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화
왕궁엔 비밀이 없다더니.
하녀들의 시선이 끈적끈적해졌다. 바실리가 율리아 때문에 공주에게 파혼을 선언했다는 소문이 왕궁 전체에 퍼진 모양이다.
평소처럼 이른 시간에 아래층으로 내려온 율리아는 하녀들의 끈질긴 시선을 받으며 식당으로 향했다.
“나랑은 상관없는 일이에요.”
뭐라도 말해 주길 원하는 것 같아서 적당히 해명했더니 하녀들이 실망한 것 같기도 하고 좋아하는 것 같기도 한 애매한 얼굴로 그녀에게 식사를 챙겨 주었다.
율리아가 보기에 왕자궁의 사용인들은 그녀에게 그리 적대적이지 않았다. 뒤에서야 욕을 하든 흉을 보든 알 수가 없는 일이지만 적어도 앞에서는 잘 웃어 주고 부탁도 잘 들어줬다.
왕자를 유혹하러 왕궁까지 들어온 욕망 덩어리 평민 계집이라고 괴롭힘당하려나 했는데, 다 쓸데없는 걱정이었다.
간단하게 식사를 마친 율리아가 곁에서 어색하게 서성거리는 몇몇 하녀들에게 웃으며 말을 건넸다.
“궁금한 게 있으면 물어봐요.”
“네? 아뇨, 아무것도.”
“괜찮아요. 물어봐도.”
하녀들이 서로의 얼굴을 흘끔거리며 망설였다. 궁금한 게 있긴 있는데 정말 물어봐도 될지 고민하는 얼굴이었다.
하필이면 그때 밖에서 시종이 달려와 율리아를 찾았다.
“율리아 시녀님!”
“왜 그러세요?”
“시녀님, 저…… 빨리 밖에 나가 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네? 무슨 일인데요?”
“공주 전하께서 갑자기 오셔서는, 시녀님을 데려오라고…….”
“샤트린 공주님이요?”
율리아가 되물었다.
불안해하는 시종 뒤에서 싸늘한 목소리가 들렸다.
“비켜라.”
샤트린 오르테가였다.
율리아가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나고, 하녀들이 나란히 서서 허리를 구부렸다. 시종은 벼락이라도 맞은 사람처럼 물러났고, 또각또각 소리를 내며 식당으로 들어온 샤트린이 주위를 휘 둘러보더니 율리아에게 말했다.
“네가 그 계집이냐?”
아무래도 조짐이 좋지 않았다. 샤트린 공주는 단순하고 불같은 성미에 자존심이 강했다. 율리아는 공주의 심기를 어지르지 않으려 노력하면서, 공손히 인사를 올렸다.
“공주 전하께 인사드립니다.”
“고개 들어.”
샤트린이 코앞까지 빠르게 걸어왔다. 율리아는 공주의 명령대로 숙였던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눈이 번쩍하도록 강한 손찌검이 날아들었다.
철썩 하는 소리가 식당을 울렸다. 하녀들이 바짝 긴장해서 고개를 푹 수그렸다. 샤트린을 따라 들어온 시녀들도 차마 그 장면을 보지 못하고 눈을 질끈 감았다.
“고개 들라고 했어.”
샤트린은 율리아에게 아무것도 말해 주지 않았다. 너를 왜 때리는지, 뭐가 그렇게 기분이 나빴는지,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하는지.
율리아는 이번에도 고분고분하게 고개를 들었다. 처음보다 더 센 손찌검이 날아들었다.
또 한 번 철썩하는 소리가 나고, 입에서 찝찔한 피 맛이 났다. 샤트린은 율리아의 입술에서 배어 나오는 피를 본 뒤에야 들었던 손을 내렸다.
샤트린이 물었다.
“왕족이 우스워?”
“아닙니다.”
“그럼 내가 우스워?”
“아닙니다, 전하.”
“난 지금 널 죽일 수도 있고, 감옥에 가둘 수도 있고, 제발 살려 달라고 애원할 때까지 채찍질할 수도 있어.”
샤트린이 다시 말했다.
“빌어.”
공주의 적갈색 머리카락이 눈앞에서 찰랑거리며 흔들렸다. 맞은 사람은 차분한데, 명령을 내리는 쪽의 목소리가 바르르 떨렸다.
율리아는 그 순간에도 코코가 늦게 일어나는 사람이라 다행이라는 생각을 했다.
“무릎 꿇고 빌어. 이마를 바닥에 대고 빌어. 내 발에 매달려서 빌어. 잘못했다고 빌어!”
“못 합니다.”
“왜 못해! 빌어! 빌라고!”
“그렇게는 못 합니다.”
“이게 진짜…….”
샤트린이 율리아를 또 때리려 손을 들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율리아가 공주의 얼굴을 지그시 바라보며 이렇게 말했다.
“저는 레위시아 왕자님의 시녀입니다. 감히 공주 전하께 반항할 수는 없지만, 잘못한 게 없는데 엎드려 빌 수는 없습니다.”
“이 건방진 계집애가 지금 뭐라고 지껄이는 거야!”
“차라리 계속 때리세요. 채찍으로 후려치세요. 그래도 빌 수는 없습니다.”
율리아는 지독할 정도로 담담하게 말했다. 입이 찢어질 정도로 세게 맞았는데 조금도 아파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맞은 율리아보다 때린 샤트린이 더 아파 보였다.
분노를 다스리지 못해 부들부들 떠는 샤트린에게 공주의 시녀들이 다가와 다정히 말을 건넸다.
“공주님, 이만하면 되었어요.”
“저 건방진 평민은 왕자 전하께 벌을 주라고 하세요.”
그렇게 말한다고 해서 샤트린의 화가 가라앉진 않을 텐데.
율리아는 시녀들이 공주를 달래려 애쓰는 모습을 보면서 바실리를 떠올렸다.
이기적인 줄은 알았지만 이렇게까지 무모한 남자인 줄은 몰랐다. 아무래도 이번 삶의 율리아가 가슴 깊은 곳에 품고 있던 바실리의 열등감을 너무 깊이 건드린 모양이다.
‘나쁘지 않네.’
차라리 잘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느 때보다 완벽한 시기였다. 원래는 바실리와 샤트린 공주가 약혼식을 무사히 치른 뒤에 파혼시킬 생각이었지만, 그가 스스로 파국의 불씨를 붙였으니 자신은 제때 장작만 넣어 주면 되리라.
율리아가 공주에게 말했다.
“바실리 마조람은 공주 전하께서 이렇게 화를 내실 만큼 가치 있는 남자가 아니에요.”
“그만 말하세요!”
공주를 달래던 시녀들이 율리아에게 나서지 말라고 충고했다. 물론 율리아는 그 말에 따를 생각이 전혀 없었다.
“그 남자는 공주님과는 껍데기뿐인 결혼식을 올리고, 뒤에선 저를 계속 만나려고 했어요. 가문을 위한 일이라면서, 우리 사이엔 아무 변화가 없을 거라고.”
“율리아 시녀, 그만 말하세요!”
“그래서?”
말리는 시녀를 밀어낸 샤트린 공주가 율리아에게 물었다.
“나보고 어쩌라는 거야?”
“저는 그 남자와 헤어졌어요. 평민이니까, 그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었거든요.”
율리아가 샤트린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하지만 전하는 다르시죠.”
샤트린은 아마 율리아와 바실리에 관한 소문을 다 주워들었을 것이다. 그러라고 아카데미 졸업식장이라는 공개된 장소에서 치정 싸움을 한 것이니까. 이렇게 많은 시녀를 거느리고 있는 공주가 그 일에 대해 모른다는 건 말이 되지 않는다.
율리아 아르테는 샤트린에게 있어 바실리 마조람의 용서할 수 없는 과거가 될 것이다.
이번에는 율리아가 샤트린에게 물었다.
“바실리를 용서하실 건가요?”
평소처럼 늦게까지 자다가 일어난 코코는 샤트린 공주가 갑자기 쳐들어와 율리아를 쥐어팬 뒤 돌아갔다는 소식을 들었다.
“너 정말 겁이 없구나.”
치장할 새도 없이 아래층으로 뛰어 내려온 코코가 율리아에게 말했다.
“간이 부어도 대단하게 부었어. 너 아주 사는 게 우습지? 세상에 무서운 게 있긴 하니?”
율리아는 식당에서 하녀들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하녀들이 부은 볼엔 얼음주머니를, 터진 입술엔 연고를 바르느라 난리였다.
“괜찮아요.”
“안 괜찮아요. 어휴, 공주님 성격이야 워낙에 유명하지만…… 그래도 너무했어요. 율리아 시녀님 잘못인가요, 이게?”
율리아의 볼에 차가운 주머니를 대고 부기를 가라앉히던 하녀가 버럭 화를 냈다. 그러다 그 곁에서 조심스레 연고를 바르던 하녀도 같이 화를 냈다.
“제가 이래 봬도 왕궁 들어온 지 8년 됐거든요? 이런 건 듣지도 보지도 못했어요. 잘못은 그 도련님이 했는데, 왜 여기 와서 엉뚱한 사람을 잡고 난리인지!”
“괜찮으니까 다들 그만해요.”
율리아가 피식 웃으며 하녀들을 달랬다.
“편들어 줘서 고마운데, 그래도 이쯤 해요. 말 한마디 잘못 꺼냈다간 여러분한테 불똥이 튈 수도 있어요.”
“그거야 그렇긴 한데…….”
하녀들이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은근히 기대하는 얼굴로 코코를 바라보기도 했다. 그들이야 신분이 낮아 공주가 저지른 일에 항의할 수 없지만, 코코는 왕자한테 가서 이 일을 일러바칠 수 있었으니까.
그런데 코코가 레위시아 왕자에게 달려가긴커녕 식당 한쪽에 주저앉아 하녀들에게 말했다.
“내가 아무리 막 나가는 사람이라고 해도 그렇지, 왕족을 상대로 어떻게 싸우니.”
“그런 게 아니고…….”
“왕자님도 곧 일어나실 텐데, 고자질은 너희가 하면 되잖아.”
하녀들은 불그스름해진 율리아의 얼굴을 보며 애써 고자질할 필요는 없겠다고 중얼거렸다. 딱 봐도 맞은 게 이렇게 티가 나는데, 레위시아 성격에 안 물어볼 리도 없었다.
치료를 끝낸 하녀들이 각자의 일터로 돌아갔다. 율리아는 반쯤 녹은 얼음주머니로 부은 뺨을 식히면서 코코의 곁으로 다가왔다.
코코가 턱을 괸 채 율리아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물었다.
“너 일부러 맞았니?”
“그런 건 아니에요.”
“그럼 맞아서 잘됐다고 생각하고 있나 보네.”
이번에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게 긍정의 뜻이라는 걸 아는 코코가 손바닥으로 이마를 짚었다.
“공주한테 뭐라고 했어?”
“별말 안 했어요. 그냥…… 바실리를 용서할 거냐고 물었죠.”
“그 말만 했다고?”
“저는 평민이니까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지만, 공주님은 다르지 않냐고.”
“미치겠네.”
코코가 율리아의 손에서 얼음주머니를 빼앗아 자신의 이마에 올렸다. 없던 두통이 생길 지경이었다.
율리아가 한 건 이간질이었다. 그것도 규모가 아주 큰 이간질.
“너 진짜 나쁜 애구나.”
“칭찬 고마워요.”
레위시아를 흉내 내며 능청스레 대답했더니, 코코가 그런 건 배우지 말라고 질색했다. 그러곤 율리아의 얼굴을 한참 들여다보다가 조그만 소리로 많이 아프냐고 물었다.
“괜찮아요.”
“한 번만 더 괜찮다고 하면 입을 꿰매 버릴 거야.”
“안 괜찮아요.”
너 때문에 내가 요즘 늙는 것 같다고, 코코가 시름을 삼켰다.
일이 이렇게 진행되어 기쁘긴 한데, 율리아가 걱정돼서 골치가 아픈 모양이었다.
“코코, 뭐 하나 물어봐도 돼요?”
“뭔데.”
“머리가 두 개인 뱀을 상대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 뭘까요.”
“너…….”
코코가 이마에 올려 두었던 얼음주머니가 툭 떨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