자만의 망상이라고 해도 상관없었다. 하이에나가 안 오면 안 와서 좋은 거고, 오면 자신의 추측이 옳았던 거고.

빗줄기가 따닥따닥 창문을 때렸다. 율리아는 높은 베개에 기대 누워 잠든 척했다. 그녀의 숨소리조차 잦아든 순간, 방문이 열렸다.

복도는 어두웠다. 밤에도 복도를 밝히는 등불 정도는 켜 놓는 편인데, 율리아의 방 앞 복도만 등불조차 꺼진 채 캄캄했다.

하이에나가 소리 없이 들어왔다.

이번에는 창문이 열렸다. 부드럽게 기름칠 된 창문이 소리도 없이 열리고, 밖에서 또 다른 그림자 하나가 안으로 들어오기 위해 몸을 내밀었다.

방문으로 들어온 하이에나는 율리아가 침대 위에 혼자 잠들어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자마자 창문을 향해 ‘내가, 처리’하겠다는 의미의 수신호를 날리더니 곧장 침대를 향해 다가왔다.

율리아는 속으로 숫자를 세었다.

‘하나, 둘, 셋…….’

조급해해선 안 된다. 충분히 가까워져야 했다.

두툼한 이불 속에서 율리아의 손가락이 움직였다. 그녀는 감춰 놓았던 컵의 뚜껑을 열고, 하이에나가 적당히 다가왔을 때 발로 이불을 걷었다.

그러곤 컵에 있던 액체를 하이에나에게 뿌렸다.

“……!”

그건 기름이었다. 당황한 하이에나가 칼을 휘둘렀지만, 율리아는 그때 이미 촛불을 손에 들고 있었다.

“날 죽이려거든 너도 죽을 각오로 왔어야지.”

촛불이 날았다. 기름을 뒤집어쓴 하이에나의 몸이 순식간에 불길에 휩싸였다.

“으아아아악! 끄아아…… 살려 줘, 제발 살려 줘!”

끔찍한 비명이었다. 고요한 궁이 쩌렁쩌렁 울렸다. 율리아는 창문으로 들어오려던 하이에나를 견제하려 조금 더 뒤로 물러나 그쪽을 노려보았다.

그런데 그가 움직이지 않았다.

“뭐야, 구해 주러 올 필요도 없었네?”

하이에나인 줄 알았던 그림자가 씩 웃으며 살랑살랑 손을 흔들었다. 그러더니 누구냐고 물어볼 새도 없이 창문 밖으로 몸을 날렸다.

‘누구지?’

율리아는 재빨리 그쪽으로 달려가 보았다. 어두워서 정원이 보이지 않았다.

‘맥스웰인가.’

아마 그일 것이다. 카루스가 율리아에게 붙여 준 남자. 어떻게 여기까지 올 수 있었는지는 모르겠으나, 그 또한 마조람 후작이 율리아의 목숨을 노릴 거라고 예상했던 게 틀림없었다.

이윽고 인기척 하나 없던 복도가 환하게 밝아지더니 병사들이 달려왔다.

“시녀님, 괜찮으십니까!”

달려온 병사들은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불길에 휩싸인 채 비명을 지르는 하이에나 때문이었다.

“빨리 왕자님을 모셔 와라. 거기 누구 없나!”

병사들이 빠르게 움직였다. 하이에나는 바닥에 쓰러져 경련하고 있었다. 병사들이 금방 불을 껐지만, 옷과 살점이 함께 타 버린 그는 회복 불가능해 보였다.

“빌어먹을…… 밖으로 나가 봐! 아직 일당이 남아 있을 수도 있다!”

율리아는 그 모습을 눈 하나 꿈쩍하지 않고 바라보았다. 그러곤 고통에 몸부림치는 하이에나에게 물었다.

“후작이 왕자궁으로 가서 계집 하나를 죽이라고 했을 때, 그 계집이 무력하게 당하고만 있진 않을 거라고 안 알려 줬어?”

“넌…… 넌 죽을 거다.”

“나도 알아.”

“하이에나는 많아. 넌 반드시 죽을 거다!”

율리아가 어둠 속에서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뒤늦게 밝혀진 등불이 그녀의 얼굴에 짙은 음영을 만들었다.

“침입자다! 침입자가 바깥에도 있습니다!”

왕자궁에 비명과 고함이 난무했다. 교대하고 휴식을 취하던 병사들까지 모두 달려 나와 정원을 뒤졌다.

“도대체 무슨 일이…… 이것들은 다 뭐지?”

병사들은 정원 구석에서 두 명의 하이에나가 쓰러져 있는 걸 발견했다. 누군가 밖에서 놈들을 처리한 모양이었다.

도대체 누군지는 몰라도 덕분에 율리아 시녀가 무사하니 다행일 따름이었다.

“하이에나?”

레위시아의 얼굴이 무시무시했다. 자다가 달려 나온 하녀들도 왕자가 이렇게 화난 건 처음 본다며 바들바들 떨었다.

“왕족의 궁에 하이에나?”

레위시아가 병사들을 보며 말했다. 그중엔 그의 호위 기사도 있었다. 그들이 면목 없다는 듯 머리를 숙이고 잘못을 빌었다.

사실 병사들에겐 큰 잘못이 없었다. 그들은 침입자가 나타날 거란 율리아의 말에 농담하지 말라며 비웃음을 흘렸지만, 그녀가 번쩍거리는 금화를 내밀자 옆방에서 밤새도록 경비를 서 주었다.

그리고 진짜 하이에나가 나타났을 때는 혼비백산해서 달려와 주기도 했다.

은근히 죄책감이 들었다. 이게 다 율리아 때문에 일어난 일이었으니까.

“전하, 다 제 탓입니다. 그분들 잘못이 아니에요. 하이에나는 저를 죽이려고 들어왔어요. 그분들은 왕자님을 지켜야 하잖아요.”

“그렇다 해도 하이에나 따위가 감히 왕궁에 들어와? 그게 가능하다는 게 문제란 거다.”

“정원 인부들 사이에 껴 있었을 거예요. 폭우가 내렸고, 갑작스럽게 인력이 필요했잖아요.”

“궁내부 이 자식들이…….”

왕궁을 관리, 보수하는 인력은 궁내부 소관이었다. 레위시아가 낮게 이를 갈자, 잠옷 위에 두툼한 숄을 걸치고 나와 있던 코코가 불쑥 끼어들었다.

“율리아가 입궁했을 때부터 평민 계집 따위가 왜 시녀 노릇을 하려고 하느냐며 시비 걸러 온 자식들이 있었어요. 그쪽부터 조져 보세요.”

“그런 일이 있었어?”

레위시아가 신경질적으로 머리카락을 쓸어 올렸다.

율리아는 그 사람들과는 아무 상관없는 일이라고 말하려다가 코코가 어깨를 꽉 잡는 바람에 입을 다물었다.

“또 있어요.”

이번에는 코코의 시선이 하녀들에게 내리꽂혔다. 겁먹은 얼굴로 상황을 살피던 하녀들이 몸을 흠칫 떨었다.

“율리아의 방이 어딘지, 하이에나가 어떻게 2층 복도까지 아무에게도 방해받지 않고 올라올 수 있었는지, 창문으로 도주한 뒤에는 어디로 나가려고 했는지.”

레위시아의 시선도 하녀들에게 향했다.

“누군가 안에서 도와줬겠죠.”

마조람 후작의 영향력이란 이토록 대단하다. 율리아가 들어오기 전까지는 그다지 위협적이지 않았던 레위시아 2왕자의 궁에도 첩자를 심어 두었을 만큼.

“말해라.”

레위시아는 이제 화가 나다 못해 질린 얼굴이었다.

하녀들이 안절부절못하며 서로의 눈치를 보았다.

“오늘부터 너희 모두를 가둬 놓고 첩자가 자백할 때까지 고문해야 하겠느냐?”

왕자가 하는 말은 하녀들에게 절대적이었다. 병사들은 그가 명령을 내리기만을 기다리며 서 있었다.

고문이라니. 하녀들은 상상조차 해 본 일 없는 끔찍한 단어에 울음을 터뜨렸다.

“잘 들어요.”

율리아는 한 명의 첩자를 가려내기 위해 하녀들이 모두 고통받는 걸 원하지 않았다.

“인부들에게 간식이나 물을 가져다주면서 하이에나와 따로 은밀히 대화한 사람이 있을 거예요. 늦게까지 잠들지 않은 채 혼자 깨어 있었을 거고, 언제든 달아날 수 있도록 소지품을 정돈했을 수도 있죠.”

울먹이던 하녀들이 빠르게 눈물을 훔쳤다.

“내가 언제 자고 언제 일어나는지, 방문과 창문을 안에서 잠그는지, 관심이 많았을 거예요. 내 방으로 이어지는 복도를 청소하거나 서성거렸을 수도 있고요. 오늘…… 이 복도를 마지막으로 확인하고 불을 끈 사람일 테고.”

율리아는 몇 명의 하녀들이 한 사람을 곁눈질로 바라보고 있다는 걸 눈치챘다.

그들은 코코에게 금화를 받은 하녀들이었다. 코코가 믿는 사람들이기도 했다. 요 며칠 율리아의 곁을 맴돌며 수상쩍게 행동하는 애가 있으면 잘 지켜보라고 했더니, 그 효과가 나타났다.

“배후가 누구냐.”

레위시아가 물었다.

지목당한 하녀가 덫에 걸린 짐승처럼 이상한 소리를 내면서 조금씩 뒷걸음질을 쳤다.

“저, 전하……. 아니에요. 왜 이러세요. 전 아니에요!”

“솔직하게 말하면 목숨만은 살려 줄 것이고, 계속 거짓말한다면 네 가족까지 모두 죽이겠다.”

“전하, 아니에요. 살려 주세요. 살려 주세요!”

레위시아는 왕족이었다. 그가 고용인들에게 친절하고 자유분방한 성격이라고 해서, 궁에 잠입한 첩자에게 너그러운 사람인 건 아니었다.

“팔다리를 하나씩 잘라야 말을 하겠느냐?”

레위시아가 옆에 있던 호위 기사에게서 칼을 빼앗아 들었다. 그러자 발뺌하던 하녀가 무너지듯 바닥에 주저앉았다.

“죄송…… 죄송합니다. 전하. 죄송해요. 죽을죄를…… 제가 무슨 짓을.”

울먹임이 통곡으로 변했다. 하녀는 바닥에 엎드려 살려 달라고 울며 빌었다.

율리아는 마조람 후작이 이 정도로 포기하리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는 한 번 죽이려 마음먹은 자는 반드시 죽이고야 마는 사람이었다. 처음 하이에나를 보낼 때야 율리아를 죽이는 것보다 바실리와 헤어지게 하는 것이 더 중요한 목표였으나, 이제는 사정이 달라졌다.

머리끝까지 화가 난 레위시아가 수비대에 병력을 요청했으나 호위 기사를 늘리지는 못했다. 기사는 왕족을 지키는 자이지, 시녀를 호위하기 위해 파견되는 자가 아니었다.

대신 몇 명의 병사들이 증원되어 밤새도록 왕자궁에서 경비를 섰다.

레위시아는 이번 일로 식사를 거르고 잠을 이루지 못할 만큼 큰 충격에 빠졌다. 그는 자신의 위치가 한낱 하이에나나 궁내부 관리조차 함부로 여길 만큼 형편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궁에 있으면 안전할 거라고 율리아에게 큰소리를 쳤는데, 되레 이 안에 있어서 더 위험해졌다.

왕이 되고 싶진 않았다. 레위시아는 부왕을 싫어하다 못해 증오하는 아들이었다.

왕이라는 자가 사랑하는 여자 하나 지키지 못해 평생 불행하고 슬프게 만들어 놓고, 만인의 어버이라 불리는 것도 우스웠다.

하지만 그가 왕위에 다가가지 않으면 자기 자신을, 자신의 사람을 지킬 수가 없었다.

더 큰 권력이 필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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