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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화 (26/319)

24화

샤트린 오르테가, 국왕의 하나뿐인 딸이 크게 화가 났다.

어느 정도냐 하면 국왕 앞에서 울음을 터뜨리며 마조람 후작과 그 아들을 데려와 제 앞에 무릎 꿇리라고 청한 것이다.

왕족인 샤트린은 바실리 때문에 태어나 처음 수치심으로 돌아 버릴 것 같다는 기분을 느꼈다. 공주는 바실리에게 복수하기 위해서라면 못 할 짓이 없었다.

감히 그 많은 귀족 앞에서, 그것도 샤트린이 먼저 손을 내밀었는데, 파혼 운운하며 공주를 걷어차다니.

바실리 마조람은 목숨이 아깝지 않은 게 틀림없었다.

그게 그 율리아라는 시녀의 잘못이 아니라는 건 때려 보고 나서 알았다. 율리아는 바실리에게 완전히 정떨어진 상태였다.

“이 결혼, 저는 처음부터 하기 싫다고 했어요. 그런데 아버지가 참으라고 해서 참은 거예요. 그게 왕족으로 태어나 고귀한 삶을 살아온 자의 의무라고 하셨으니까!”

“샤트린.”

“그런데 어찌 되었는지 보세요. 바실리 마조람은 제 의무를 다하지 않았을뿐더러, 왕족의 명예를 시궁창에 처박았어요! 그것도 모두가 보는 앞에서!”

“샤트린, 진정해라.”

“마조람 후작과 그 아들을 데려와 제 앞에 무릎 꿇려 주세요. 웃음거리가 된 제 명예를 다시 돌려주세요. 아버지가 시키는 대로 했다가 이렇게 됐잖아요!”

국왕의 얼굴에 주름이 깊었다. 그는 아직 50대였으나, 유난히 혈색이 탁하고 주름이 깊어 60대로 보였다.

그가 보기에도 샤트린의 분노는 타당한 것이었다. 바실리가 일개 귀족이었다면 딸이 원하는 대로 부자를 모두 잡아다가 무릎 꿇려 놓고 열 번이고 스무 번이고 사죄하게 했을 것이다. 어쩌면 그보다 더한 벌을 내렸을 수도 있다.

하지만 바실리는 마조람의 후계자였다.

왕조차 함부로 벌할 수 없는 오르테가 최고의 귀족.

“그게 그렇게 간단한 일이 아니란 걸 너도 잘 알고 있잖으냐. 바실리는 네게 사과할 것이다. 후작도 일을 바로잡겠다고 약속하였어.”

“바로잡다뇨. 바로잡다뇨? 제가 그렇게 창피를 당했는데, 그 꼴도 보기 싫은 자와 기어이 결혼시키려고요?”

샤트린의 눈에서 불꽃이 일렁였다. 그 평민 시녀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공주인 그녀는 저와 다르지 않냐면서, 바실리를 용서할 거냐고 묻던 그 선명한 녹색 눈동자.

“샤트린, 마조람은 왕가의 벗이다. 화해하는 게 좋아.”

“아뇨. 싫어요. 바실리 마조람의 목을 쳐서 가져온다면 모를까, 제가 그 남자와 화해하는 일은 영원히 없을 거예요.”

“샤트린!”

“아버지는 이 나라의 왕이잖아요!”

샤트린 공주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국왕에게 대든 대가로 한동안 궁에 갇혀 있어야겠지만, 지금은 이렇게라도 안 하면 안 될 것 같았다.

“오르테가의 왕이잖아요. 저는 아버지의 하나뿐인 딸이에요! 그런데 왜 제 명예를 땅바닥에 처박은 귀족 따위에게 화해를 청해요? 제가 왜요! 왜 그래야 하는데요! 말씀해 보세요!”

국왕이 한 손으로 머리를 짚었다. 샤트린이 찾아와 난동을 부린 곳은 왕의 침전이었다. 그곳엔 레위시아의 친모인 왕의 애첩이 머무르고 있었다.

왕이 신음하며 머리를 감싸자, 애첩이 다가와 부드럽게 이마를 문지르며 어깨를 주물렀다. 샤트린은 그 모습을 차갑게 노려보다 홱 뒤돌아섰다.

“대들어서 죄송해요. 무슨 벌이든 달게 받을게요. 하지만 제 생각은 변하지 않을 거예요.”

이 일은 어머니를 만나러 왕의 침전에 갔던 레위시아 왕자를 통해 코코와 율리아에게까지 전해졌다.

레위시아는 상쾌한 미소를 머금고 자신의 궁으로 돌아와 말했다.

“율리아에게는 미안한 말이지만 난 샤트린이 별로 싫지 않아. 걘 부왕을 안 닮았거든.”

“뭐예요?”

코코가 눈을 찡그리자, 변명하듯 이렇게 덧붙였다.

“마조람 후작이 바실리를 데리고 와서 샤트린 앞에 무릎 꿇는 일은 당연히 없겠지. 그런데 말이야. 적어도 왕위 후계자 중에서 한 사람하고는 확실하게 척을 진 거야. 샤트린은 뒤끝이 남부 해안만큼 길다고. 후작도 신경을 안 쓸 수가 없을걸.”

“한 사람이라뇨, 두 사람이죠.”

“에이, 나는 왕위 후계자가 아니잖아.”

“또 그 소리.”

코코가 한숨을 내쉬었다. 어쩐지 잔소리를 할 것 같은 느낌이라, 레위시아가 두 손을 살짝 들어 항복 표시를 하고 율리아를 바라보았다.

“미안하게 됐네. 내 궁에 있으면 안전할 거라고 했는데…… 왕족이 때리러 올 줄은 몰랐어. 그런데 율리아, 나는 네가 따귀 좀 맞았다고 해서 부왕의 귀한 공주에게 달려가서 똑같이 갚아 줄 수 있는 대단한 사람이 아니야.”

“전하, 괜찮아요.”

“내가 샤트린을 때리면 바실리보다 더한 벌을 받게 될걸.”

“그런 걸 바라지 않았어요. 저는 정말 아무렇지도 않아요.”

“정말?”

“왕궁에 들어오겠다고 결심한 날부터 각오했던 일이에요. 따귀가 아니라, 채찍질을 당했어도 원망하지 않았을 겁니다.”

레위시아가 의심스러운 눈으로 율리아를 훑어보았다. 그녀의 말이 진심인지 알아보려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에게는 독심술 같은 재주가 없었으므로, 율리아의 속마음을 들여다볼 수는 없었다.

“진짜 신기하지.”

“뭐가요?”

“율리아는 사실 아무 짓도 안 했잖아. 두 사람이 헤어진 건 바실리 그 자식이 개자식이라 그런 거고.”

“그렇죠.”

“미친놈이 저 혼자 매달리고, 애원하고, 착각하고, 사고 치더니…… 샤트린까지 적으로 만들어 버렸어. 왕궁에 폭풍이 세 번쯤 왔다 간 느낌이야.”

율리아는 그냥 웃었다. 카루스가 보고 꿍꿍이가 느껴지는 미소라고 생각했던 그 웃음이었다.

“너를 시녀로 받아 줬을 때는 말이야. 바실리 자식을 몇 번 놀려먹고 나면 돈 좀 쥐여 주고 궁에서 내보낼 생각이었는데…….”

레위시아가 턱을 괴고 율리아를 바라보았다.

“율리아, 언제까지 내 궁에 있을 생각이지?”

“쫓겨날 때까지요.”

“안 쫓아내면?”

“안 나가겠죠.”

“나쁘지 않네.”

아무래도 오늘은 축배를 들어야 할 것 같다며 레위시아가 술병을 땄다.

밤이 되었다. 늦게까지 술을 마신 레위시아가 방으로 돌아가고, 코코와 율리아가 남았다.

율리아는 거울을 보고 있었다. 얼음찜질을 열심히 했던 덕인지, 부었던 뺨은 다 가라앉았다. 입술 안쪽에 난 상처도 별로 쓰라리지 않았다.

“야.”

코코가 갑자기 말을 걸었다.

“네가 원한 게 이거야?”

“네?”

율리아가 코코를 향해 고개를 들었다. 가느스름하게 눈을 반만 뜬 코코가 술잔에서 입술을 떼고 물었다.

“마조람과 왕가의 반목.”

“코코.”

“머리가 두 개인 뱀을 죽이려면, 그 두 개의 머리가 서로 싸우게 해야 한다. ……오래된 이야기지.”

코코가 무겁게 중얼거렸다. 율리아가 했던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온 모양이었다.

“율리아, 나는 마조람이 싫어. 증오해. 오르테가 왕국은 뿌리부터 썩어 들어가고 있어. 그렇게 만든 건 마조람이지. 그런데 내가 그들을 싫어하는 건 그런 거창한 이유 때문이 아니야.”

코코는 왕의 애첩과 친구였던 어머니 덕에 어릴 때부터 왕궁을 드나들며 자랐다. 성인이 된 뒤에는 그녀가 레위시아의 시녀가 되었다.

“레위시아 전하의 어린 시절을 기억해. 갓 태어난 아기가 하얀 요람에 누워 울고 있는데, 국왕은 찾아오지 않더라고. 왕비의 눈치를 보느라.”

심지어 레위시아의 친모는 왕의 곁에 있어야 했기에, 아들을 직접 키울 수 없었다.

“유모가 몇 번 바뀌었는지 몰라. 왕자님은 사랑이 뭔지 알기도 전에 외로움을 배웠어. 아장아장 걸을 수 있게 되니까…… 그때부턴 사람들 눈치를 보더라고.”

코코는 레위시아가 눈치, 즉 섬세함을 타고났다고 말했다. 그는 어릴 때부터 남의 시선에 예민한 편이었다.

그건 왕자가 이 왕궁에서 애첩의 아들로 태어나 살아가는데 가장 필요한 능력이었을 것이다.

“사춘기 같은 건 없었어. 그것도 투정 부릴 상대가 있어야 하잖아. 머리가 굵어지니까 매일 왕궁을 떠날 생각만 했지.”

“왜 안 떠나셨을까요?”

“어머니가 있었으니까.”

레위시아는 어머니를 사랑했다. 지극히 사랑했다. 그만큼 아버지를 미워했다.

그 외에도 코코가 마조람을 증오하는 결정적인 이유가 있었지만, 아직 그 이상은 이야기해 주지 않았다.

“어려운 말로 포장할 필요 없잖아. 그러니까 율리아 네가 왕궁에서 하려는 일은…….”

“이간질이죠.”

율리아가 산뜻하게 정의를 내렸다. 코코는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샤트린 공주가 바실리를 미워하게 됐다고 해서 과연 왕가와 마조람이 멀어질까? 그들은 한 몸이 된 지 오래야. 누가 머리이고 누가 몸통인지도 모를 만큼.”

“부족하죠. 알아요.”

그러니까 이 작은 불씨가 스러지지 않도록 장작을 잘 넣어 줘야 한다.

잠시 말이 없던 코코가 율리아에게 물었다.

“샤트린 공주가 너를 찾아와서 손찌검했다는 걸 바실리가 알게 되면 어떨 것 같아?”

“공주에게 사과하러 가지 않겠죠. 아니면 사과하러 가서도 공주의 잘못을 지적하거나.”

“그래?”

“저를 위해서가 아니라…… 자기가 구석에 몰려 있으니까, 공주의 잘못이라도 물고 늘어지려고 할 거예요.”

“그럼 그렇게 해 줘야겠네.”

율리아가 무슨 소리냐며 고개를 들었다. 어느새 술잔을 내려놓은 코코가 치마를 추스르며 자리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외출할 거야. 넌 여기에 있어. 늦을 거니까 기다리지 말고.”

“어디 가는데요?”

“야행성 귀족 놈들이 밤새 모여 노는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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