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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화 (27/319)

25화

코코는 아무 연회에나 가서 오늘 샤트린 공주가 저지른 일에 대해 떠들고 올 생각이었다. 그러면 누군가는 바실리에게 달려가 그 소식을 전하려 할 테니까.

잠시 고민하던 율리아가 코코의 소매를 당겨 잡고 말했다.

“13번가의 회원제 클럽으로 가세요. 거기 가면 바실리의 친구들이 많이 있을 거예요. 이왕이면 코코가 직접 가지 말고, 누군가에게 사주하는 게 좋겠어요.”

“……그래.”

율리아는 바실리의 친구들이 밤마다 어디에 모여 노는지 잘 알고 있었다.

그곳은 어느 부유한 상인의 회원제 클럽이었는데, 누구보다 파벌주의적이면서 파벌이 없는 자를 좋아하는 그들의 모순이 상징적으로 드러나는 장소였다.

무엇보다 그 회원제라는 게 돈만 있으면 가능하다는 점이 제일 웃겼다.

“바실리가 너한테는 정말 비밀이 없었나 보네.”

코코가 헛웃음을 터뜨렸다.

그날 밤, 율리아에게 회원제 클럽의 위치와 입장 방법에 대해 상세히 안내받은 코코가 그 안에 사람을 들여보냈다. 그리고 샤트린 공주가 2왕자궁에서 평민 시녀에게 나쁜 짓을 저질렀다고 소문을 냈다.

그 소식은 왕족의 추문인 만큼 귀족들의 엄청난 관심을 받았고, 해가 뜨기도 전에 바실리의 귀에도 들어가게 되었다.

샤트린은 화를 풀지 않았다.

당연한 일이었다. 마조람 후작이 아들을 데리고 찾아와 무릎을 꿇어도 연회장 바닥에 내팽개쳐진 공주의 명예는 회복되지 않을 텐데, 잘난 마조람은 무릎은커녕 사과조차 하지 않았다.

시간이 지날수록 공주의 분노가 커져만 가자, 난감해진 건 국왕 부부였다. 왕은 마조람을 벌할 수도 없고, 마조람의 편을 들어줄 수도 없었다.

후작은 그런 왕의 입장을 잘 알기에, 어쩔 수 없이 바실리를 찾았다.

“왕궁에 가서 공주께 사과하고 오너라.”

“예?”

“무슨 말이든 해서 달래란 말이다. 공주께서 기어이 네놈이 무릎 꿇는 모습을 봐야겠다고 하거든, 하는 시늉이라도 해라.”

그렇게 말하는 후작의 얼굴도 그리 편치만은 않았다.

바실리는 아버지의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고분고분하게 굴지 않았다.

“마조람의 후계자인 제가 고작 춤 신청을 거절했다고 공주 앞에서 무릎을 꿇어야 한다는 말씀입니까?”

“바실리, 너는 왕족의 명예를 건드렸어.”

“제 명예는요.”

바실리는 아직도 정신을 차리지 못한 상태였다. 후계자가 바뀔 수도 있다는 아버지의 말에 단단히 화가 난 나머지, 평소보다 시야가 좁고 감정적이었다.

“저도 싫고, 공주도 싫다던 결혼을 멋대로 밀어붙인 게 누굽니까. 어차피 불행한 결말이었을 텐데, 그나마 제가 용기가 있어서 미리 막은 거예요.”

“바실리!”

“절대 사과 안 합니다. 공주의 명예는 무슨, 그냥 성격 파탄자일 뿐…….”

후작의 한쪽 눈꺼풀이 움찔 떨리더니 이내 무섭게 굳었다.

그는 진심으로 화가 났다. 특별히 잘난 구석은 없어도 고분고분해 후계자로 삼았던 아들이 요즘 정신 나간 망아지처럼 제멋대로 굴고 있었다.

“집사.”

“예, 후작님.”

후작이 집사를 불렀다. 문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집사가 단정하게 머리를 숙였다.

“병사들을 데려오게. 바실리를 마차에 태워 왕궁으로 데려가. 공주궁 앞에 던져 놓고 와.”

“아버지!”

바실리가 큰소리로 화를 냈다. 하지만 그는 후작을 왕처럼 모시는 집사의 손에서도 벗어날 수 없었다.

“저리 가! 내 몸에 손대면 가만두지 않겠다!”

“모시겠습니다.”

집사가 다가와 바실리의 두 팔을 뒤로 꺾어 잡았다. 주먹질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도련님을 제압하는 건 그에게 그리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놔! 아버지! 아버지!”

“도련님을 모셔라.”

병사들이 집사가 제압한 바실리를 붙잡고 밖으로 끌고 나갔다. 그는 죄인이 된 기분이었다. 몸부림쳐도 소용없었다.

무력하고, 비참했다.

그렇게 강제로 마차에 태워져 공주의 궁에 도착한 바실리는 정원에서 그를 기다리는 샤트린을 만날 수 있었다.

“……공주님.”

몸부림치느라 바실리의 머리와 옷이 모두 엉망이었다. 샤트린은 그런 그의 몰골을 감상하듯 천천히 훑어보았다.

샤트린은 무척 인내하고 있었다. 그녀 역시 왕가와 마조람의 관계를 모르지 않기에, 바실리가 무릎 꿇고 사죄하고 파혼의 사유가 그에게 있음을 귀족들 앞에서 발표한다면, 그때는 화를 풀겠다고 다짐하고는 있었다.

그런데 바실리가 샤트린을 보고 얼굴을 굳히더니 이렇게 말했다.

“율리아를 때리셨다던데, 그게 사실입니까?”

“뭐?”

“아무 잘못도 없는 사람에게 폭력을 행사하다니요. 그게 무슨 짓입니까. 저야 그런 짓을 저질렀으니 공주님께 사죄해야 마땅하지만, 율리아는 왜…….”

“바실리 마조람.”

거친 탄성을 터뜨린 샤트린의 입에서 새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공주는 두 손을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너 제정신이야?”

“무슨 말씀을…….”

“지금 감히, 내 궁에 찾아와 네 연인의 편을 들면서…… 나를 질투심 많은 폭력배로 매도해?”

“그게 아니라, 공주님.”

“그게 아니면 뭔데. 너희 가문이 대단한 줄이야 알고 있었지만, 왕족을 업신여겨도 되는 정도일 줄은 미처 몰랐네?”

샤트린이 높은 소리로 웃었다. 하도 기가 막혀 웃음이 났다.

공주의 곁을 지키는 시녀들의 얼굴에도 불쾌함이 가득했다. 그들은 바실리를 이해할 수도 없었고, 이해하고 싶지도 않았다.

“말해 봐. 후작이 그래도 된다고 가르쳤어? 후작 부인이? 그것도 아니면, 내 아버지인가?”

그제야 뭔가 일이 크게 잘못 돌아가고 있다는 걸 깨달은 바실리가 입술을 꾹 깨물었다. 그러곤 머뭇거리던 몸을 바로잡고 공주 앞에 머리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아니.”

샤트린은 그의 사과를 받아 주지 않았다.

“꺼져라, 마조람.”

그건 바실리에게 하는 말이면서, 동시에 마조람 가문에 하는 말이기도 했다.

“영원히 꺼져.”

“공주님!”

“거기 뭣들 하느냐! 이 자식을 내 눈앞에서 치워라! 당장 끌어내, 어서!”

샤트린 공주가 바실리 마조람을 자신의 궁에서 들개처럼 끌어냈다는 소문이 돌았다. 병사들의 손에 붙들려 끌려 나온 바실리가 공주궁 앞에서 고함을 질렀다는 얘기도 있었다.

국왕은 그 일로 샤트린에게 외출 금지 명령을 내렸다. 사과하러 온 귀족 가문의 자제를 강제로 내쳤다는 게 이유였다.

하지만 그 안엔 여러 가지 복잡한 사연이 숨겨져 있었다.

“네놈이 미치지 않고서야!”

머리끝까지 화가 난 마조람 후작이 한 손으로 바실리의 멱살을 잡아채더니 주먹으로 그의 얼굴을 후려쳤다.

관자놀이를 연속으로 몇 대나 얻어맞은 바실리가 선 채로 비틀거렸다.

“후작님!”

집사가 달려와 말렸지만 소용없었다. 후작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극도로 분노한 그는 바실리의 입과 코에서 피가 흘러도 주먹질을 멈추지 않았다.

“왕이 공주를 가뒀다. 잘못은 처음부터 끝까지 네놈이 했는데! 왕이 공주를 가뒀어! 그게 뭘 뜻하는지 아느냐!”

바실리는 그보다 훨씬 큰 벌을 받아야 한다는 뜻이었다.

“아무렇지 않게 넘어갈 수 있는 일이었다! 사과 한마디만 하면, 공주가 받아 주든 받아 주지 않든 상관없었단 말이다! 한데 네놈이 일을 이 지경으로 만들었어!”

후작이 흐느적거리는 바실리를 내팽개치듯 놓았다.

주춤거리다 못해 아예 바닥에 주저앉은 바실리가 후작에게 물었다.

“그럼 이제 마조람의 후계자는 크리스틴입니까?”

“바실리!”

“그게 아버지가 원하는 거잖아요.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아들은 치워 두고 똑똑하고 예쁜 크리스틴을 후계자로 삼고 싶다고, 오래전부터 그러셨죠. 아주…… 아주 오래전부터.”

“그게 무슨 소리냐.”

“제가 모를 줄 아셨어요? 아버지가 절 얼마나 무시했으면 집사조차 저를 우습게 여기겠습니까, 예?”

후작은 바실리가 하는 말을 귀담아듣지 않았다. 덩치만 컸지 아직 어린 아들이 철없이 떼를 쓰고 있다고 여겼다.

“내가 널 엄하게 키우지 않아서 이런 일이 생긴 게지.”

후작이 무겁게 탄식하며 중얼거렸다.

“집사.”

“예, 후작님.”

“바실리를 지하에 가두어라. 내가 허락할 때까지 한 걸음도 밖으로 나오지 못하게 해.”

“알겠습니다.”

집사가 꾸벅 고개를 숙였다.

바실리는 입가에 흐른 피를 소매로 훔치며 일그러진 얼굴로 소리쳤다.

“차라리 내쫓으세요! 샤트린 공주가 외출 금지를 당했는데, 그 정도로 되겠습니까? 제 이름에서 마조람을 빼면 되잖아요!”

“그걸 원하느냐?”

후작이 물었다. 그래도 지금까지는 조금이나마 아들을 나무라는 아버지 같았는데, 방금 그 질문을 할 때 후작의 얼굴은 사형수를 대하는 집행자 같았다.

“그걸 원하느냐고 물었다. 네 이름에서 마조람을 빼면 네가 무엇일 것 같으냐. 네 말대로 아무짝에도 쓸모없어 누구도 필요로 하지 않는 쓰레기가 될 텐데.”

“그러니까 내쫓으라고요!”

“그렇군. 잘 알겠다. 그래도 지금까지 귀하게 키운 게 아까우니, 네놈을 마지막으로 어디에 쓰고 내쫓을지 고민해 보마.”

그렇게 말하곤 돌아선 후작이 잇새로 신음을 흘리듯 낮게 뇌까렸다.

“이게 다 그 건방진 평민 계집 때문에 일어난 일이야.”

“……율리아가 왜요.”

“그년을 죽여서 그 시체를 네 앞에 던져 주마. 그럼 철이 좀 들겠지.”

그는 진심이었다.

“바실리, 이렇게 될 줄 몰랐다고 변명하지 마라. 그 계집을 죽여 없애라고 집사에게 지시했는데도 네놈은 끝까지 포기하지 못하고 결국 공주를 욕보이기까지 했어. 그런데 내가 어찌 그 계집을 내버려 둘 수 있겠느냐.”

“아, 아버지…….”

바실리가 멈칫거렸다. 아버지를 말려야 하는데, 뭐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얼굴이었다.

“그 영리한 계집은 다 알고 있었을 거다. 멍청한 네놈이랑은 처음부터 싹이 달랐으니까.”

반박할 수 없었다. 후작의 말대로, 율리아는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바실리에게 경고도 했다. 네가 그럴수록 자신의 목숨은 위태로워질 거라고. 그 경고를 무시하고 멋대로 행동한 건 바실리 자신이었다.

“율리아는 왕자궁에 있어요. 아버지도 어쩔 수 없을걸요.”

그래서 한다는 말이 고작 이거였다. 후작은 그런 바실리를 보며 헛웃음을 짓더니, 마지막으로 이렇게 말했다.

“무슨 말을 하는 거냐. 저 왕궁 안에 내가 죽일 수 없는 사람은 오직 국왕 한 사람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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