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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화 (22/319)

20화

왕자궁을 떠난 맥스웰은 그 길로 항구까지 달려갔다. 그곳엔 카루스와 바바슬로프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맥스웰은 율리아의 말을 그대로 전했고, 카루스는 그저 기가 막혀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그가 바다 위에서 군함 한 척을 쓰러뜨리고 병사들을 처형하면서 얻었던 것보다 더 정확한 정보가 율리아에게 있었다.

“가자.”

“어디로요?”

“맥스웰은 그 애인이라는 여자를 확보하고, 나머지는 나와 함께 사령관을 잡으러 간다.”

카루스가 망토를 둘러쓴 채 먼저 말에 올랐다. 그의 시선이 또 한 번 오르테가 왕궁이 있는 방향으로 향했다.

율리아 아르테.

어둠 속에서 마주하면 색을 구별하기 어려울 만큼 짙었던 녹색 눈동자. 그 눈이 떠올랐다.

아홉 번째를 살고 있다던 그녀의 말도.

* * *

바실리가 정식으로 방문 요청을 했다.

놀란 레위시아가 율리아를 바라보았다. 코코도 율리아를 바라보았다. 그 소식을 전하러 온 시종도 율리아를 바라보았다.

“왜…… 다들 저를 보세요.”

“그럼 누굴 봐.”

“정식으로 방문을 요청했다잖아요. 전하께 용건이 있을 수도 있는 거고.”

“네가 지난번에 예의와 절차를 모두 밟아서 오라고 경고했잖아. 안 그러면 왕족의 측근 시녀인 너를 우습게 여기는 거라며.”

레위시아가 지적하자, 율리아가 할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말이 옳았다. 바실리가 용건을 가지고 찾아올 사람은 이 궁에 그녀뿐이었다.

“언제 온다고 하던가요?”

“벌써 궁 앞에 와서 기다리고 있습니다.”

“예의가 반만 있었군.”

레위시아가 비웃음을 가득 담아 말했다. 코코도 동감한다며 욕설을 내뱉었다.

“야, 밖에서 단둘이 만나지 말고 안으로 들어오라고 해.”

코코가 경고했다.

“바실리가 지금은 너한테 엎드려 빌고 있어도 궁지에 몰리면 이빨을 보이기 마련이야. 우리가 가까이에 있어야 해코지할 생각을 안 하지. 궁 안에서 만나.”

율리아는 그녀의 말대로 했다. 바실리에게 궁 안으로 들어오라고 한 뒤, 응접실 하나를 빌려 그 안에서 그를 만났다.

바실리는 며칠 새 얼굴이 많이 상해 있었다. 하지만 그를 바라보는 율리아의 시선에선 동정심 한 자락조차 찾아볼 수 없었다.

차를 가져온 하녀가 도망치듯 응접실을 떠난 뒤에야 바실리는 어렵게 말을 꺼냈다.

“집사에게 들었어. 그가 정말로 네게 그런 잔인한 짓을 저질렀다고…… 그래, 들었어. 집사를 벌하고 싶은데, 아버지가 막고 계셔서 그럴 수가 없어.”

또 변명이었다. 지긋지긋했다. 왜 여기까지 와서 자꾸 이런 변명을 늘어놓느냐고 쏘아붙이고 싶었지만, 율리아는 그냥 가만히 서 있는 쪽을 택했다. 대신 신중한 태도로 그를 관찰하기 시작했다.

“미안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다 할게. 공주와는 결혼하지 않을 거고, 너를 왕궁에서 꺼내 줄 거야. 율리아, 그러니까 조금만 기다려 줄래?”

뭔가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과거의 바실리는 율리아를 달래기 위해 온갖 변명을 늘어놓긴 했어도 가문을 배신하거나 후작의 명령을 거부하는 짓은 하지 못했다.

그런데 이번 생의 바실리는 조금 달랐다. 그는 꼭 쫓기는 사람처럼 보였다. 율리아가 제 손아귀에서 빠져나가는 게 두려워 불안해하는 것 같기도 했다.

왕궁에 들어왔기 때문일까. 아니면 레위시아 왕자의 손을 잡았기 때문인가. 그것도 아니면 자신도 모르는 무언가가 바실리에게 어떤 영향을 주었나.

율리아는 이번 생에서 자신의 행동을 빠르게 반추해 보았다.

“율리아, 듣고 있어? 아버지께 말씀드렸어. 공주와는 결혼하지 않겠다고.”

바실리는 그걸 자신의 최선이라고 생각했다. 그에게 후작인 아버지를 거역한다는 건 굉장한 용기가 필요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오르테가에서 마조람의 영향력이 막강하듯, 마조람 가문 내에서 후작의 권력은 왕이나 다를 바가 없었다.

후작은커녕 집사에게조차 대들지 못하는 유약한 후계자. 바실리 마조람은 그런 남자였다.

한때는 그의 나약함이 태생적인 문제라고 판단했지만, 이제 와 자세히 보니 어쩌면 나약해질 수밖에 없는 환경에서 자랐기 때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문에서 왕처럼 군림하는 아버지, 아름답고 영리해 태어났을 때부터 온갖 관심과 사랑을 독차지했던 여동생.

바실리는 그 안에서 제 나름의 길을 도모한 것이다.

강자가 되면 필연적으로 누군가와 싸워야 할 테니, 차라리 약자가 되기를 선택한 남자.

율리아가 의심스러워하며 물었다.

“공주 전하와 결혼하지 않겠다고 말씀드렸다고? 네가? 후작님께 직접?”

“그래.”

바실리가 활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집사에게 전달하라고 하긴 했지만 직접 한 것이나 다를 게 없다고 생각하면서.

그 조잡한 거짓말까지 금세 간파한 율리아가 두 눈을 가느스름하게 뜨며 다시 물었다.

“진심이야?”

“당연히 진심이지. 율리아, 나한테는 너뿐이라고 했잖아. 공주와 파혼하면 당분간 나한테 결혼하라고 강요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거야. 왕족의 자존심과도 연관되어 있으니까.”

“그걸 그렇게 잘 알면서…….”

“널 사랑하니까.”

바실리가 절박함을 가득 담아 말했다.

율리아의 시선이 그의 눈동자와 눈썹의 떨림, 입술의 움직임을 꼼꼼히 살폈다. 초조해 보이는 숨소리에 살짝 앞으로 기운 몸, 그리고 자꾸만 비비듯 쥐었다 펴는 주먹.

관찰을 마친 율리아가 냉정하게 말했다.

“바실리, 거짓말하지 마. 넌 공주 전하와 파혼할 수 없어.”

“왜 그렇게 말하는 거야?”

“가문조차 버리지 못한 네가 왕족의 명예에 정면으로 맞서다니, 착각도 정도껏 해. 어차피 집사나 하인에게 말해 놓고 전하라는 정도였겠지.”

“율리아!”

“도대체 몇 번을 말해야 알아들을지 모르겠는데, 난 이제 너와는 상관없는 사람이야.”

사랑이 끝났다는 걸 알게 되는 순간은 의외로 아주 사소하다.

관심은 귀찮아지고 스침은 짜증스럽다. 어떻게 하면 조금이라도 덜 마주할 수 있을까 고민하고, 좋은 기억을 버리고 나쁜 기억만 되새긴다.

바실리는 아직 그 첫 단계에도 닿지 않았다. 율리아는 그와 자신의 마음의 거리가 여덟 번의 죽음만큼 멀다는 사실만 다시 깨달았을 뿐이었다.

율리아는 그가 성가셨다. 귀찮고 한심했다.

바실리가 그녀를 위해 아홉 번을 다시 살아도 이 관계는 되돌리기 어려울 거란 걸 어떻게 이해시켜야 할까.

“정신 차려. 공주 전하와의 결혼을 뒤엎는 순간, 넌 지금까지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거센 가문의 압박을 받게 될 거고, 네 아버지를 피해 왕궁으로 도망친 나는 이 안에서조차 목숨의 위협을 받게 될 거야.”

“그럼 도대체 왜 나한테 파혼하라고 한 거야!”

바실리가 크게 소리쳤다.

그는 조금씩 평정을 잃어 가고 있었다. 변해 버린 율리아가 낯설면서 간절했다. 그런데 그가 아무리 발악해도 흠집조차 나지 않을 만큼 단단한 벽이 둘 사이를 가로막아 버렸다.

“돌아가. 바실리 마조람, 네 가문으로 가서 말 잘 듣는 도련님으로 살아. 그러면 되잖아.”

그리고 그 잘난 가문이 바닥에서부터 천천히 무너지는 걸 두 눈으로 똑똑히 지켜봐.

율리아가 뒤돌아섰다. 조급해진 바실리가 그녀의 손목을 잡아챘다.

“율리아.”

“이거 놔.”

“반지가 왜 없어?”

지금 이 상황에 반지 따위가 중요하냐고, 율리아가 눈으로 물었다. 그런데 바실리는 텅 빈 그녀의 손가락에 두 눈을 고정하고 움직일 줄을 몰랐다.

“그렇게 좋아했으면서…… 이렇게 예쁜 반지는 태어나서 처음 본다고 했잖아. 죽을 때까지 소중히 간직하겠다고.”

“버렸어.”

“율리아…… 너.”

“아까워하지 마. 어차피 공주의 남편이 되면 훨씬 더 좋은 걸 끼게 될 텐데.”

율리아가 바실리의 손을 세게 뿌리쳤다. 그는 힘없이 떨어지는 자신의 손가락을 멀거니 바라보고 있었다.

“돌아가세요, 마조람 영식. 가서 한번 확인해 보든가요. 집사가 과연 당신의 말을 전했는지.”

가슴이 아프다 못해 답답했다. 율리아의 찬웃음이 그물처럼 바실리의 영혼을 얽매어 깊이 가라앉혔다.

힘없이 저택으로 돌아간 바실리가 다시 집사를 찾았다. 그러곤 그에게 물었다.

“아버지한테 말했어?”

“무엇을 말입니까?”

“공주와 절대 결혼하지 않겠다고, 그렇게 전하라고 했잖아. 말했냐고!”

“도련님.”

집사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골치 아픈 어린애를 대하듯 성가시다는 투였다.

“정신 차리십시오. 후작님께서 아시면 정말 큰일 납니다.”

“……안 했구나.”

바실리의 자존심에 크게 금이 갔다. 쩍쩍 갈라져 틈이 생겼다. 집사가 그를 주인으로 여기지 않는다는 사실은 알았지만, 이 정도로 무시하고 있는 줄은 몰랐다.

“왕족과의 혼인입니다. 가문의 일이란 말입니다. 도련님께서 그렇게 막무가내로 결정하실 일이 아니에요.”

“집사.”

“그만 방으로 들어가세요. 못들은 걸로 할 테니까, 다시는 그런 말 하지 마십시오.”

“내가 누구지?”

바실리가 물었다. 집사는 돌아서려 했지만, 그가 연달아 세 번이나 똑같은 질문을 하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대답해 주었다.

“바실리 도련님입니다.”

“내가 네 주인이긴 해?”

“……후작이 되십시오. 저뿐만 아니라, 이 저택에서 일하는 모든 이들의 주인이 되실 겁니다.”

그러니까, 지금은 아니란 말이었다.

“이러다 아가씨께서 후계자가 되면 어떻게 하려고 그러십니까, 예? 제발 정신 차리세요.”

“뭐? 그게 무슨…… 무슨 말이야? 무슨 소리냐고!”

“후작님께는 자식이 둘이지 않습니까. 크리스틴 아가씨가 가주 자리에 욕심이 있다는 걸 정말 모르시는 건 아니지요?”

“아버지가 그랬어?”

식은땀이 흘렀다. 집사의 얼굴에 아버지의 얼굴이 겹쳐지고, 그 위에 크리스틴의 얼굴이 겹쳐졌다.

가서 말 잘 듣는 도련님으로나 살라던 율리아의 목소리가 환청처럼 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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