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화
며칠이 지나 오르테가 왕궁의 새해맞이 연회가 코앞으로 다가왔다. 율리아는 왕자궁으로 배달된 코코의 드레스를 하녀들과 함께 구경하고 있었다.
“빨간색은 별로예요. 머리카락도 눈동자도 빨간색인데, 옷까지 빨간색이면 좀.”
“색이라는 게 잘 통일하면 세련돼 보이기도 하는 거야. 허리띠랑 볼레로를 다른 색으로 잘 매치해서…….”
“그냥 이거 입어요.”
율리아가 고른 건 아주 짙은 녹색 드레스였다. 은은한 광택이 도는 원단에 검은 속치마와 레이스가 화려하게 어우러져, 코코가 입으면 맞춘 것처럼 어울릴 것 같았다.
그런데 코코가 눈살을 찡그리고 입술을 실룩거렸다.
“싫어. 그건 내가 입으려고 산 거 아니야.”
“무슨 소리예요. 연회용 드레스로 맞춘 거라면서요. 디자이너가 직접 배달까지 해 줬는데.”
“아무튼, 내가 아니라면 아닌 거야. 넌 왜 그렇게 말이 많니?”
드레스 골라 달라고 불러 놓고는 왜 구박이지. 율리아가 눈동자를 스르륵 굴리며 코코의 전속 하녀들을 바라보았다.
하녀들이 콧바람을 흥흥 불면서 웃었다.
“아이참, 저희 아가씨가 왜 입지도 않을 드레스를 주문하셨을까요? 이 궁엔 드레스 입을 사람이 둘뿐인데 말이에요. 아가씨가 안 입으면 다른 한 분이 입어야 하지 않을까요?”
“그게 무슨 말이에요.”
“이 녹색 드레스를 보자마자 누가 떠올랐을 수도 있지요. 눈동자가 에메랄드처럼 영롱한 어떤 시녀님이라거나…….”
하녀들이 노래하듯 말을 이었다. 중간중간 놀리는 것 같은 웃음소리가 끼어 있어, 코코의 미간에 갈수록 주름이 졌다.
율리아가 한숨과 웃음을 동시에 흘리며 말했다.
“코코, 저는 새해맞이 연회에 안 가요. 아니, 못 가요.”
“뭐래. 누가 거기 데려간대?”
“이 드레스는 코코가 입어요.”
“시끄러워! 그거 내 거 아니라고 몇 번을…….”
“그럼 내 거야?”
갑자기 레위시아가 나타나 물었다. 노크도 없이 문을 열고 들어온 왕자가 문제의 녹색 드레스를 손에 들고 거울 앞에 서서 제 몸에 대보았다.
“뭐야, 내 거네.”
아니라고 짜증을 내려던 코코가 천천히 입을 다물었다. 하녀들도 차마 아니라고 못 하고 침묵을 지켰다.
율리아가 그들의 심정을 대신해서 말해 주었다.
“진짜 잘 어울리네요.”
코코가 사 온 녹색 드레스는 레위시아의 긴 금발과 흰 피부에 치명적일 정도로 잘 어울렸다. 그가 한 손으로 머리카락을 대충 끌어모아 틀어 올리는 시늉을 하자, 코코의 전속 하녀들이 고개를 저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레위시아가 콧대를 높이 들더니 거울 너머로 코코와 율리아를 바라보며 말했다.
“둘 다 반성해. 이 예쁜 드레스가 왜 하필 나한테 제일 잘 어울리는 건데? 난 남잔데.”
“누가 그렇게 생기래요?”
코코가 짜증을 내며 쏘아붙였다. 물론 레위시아는 계속해서 그녀를 놀릴 뿐이었다.
“내가 코코보다 예쁘게 태어난 걸 어떡하라고. 그냥 그러려니 하고 살아. 사람이 사는 데 외모가 전부는 아니잖아. 그렇지, 율리아?”
“당장 내려놔요. 그건 율리아 거예요. 무슨 남자가 여자 옷을 탐내요? 가서 새해맞이 연회에 입고 갈 남성용 예복이나 고르세요.”
“난 너보다 예뻐서 아무거나 입어도 잘 어울려. 굳이 신경 써서 고를 필요가 없지.”
율리아는 그때 코코가 입 모양으로 ‘재수 없어’라고 말하는 모습을 보았다.
이쯤에서 말려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래도 자신은 이 궁에서 두 사람이 싸울 때 진정시키는 역할을 맡게 된 것 같았다.
“코코, 마음은 정말 고마운데요. 새해맞이 연회는 초대장을 받은 귀족만 갈 수 있는 곳이잖아요. 제가 왕자님의 측근 시녀라고는 해도, 거기엔 못 따라가요.”
“시끄러워. 누가 그걸 모르니?”
코코가 레위시아에게 다가가 그의 손에서 드레스를 빼앗았다. 그러곤 의자에 앉아 있던 율리아의 무릎에 팽개치듯 내려놓았다.
“버리든지 말든지! 입기 싫으면 덮고 자든지! 비싼 거니까 되팔아서 과자나 사 먹든지!”
과거에 만났던 코코도 솔직하지 못한 성격이긴 했지만, 이맘때의 코코는 그 정도가 아주 심했던 것 같다.
율리아는 터지려는 웃음을 간신히 참고 드레스를 조심스레 품에 안았다.
“고마워요. 이렇게 예쁜 드레스는 처음 봐요. 죽을 때까지 소중히 간직할게요.”
코코가 흥, 하고 콧방귀를 뀌었다.
“뭐래. 대충 입다 버려. 선물은 너무 부담스럽게 받아도 안 되는 거야. 주는 사람은 줄 생각을 할 때부터 고를 때, 줄 때 기분이 좋으니까 그걸로 된 거고. 받는 사람은 아끼다가 쓰레기 만들지 말고 유용하게 잘 쓰면 되는 거고.”
“네, 잘 입을게요.”
“그래도 남자가 주는 선물은 조심해. 어릴 때 아버지가 그러셨는데, 남자는 관심 없는 여자한테 선물 따위 주지 않는대. 비싼 선물일수록 비싼 대가를 치러야 한댔어.”
“와, 굉장한 편견인데? 나 쟤한테 엄청 비싼 선물 줬는데 그거 네가 빼앗아갔잖아.”
레위시아가 또 눈치 없이 끼어들었다. 그러자 코코의 인내심도 바닥이 났다.
“뺏은 거 아니라고 말했잖아요! 도대체 왜 이렇게 절 못 잡아먹어서 안달이에요? 그러니까 그 나이가 되도록 파트너 삼을 영애 하나 없이 혼자인 거예요! 영애들이 전하를 왜 그렇게 싫어하는지 저는 아주 잘 알겠거든요!”
“왜긴 왜야. 내가 걔들보다 예쁘니까 비교당해서…….”
“레위시아 전하!”
“파트너 없는 건 코코도 마찬가지잖아. 하하하! 남 말하고 있네?”
드레스를 꼭 끌어안은 채 두 사람이 다투는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율리아에게 그 순간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두 분이 서로의 파트너가 되면 되잖아요.”
여기서 이러고 싸우는 걸 보니 연회장에 가서도 서로를 잘 지켜 줄 것 같다고, 율리아가 천연덕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그러자 개와 원숭이처럼 다투던 두 사람이 입을 딱 다물었다.
코코 다음엔 레위시아였다.
율리아는 코코와 함께 레위시아의 방으로 가서 이번에는 그의 예복을 골라 주었다. 물론 코코는 귀찮고 싫은 기색이었다.
“그냥 아무거나 입어요.”
“뭐야, 뭐가 이렇게 성의가 없어?”
“아무거나 다 잘 어울리니까, 그냥 아무거나 입으세요.”
코코가 옷을 보지도 않고 대충 가리키며 말하자, 레위시아가 서운하다며 툴툴거렸다.
그래도 모시는 왕족이 연회에 나간다는데 아예 모른 척할 수는 없었던 율리아가 코코 대신 일어나 옷 방을 오갔다. 그리고 왕자의 예복에 어울리는 스카프와 구두, 어깨 장식 등을 골라 주었다.
흰 셔츠에 적갈색 조끼를 입은 레위시아가 율리아가 골라 준 황금색 어깨 장식을 두르며 말했다.
“그래서…… 우리 똑똑한 평민 시녀님은 바실리를 그렇게 뒤흔들고 조종해서 뭐가 어떻게 되길 바라는지 물어봐도 될까.”
훅 들어온 질문에 율리아가 속눈썹을 빠르게 깜박였다.
“그동안 그놈 아픈 데만 골라서 푹푹 찔렀잖아. 나는 율리아가 너 때문에 내 목숨이 위험해진다고 말했을 때, 그놈이 그래도 양심이라는 게 있으면 미안하다고 사과할 줄 알았거든.”
레위시아는 그가 율리아와 바실리의 대화를 엿들었다는 걸 숨길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코코가 입술을 비틀며 말했다.
“사과는커녕 화를 냈죠.”
레위시아도 그녀의 말에 동의했다.
“그래도 공주랑 파혼하겠다고 말했을 때는 좀 놀랐어. 겁쟁이 이기주의자인 줄만 알았는데, 정신 나간 이기주의자였더라고?”
“웃겨. 허세일 거예요. 제까짓 게 무슨 파혼이야. 그건 바실리와 공주의 결혼이 아니라, 마조람과 왕가의 계약인데.”
“율리아, 너한테는 미안한 말이지만 난 바실리가 쉽게 포기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요즘 사는 게 즐겁거든. 그 자식이 넋 나간 얼굴로 내 궁에 찾아와서 율리아한테 매달릴 때마다 왕궁에서 태어나길 잘했다는 생각이 든단 말이야.”
“저도요. 경연 때 크리스틴 마조람이 도망치듯 뛰쳐나가던 모습만 떠올리면 그렇게 소화가 잘 되더라고요.”
“내 시녀지만 넌 정말 성질이 더럽구나, 코코.”
“전하도 만만치 않아요.”
둘 다 정말 악질이었다. 그런데 그게 자신을 신경 써서 하는 말이라는 걸 알기에 웃지 않을 수가 없었다. 율리아가 고개를 돌리며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전 괜찮은데요.”
“야, 넌 그 괜찮다는 말 좀 그만해. 안 괜찮은 게 당연한데 자꾸 괜찮다고 하니까 멍청이들이 진짜 괜찮은 줄 알고 자꾸 건드리잖아.”
“진짜 괜찮아요.”
“아, 답답해. 전하, 얘한테 뭐라고 좀 하세요.”
“율리아, 참지 마. 욕하고 소리치고 집어던져. 바실리 같은 머저리한테 버림받은 것도 자존심 상하는데, 저 새끼가 끝까지 추접스럽게 매달려서 넌 지금 몹시 화가 나고 우울한 상태야. 그러니까 내 방 말고 네 방에 가서, 비싼 거 말고…… 싼 거 던지고 부수면서 놀아.”
“네?”
“명령이야.”
“……네.”
“제길, 나한테 닭살 돋았어.”
웬일로 다정한 소리를 하나 했더니, 레위시아가 팔뚝을 벅벅 긁었다. 코코는 그런 왕자를 흘겨보며 웃었다.
“고맙습니다.”
율리아가 중얼거렸다. 얼떨결에 나온 진심이었다.
왕궁에 들어오길 잘한 것 같다. 시녀가 된 지 며칠 되지도 않았는데 이런 생각을 하는 자신이 낯설었다.
다 코코 덕분이었다.
삶을 반복하면서 독기와 증오만 남은 자신에게 다가와 처음으로 손을 내밀어 준 사람. 코코가 시킨 대로 했더니 이 지독한 저주에 걸리기 전, 스물한 살의 율리아 아르테로 돌아갈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왜 웃어?”
레위시아가 겸연쩍어하며 물었다. 그도 조금은 창피한 모양이었다.
“레위시아 전하.”
“왜?”
“얼마 안 남았어요. 조금만 기다리시면, 지금보다 훨씬 좋은 소식이 들릴 거예요.”
약속할게요. 율리아가 말하자, 레위시아와 코코가 장난을 멈추고 진지한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바실리는 그리 대단한 적이 아니었다. 지금 그가 하는 일은 사실 훨씬 더 큰 공격을 가리기 위한 암막에 불과하다.
율리아가 선택한 우두머리 늑대, 카루스 란케아가 바다 위에서 남부 함대와 해적의 부적절한 관계를 깨부수고 있었다.
그녀는 후작의 눈을 가리기 위해 바실리라는 배우를 썼다.
그의 소꿉놀이에 어울려 주면서 뒤로는 늑대를 풀었다. 제국에서 온, 무혈 제독이라는 늑대였다.
저들에게 말해 줄 수 있으면 좋으련만. 아직은 그럴 수가 없었다. 코코는 과거의 그녀가 아니기에 처음부터 신뢰를 쌓아야 했고, 레위시아는 이 싸움에서 어떤 역할을 하게 될지 확신이 서지 않아 그랬다.
“……기대하지.”
입술을 달싹이며 뭔가를 캐물으려던 레위시아가 기대한다는 말로 긴 대화를 마무리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