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2화 (24/319)

22화

5. 간혼질

왕비가 주최하는 새해맞이 연회는 오르테가 왕궁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큰 행사였다. 그건 대연회장을 가득 채운 귀족들의 수만 봐도 알 수 있었다.

바실리 마조람은 걸음마를 하게 된 이후부터 지금까지 쭉 이 연회의 귀빈이었다.

“마조람 영식, 오랜만입니다!”

“바실리 님, 그동안 잘 지내셨어요?”

이름도 기억나지 않는 귀족들이 바실리의 곁에 개미 떼처럼 모여들었다. 인사라도 한마디 받아 주면 기뻐하고, 어쩌다 이름이라도 기억해 주면 가족에게 돌아가 자랑으로 삼았다. 권력 가문의 후계자란 그런 것이었다.

그런데 이번 연회에는 어쩐지 그의 곁에 사람이 많지 않았다.

“크리스틴 영애? 정말 반갑습니다. 제가 누군지 기억하세요?”

“크리스틴! 세상에, 드디어 영애를 만나네요. 우리 아들이 아카데미에서 같은 강의를 들었었는데…….”

“이번 경연에 채택된 신년사를 쓰셨다고 들었습니다. 들었던 대로 대단하시네요.”

크리스틴이 바실리의 자리를 대신하고 있었다.

크리스틴은 아카데미에 다니는 동안 사교 활동을 거의 하지 않았다. 그래서 귀족들은 마조람의 금지옥엽이라는 그녀와 친분을 쌓을 기회가 많지 않았다.

바실리의 곁에 서 있던 크리스틴이 미소를 지으며 귀족들 속으로 섞여 들어갔다.

여동생의 당당한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자니 체한 듯 속이 쓰렸다. 깃을 세운 셔츠 칼라가 답답했다.

바실리는 목을 죄는 스카프 매듭에 손가락을 넣어 늘였다.

“그 평민 시녀가 레위시아 왕자 전하의 궁에 들어갔다죠?”

“그럼 마조람 영식과는 완전히 끝난 거겠네요?”

“당연하지요. 이제 곧 공주님과 약혼하잖아요. 쉿, 여기서 이런 얘긴 안 하는 게 좋겠어요. 공주님 자존심에 이상한 소문이라도 들으시면…… 어휴.”

이런 곳에선 듣기 싫어도 들리는 소리가 있다. 율리아와 관련된 말들은 어떻게 그렇게 선명하게 들리는지, 바실리는 갑자기 느껴지는 갈증에 억지로 침을 삼켜 목울대를 크게 움직였다.

“요즘 네게 실망이 크다. 자세한 얘기는 나중에 할 테니, 오늘은 공주께 잘해라.”

“……아버지.”

“실수 없어야 한다.”

마조람 후작은 바실리를 탐탁찮은 눈으로 훑어보곤 아내의 손을 잡고 파벌 귀족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갔다.

바실리는 연회장 중앙에 혼자 남았다.

기분이 좋지 않았다. 요즘엔 쭉 그랬다. 언제부터였더라. 율리아가 레위시아 왕자의 시녀가 된 이후였던가. 아니면 그보다 훨씬 전이었던가.

어디 한번 공주와 파혼해 보라던 율리아의 말이 떠올랐다.

“돌아가. 바실리 마조람, 네 가문으로 가서 말 잘 듣는 도련님으로 살아. 그러면 되잖아.”

그 말을 할 때 그녀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었더라.

‘머리 아파.’

바실리가 한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그를 손가락질하고 비웃는 소리가 멀리에서, 또 가까이에서 들렸다. 속이 울렁거리고 식은땀이 났다.

그때 연회장 한쪽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레위시아 2왕자가 나타났다.

바실리는 저도 모르게 그쪽으로 두어 걸음 다가갔다가, 어색하게 움직임을 멈췄다.

거기 율리아는 없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데도 율리아를 데려오지 않은 레위시아에게 화가 났다.

평민은 초대받을 수 없는 연회인 걸 아는 데도 그랬다.

느린 춤곡이 흘러나왔다. 자꾸만 목을 죄는 스카프를 반쯤 풀어헤친 그에게, 이번에는 공주와 그녀를 따르는 무리가 다가왔다.

“여기 있었구나.”

묵직한 치맛단이 연회장 바닥을 스치듯 흔들렸다. 그 아래엔 코가 뾰족한 구두가 있었다.

“바실리 마조람.”

고개를 들자, 적갈색 머리카락을 길게 늘어뜨린 샤트린 공주가 눈을 반쯤 내리뜬 채 그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주위에 있던 귀족들이 모두 공주를 향해 허리를 숙였다. 레위시아 왕자가 나타났을 때는 적당히 웅성거리다가 말았는데, 공주가 나타나니 확실하게 왕족에 대한 예우를 지켰다.

그런데 그들과는 달리 혼자 멀거니 서서 딴생각에 빠진 바실리를 보고, 샤트린 공주가 한쪽 눈썹을 비뚜름하게 추켜올렸다.

“바실리 마조람.”

샤트린이 그의 이름을 다시 불렀다.

공주를 모시는 시녀들이 언짢은 기색을 보였다. 바실리는 그때부터 이미 공주에게 실례를 저지르고 있었다. 먼저 인사하지 않았고, 손등에 키스하지도 않았으며, 부름에 대답조차 하지 않았다.

길을 잃은 그의 시선이 레위시아와 그를 따라 연회장에 들어서는 한 여자에게 닿았다.

설마 율리아인가? 사람이 많아 잘 보이지 않았다. 가까이 가서 보고 싶은데, 공주와 시녀들이 길을 막고 비켜 주질 않았다.

샤트린 공주가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오, 두 분 춤을 추려나 봐요!”

사람들은 모두 바실리가 공주의 손을 잡고 춤을 출 거라고 기대했다. 두 사람은 어차피 곧 결혼할 테니까.

바실리의 시선이 공주의 손에 닿았다. 그런데 그는 그 손을 잡지 않았다.

웅성거림이 커지고 공주의 얼굴에 희미하게나마 남아 있던 미소가 흔적도 없이 사라진 뒤에도 그는 공주의 손을 잡지 않았다.

“지금 뭐 하는…….”

“저는 공주 전하와 결혼하지 않습니다.”

재채기하듯 튀어나온 진심이었다. 바실리는 눈앞의 공주에게 재차 강조했다.

“다른 사람을 찾아보십시오.”

“뭐라고?”

“파혼하겠습니다.”

샤트린 공주가 그를 향해 내밀었던 손가락을 빠르게 말아쥐었다. 귀족들이 경악한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하얗게 화장한 공주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감히.

공주는 분노 섞인 신음을 흘리며 연회장에서 나가 버렸다.

* * *

새해맞이 연회에 함께 갔던 코코와 레위시아가 출발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아서 왕자궁으로 돌아왔다.

“율리아!”

두 사람이 늦게까지 돌아오지 않을 거라 여긴 율리아는 자신의 방에서 느긋하게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야, 율리아! 일어나 봐!”

그런데 갑자기 방문이 벌컥 열리더니 코코가 냅다 뛰어 들어왔다.

“미쳤어!”

“코코? 왜…… 벌써 돌아왔어요?”

“미쳤다고!”

“누가요?”

대답은 코코의 뒤를 이어 달려 들어온 레위시아가 했다.

“바실리 그 자식이 드디어 미쳤어. 미쳤다고!”

영문 모를 일이었다. 율리아가 두 사람에게 그게 무슨 소리냐고 묻자, 코코가 숨도 쉬지 않고 설명을 시작했다.

“바실리가 연회장에서, 그 많은 귀족이 다 보는 앞에서, 샤트린 공주한테 당신이랑 결혼 안 한다고 선언했어. 그 자식 미친 게 분명해. 미치지 않고서야 그런 짓을 저지를 수 있을 리가 없다고!”

“네?”

율리아에게도 코코의 말이 의외인 건 마찬가지였다. 잘못들은 줄 알고 물어보려 했는데, 이번엔 레위시아가 율리아의 방을 어지럽게 서성거리며 말했다.

“네가 그 장면을 봤어야 했는데. 샤트린이 바실리한테 손을 이렇게 내밀고 어서 내 손을 잡고 춤을 추라고 했는데, 그놈이 글쎄 그걸 싹 무시하고! 샤트린의 얼굴을 똑바로 보면서!”

“‘파혼하겠습니다.’”

코코가 비장한 얼굴로 바실리를 흉내 냈다. 레위시아는 내밀었던 손을 회수해 주먹을 말아쥐곤 몸을 홱 돌렸다.

“샤트린이 그렇게까지 화난 거 오랜만에 봤어. 하필 건드려도 샤트린의 자존심을 건드리다니, 바실리 마조람은 이제 눈에 뵈는 게 없는 모양이지? 걔가 얼마나 성질이 더러운데.”

율리아가 어떻게 된 일이냐고 되물을 새도 없었다. 완벽하게 재연까지 선보인 레위시아와 코코가 율리아의 방 소파에 앉아 그녀를 바라보았다.

“이거 아무래도 바실리가 너를 정말로 사랑하는 것 같은데? 그냥…… 평민한테 차인 게 자존심이 상해서 그러는 줄 알았는데, 자꾸 찾아오는 것도 모자라서 감히 그놈 주제에 공주를.”

“사랑이라뇨. 열등감 때문이에요. 신분 덕에 늘 관계적 우위에 있던 바실리가 율리아에게 대차게 차였잖아요. 그게 뭘 뜻하는지 아세요?”

“뭘 뜻하는데.”

“이제는 율리아가 관계적 우위에 섰다는 말이에요. 평생 여동생한테 열등감을 느끼며 살아온 바실리가 그걸 견딜 수 있을 리가 없잖아요. 결국엔 과거에 집착해서 폭력적으로 변하거나…… 충동적이고 무모해지죠.”

역시 코코였다. 율리아는 그녀의 말에 공감했다.

“율리아, 왕가와 마조람은 한 몸이야. 머리가 두 개인 뱀이지. 절대 서로에게 상처를 내선 안 돼. 그런데 바실리가 그 불문율을 깼어. 왕은 몹시 불쾌해할 거고, 후작은 미친 듯이 화를 낼 거야. 그런 뒤엔 희생양을 찾겠지.”

코코가 속사포처럼 말을 쏟아냈다. 역시 과거에 율리아와 함께 마조람에 대적했던 사람다웠다. 그녀는 이때 이미 왕가와 마조람의 본질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었다.

“마조람 후작이 널 다시 죽이려고 할 거야. 조심해야 해.”

레위시아도 율리아에게 당부했다.

“코코 말이 맞아. 당분간 궁 밖으론 한 걸음도 나가지 마. 여긴 안전하니까.”

왕자궁이라고 안전하리란 보장은 없지만 율리아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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