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화
* * *
‘과자가 고소하네.’
며칠 뒤 율리아는 하녀들이 거리에서 사 왔다는 과자를 봉지째 들고 먹고 있었다. 테이블 위엔 새하얀 도자기 찻잔에 붉은 홍차가 모락모락 김을 내뿜었다.
비가 왔다. 간만의 비였다. 어디선가 개구리 소리도 들렸다.
유리창 위에 흘러내리는 빗줄기를 바라보며, 율리아는 오도독오도독 과자를 씹었다.
샤트린 공주는 외출 금지를 당했고, 바실리는 후작 저택 지하에 갇혔다고 들었다. 두 사람이 다시 결혼 동맹으로 엮이는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이간질은 성공적이었다. 본래 계획보다 빨랐고, 효과가 컸다. 이게 다 바실리가 그녀의 예상보다 더 극단적으로 움직여 준 결과였다.
‘고맙다고 인사해야겠는걸.’
이제부터 바실리는 누구나 인정하는 마조람의 고귀한 후계자가 아니게 될 것이다. 그는 자신의 자리, 생존을 위해 누구보다 열심히 살아야 한다.
어쩌면 크리스틴이 그의 자리에 앉을 수도 있고, 직접 왕가와의 결혼 동맹에 나서게 될 수도 있었다. 그 모든 게 바실리에겐 실질적인 위협이었다.
자신의 치부를 정면으로 바라보는 건 바실리에게 무척 고통스러운 경험이 될 것이다. 그는 차갑고 어두운 지하실에서 평생 크리스틴에게 느껴 온 열등감과 마주하게 되리라.
율리아의 입꼬리가 기분 좋게 치솟았다.
‘그래. 그렇게 추락하다가 시궁창으로 가는 거야. 네가 사는 세계엔 내가 올라갈 테니, 너는 내가 살던 시궁창으로 내려와.’
마조람 후작가의 고귀한 후계자. 바실리를 처음 만났을 때의 율리아는 그가 적선하듯 던져 준 금화 하나로도 천국에 닿은 듯 기뻐하던 비렁뱅이였다.
인간의 고귀함에는 급이 있다.
천민이 열 명, 혹은 백 명이 죽어도 귀족 하나의 목숨 값만 못하다. 그런 자들이 수만이 되어야 왕족에 대어 볼 수 있을 것이다.
율리아는 천민이었다. 그녀의 목숨은 마조람 후작에게 길거리 자갈보다 가치 없는 것이었다.
‘귀하게 키운 아들이 추락하는 걸 지켜봐. 천하다 여기던 평민 계집이 어디까지 올라갈 수 있는지도 지켜봐.’
후작은 아마 머리끝까지 화가 나 있을 것이다. 이제는 집사에게 지시하지 않고 직접 율리아를 죽이려 할지도 몰랐다.
레위시아 2왕자의 시녀가 되었지만, 왕위 후계자조차 되지 못한 왕자가 자신을 완벽하게 지켜 주지 못하리란 사실을 그녀는 알았다.
‘잘 봐.’
그래서 그를 키우기로 했다.
‘너희가 만든 괴물을.’
왕궁 경연에서의 승패는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왕의 자식 중에서 누가 귀족들의 주목을 받는가, 그게 가장 중요했다.
율리아는 왕위 후계자로 거론조차 되지 않던 레위시아를 무대 위에 올릴 생각이었다.
그러려면 그가 지금보다 적극적이어야 했다. 마조람을 미워하기만 했지, 직접 나설 생각은 하지 않는 왕자에게 싸우는 법을 알려 줘야만 했다.
당신이 칼을 쥐지 않으면 모두 죽게 될 거라고.
“코코, 자요?”
과자 봉지를 손에 든 율리아가 코코의 방을 찾았다. 드레스보다 화려한 잠옷을 입은 코코가 직접 문을 열어 주었다.
“뭐야? 그 싸구려 과자는?”
“마조람 후작이 고용한 하이에나들이 왕족의 궁에 침입할 수 있을까요?”
“뭐?”
코코의 얼굴이 싸늘하게 굳었다. 그녀는 복도에 아무도 없는 걸 확인하곤 율리아의 팔을 잡아 안으로 끌어들였다.
“너 뭐야. 왜 그래? 후작이 아무리 이 나라 최고의 귀족이라 해도, 왕족의 궁에 칼 든 무뢰배를 들이밀 만큼 생각 없는 인사는 아니야.”
“왕족을 죽이는 게 목적이 아니잖아요. 하찮은 평민 계집 하나만 죽이고 사라지면 되는 일인데, 불가능하진 않겠죠.”
“그거야…… 그렇긴 한데.”
코코의 얼굴이 갈수록 싸늘해졌다. 생각할수록 율리아의 말이 옳았다.
“일단 레위시아 전하께 말씀드리고 경비를 늘리자.”
“코코.”
율리아가 코코의 손에 과자 봉지를 쥐여 주었다. 고소해서 입이 즐거운 과자였다. 비가 와 눅눅한데도 맛이 있었다.
“전하께는 알리지 마세요.”
“왜 그래, 너…… 또 무슨 꿍꿍이야.”
“저는 왕자님의 궁에 마조람의 첩자가 하나도 없으리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뭐?”
의심하고 또 의심해라. 친절한 사람일수록 한 번 더 의심해라.
왕궁에는 수많은 사람의 눈과 귀가 있고, 그들은 때때로 권력자에게 그 정보를 팔아 생계를 유지한다.
누가 더 많은 생쥐를 키우는가, 누가 더 좋은 먹이를 내미는가. 그것도 능력이었다. 그러니 왕족을 보필하기 위해선 쥐덫을 놓는 법부터 배워야 한다.
다 코코에게 배운 것들이었다.
“왕위 후계로 거론되지 않을 뿐, 왕자님은 후작의 적이 확실하니까요.”
율리아는 이번 기회에 어디 숨어 있을지 모르는 첩자를 가려내자고 말하고 있었다.
“너 진짜 세상에 무서운 게 없구나. 그렇다고 목숨을 걸어? 죽는 게 그렇게 우스워?”
“안 죽어요. 죽을 것 같았으면 이런 말 꺼내지도 않았어요.”
코코가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러곤 한 손으로 이마를 잡고 말했다.
“시녀가 많으면 고용인 관리를 직접 하기도 하는데, 여긴 나 혼자뿐이라 대충 궁내부에서 보내 주는 사람을 써. 그들 중에 누가 첩자인지 어떻게 아니.”
“돈을 좀 풀어 보려고요.”
“돈? 네가 돈이 어디 있어.”
율리아가 어깨를 으쓱거리더니 손가락으로 자신의 방을 가리켰다. 코코는 미심쩍어하면서도 그녀를 따라 움직였다.
그렇게 율리아의 방으로 자리를 옮긴 뒤, 코코는 금화로 가득 찬 궤짝을 보고 할 말을 잃어버렸다.
“너 솔직히 말해.”
“네.”
“네 후원자…… 도대체 뭐 하는 놈이야.”
그건 아직 말해 줄 수 없었다.
“저는 아직 이곳 사람들에 대해 잘 몰라요. 누구를 포섭하고 누구를 의심해야 하는지. 그러니까 코코가 도와주세요.”
이걸로 고용인들을 좀 뒤흔들어 보자는 율리아의 말에, 코코가 재빨리 머리를 굴렸다.
며칠째 내리는 비 때문에 정원이 엉망이었다. 여기저기 물웅덩이가 생겨 위험해지자 궁내부에서 정원사와 함께 장비를 든 인부들을 왕자궁으로 보냈다.
“어휴, 오늘 밤늦게까지 작업해야 한대요. 새벽에 비가 더 많이 올지도 모른다고, 물길을 내야 한다나.”
“그래요?”
“대충 먹을 간식거리라도 내어 주고 와야겠어요. 시녀님은 오늘도 일찍 주무실 거죠?”
하녀들이 물었다. 율리아는 부지런히 주방을 오가며 작은 쟁반에 간단하게 먹을거리를 담고 있었다.
“평소처럼 잘 거예요.”
율리아의 얼굴에 짧은 미소가 스치듯 지나갔다. 평소와 다를 바 없으면서 어쩐지 눈에 걸리는 웃음이었다.
쟁반 위엔 달콤한 과자 몇 개와 뚜껑 덮인 컵이 놓여 있었다. 율리아가 간식을 좋아한다는 걸 잘 아는 하녀들은 별다른 의심 없이 웃으며 말을 건넸다.
“저희가 가져다드린다니까 왜 매일 직접 내려오시는 거예요.”
“별것도 아닌데 어때요. 여러분은 바쁜데 저는 한가하고.”
“제가 다음에 우유로 피부 관리를 해 드릴게요. 코코 시녀님의 전속 하녀한테 배웠는데, 요즘 유행하는 방식이래요.”
“고마워요.”
율리아는 식당에서 몇몇 하녀들과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다가 2층으로 올라갔다. 바깥에선 인부들이 삽질하느라 애를 쓰고 있었다.
빗줄기가 굵어졌다. 인부들의 목소리가 빗소리에 묻혀 잘 들리지 않았다. 율리아는 자신의 방으로 돌아와 침대 머리맡에 쟁반을 올려놓고 잠옷으로 갈아입었다.
그녀는 이날 밤 잠들지 않을 생각이었다. 자는 척하다가 잠들어 버릴 수도 있으니까 아예 눈 뜬 채 밤새는 편이 나았다.
하이에나는 어디에 있을까.
율리아의 시선이 빗줄기 때문에 어지러운 유리창으로 향했다.
마조람 후작의 인내심이 바닥났다는 건 굳이 확인해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율리아가 브레웨 훈장을 손에 넣고 왕궁에 들어가는 것까지는 막을 수 없었으나, 바실리를 저 지경으로 만들어 놓았으니 반드시 보복하려 할 것이다.
왕자궁에 하이에나를 억지로 들여보내서라도.
‘언제쯤 오려나.’
자정일까, 새벽일까. 코코와 레위시아는 평소에도 늦게 잠드는 편이니까 새벽일 가능성이 컸다.
시간은 아직 많이 남아 있으니 느긋하게 기다릴 생각이었다. 율리아는 침대에 누워 달콤한 과자를 입에 물었다.
와사삭. 율리아가 과자를 씹으며 책장을 넘겼다.
어쩐지 지금 자신의 모습을 카루스와 바바슬로프가 보게 된다면 한소리 들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바바슬로프는 다정한 잔소리를 쏟아낼 테고, 카루스는 그 까만 눈동자로 책망하듯 율리아를 바라볼 것이다.
칼날 위의 삶을 선택한 사람은 슬프고 불행하게 산다고 했던가.
그래도 죽음이 두렵지 않다고 말하면 그 사람은 내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생각할까.
그럴 것 같다. 철없는 소리 하지 말라고, 네가 사람 죽는 걸 본 적이 없어 그러는 거라고 타이를 수도 있다. 카루스 란케아는 자신의 말을 믿지 않으니까.
율리아는 죽음이 두렵지 않았다. 어차피 다시 시작할 걸 알기 때문이다.
두려운 건 차라리 실패였다. 처음엔 고통이 두려웠는데, 이제는 실패가 더 두려웠다. 그래서 이렇게 누가 자신이 목숨을 노리고 있다는 걸 알면서도 과자나 씹으면서 기다릴 수 있었다.
시간이 흘러 왕자궁의 불이 거의 다 꺼지고, 복도를 오가는 하녀들의 인기척도 사라졌다. 정원의 인부들도 작업이 끝났는지, 이제는 고요한 가운데 빗소리만 들렸다.
율리아는 책을 내려놓고 촛불의 위치를 옮겼다. 그러곤 쟁반 위에 있던 컵을 들고 이불 속으로 들어가 몸에 힘을 뺐다.
‘이제 오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