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화
“세상에, 코코.”
레위시아가 포크로 코코를 가리키며 짐짓 엄한 얼굴을 했다.
“난 내 시녀를 칭찬하지도 못해?”
“네, 하지 마세요.”
“왜?”
“놀리려고 그러는 거잖아요.”
정곡을 찔린 레위시아가 입맛이 떨어졌다며 포크를 내려놓았다. 코코가 그를 한심하다는 얼굴로 쏘아보았다.
율리아는 그런 두 사람의 모습을 관찰하다가 조용히 말했다.
“문장에 익숙한 건 마조람 후작 덕분이에요.”
“그게 무슨 소리야?”
“아카데미에 다니는 동안, 후원금을 받는 대가로 대필을 했어요. 후작 가문 정도 되면 별로 중요하지 않은 서신에도 답을 해야 할 일이 많으니까요. 주로 후작 부인과 크리스틴 마조람의 사교용 초대장과 원로들에게 보내는 정기적인 안부 편지를 썼어요.”
코코와 레위시아가 동시에 입을 떡 벌렸다가, 동시에 욕을 했다. 율리아는 살짝 웃으며 다시 말했다.
“나중에는 왕족께 보내는 의무적인 안부 서신도 대신 쓰게 시키더라고요.”
“뭐야? 그럼 내가 지금까지 받아 온 마조람 후작가에서 보낸 연하장이 전부 네가 쓴 거였단 말이야?”
“아마도요.”
“……읽어 볼걸.”
레위시아가 중얼거린 말에 율리아가 가볍게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안 읽으셨어요?”
“읽긴 뭘 읽어. 전부 박박 찢어서 불태워 버렸을걸. 마조람이 묻었다면서 손 씻고 후추도 뿌렸겠지. 재수 옴 붙었다고.”
코코가 비아냥거리자 레위시아가 그 정도는 아니었다며 주섬주섬 변명을 주워 삼켰다. 그러더니 포도주를 물 마시듯 벌컥벌컥 마시다가 갑자기 눈을 크게 뜨고 벌떡 일어났다.
“코코!”
“왜요.”
“너 그거 어디서 났어?”
무슨 소리지. 율리아와 코코가 동시에 레위시아를 바라보았다.
그가 뭔가를 손가락으로 가리키고 있었다. 자세히 보니, 코코의 머리에서 반짝거리며 비싼 자태를 뽐내고 있는 진주 장식 티아라였다.
“그거 내가 어제 율리아 준 건데, 너 그거 어디서 났어? 설마 뺏었어? 아무리 선배 시녀가 후배 잡는 건 왕궁 불문율이라고 하지만…… 어떻게 내 궁에서 텃세를 부릴 수가 있어? 코델리아 힌치, 그렇게 안 봤는데.”
“뭐라고 하시는 거예요, 진짜.”
코코가 왈칵 신경질을 냈다.
“뺏긴 누가 뺏어요. 율리아가 나한테 고맙다고 준 거예요.”
“뺏은 게 아니고?”
“왕자님은 나랑 그렇게 오랜 시간을 함께 지냈으면서 아직도 날 몰라요? 내가 이깟 머리 장식 하나 돈 주고 못 살 사람이에요? 그리고, 괴롭힐 생각이었으면 첫날 바로 쫓아냈을 거예요. 내가 그 정도도 못 할 사람으로 보여요?”
말다툼으로 번지기 일보 직전이었다. 코코의 목소리가 점점 높아지고 있었다. 율리아는 이쯤에서 두 사람을 말려야 하나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레위시아가 만족스럽게 웃으며 말했다.
“역시 코코는 놀리는 맛이 있다니까.”
“뭐…….”
레위시아는 눈웃음까지 치면서 기분 좋게 웃고 있는데, 코코의 얼굴은 싸늘하게 굳어만 갔다.
이러다 그녀가 진짜로 화를 낼 것 같았는지, 레위시아가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율리아에게 말했다.
“오늘 손님이 있다고 했지? 경연장에서 만났던 두 사람.”
“네, 전하. 가볍게 차를 마시는 자리일 거예요. 저희는 가까이에서 대기하고 있겠습니다.”
“그래, 필요하면 부를게.”
레위시아가 냅킨으로 입을 닦고 몸을 돌렸다. 그런 그의 뒤통수에 대고 코코가 짜증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너무 멋 부린 차림새는 안 돼요. 적당히 차려입되 편안해 보여야 하니까, 재킷과 스카프는 빼고 조끼를 걸치세요. 그 치렁치렁한 긴 머리도 좀 묶고요. 담배를 권하거든 시녀들이 잔소리해서 끊었다고 하시고, 고급 포도주를 대접하세요.”
“알았어, 코코 엄마.”
“전하!”
레위시아가 하하 큰 소리로 웃으며 식당을 떠났다.
율리아는 코코가 한 손으로 이마를 짚으며 입술로 욕하는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두 분 사이가 좋아 보여요.”
“너 미쳤니?”
코코는 진심으로 기분 나빠 보였다.
율리아는 시녀가 모시는 왕족과 사이가 좋아 보인다는 말이 그렇게 기분 나쁠 일인가 싶었지만, 코코가 레위시아 왕자를 말 안 듣는 남동생처럼 여기고 있다는 걸 알기에 그냥 입을 다물었다.
첫 경연 이후 열흘이 지났다. 오르테가의 국왕은 크리스틴이 쓰고 1왕자가 제출한 신년사를 몇 개의 공물과 함께 제국으로 보냈다.
율리아는 2왕자궁에서의 생활에 금세 익숙해졌다. 하녀들은 이제 복도에서 율리아와 마주쳐도 당황하지 않았고, 그녀의 겸손한 태도에 미소를 돌려주기도 했다.
곧 새해맞이 연회가 열릴 예정이었다. 매년 봄에 왕비의 주최로 열리는 이 행사는 오르테가 왕국의 주력 귀족들이 모두 참석하는 아주 큰 연회였다.
레위시아와 코코는 그 연회에 파트너로 누굴 데려가야 할지 고민 중이었다.
율리아는 평민이라 어차피 초대받지 못할 것이기에, 그런 두 사람을 느긋하게 구경했다.
‘모든 일에는 순서가 있어.’
생각이 많았다. 왕궁 안에서 그녀가 목표로 했던 것들을 이루려면 조급하게 굴어선 안 되었다. 지금은 주연 배우들이 각자 배역에 몰입하도록 한걸음 떨어진 곳에서 유도하는 게 중요했다.
아직은 시간이 좀 더 필요했다. 기다리는 건 지루하지만, 그리 오래 걸리지 않을 걸 알기에 참을 수 있었다.
늦은 저녁이었다.
커다란 상점 마차가 왕자궁 앞에 나타났다. 드레스 상자를 싣고 왔던 그 마차였다. 율리아에게 유독 친절한 시종이 재빨리 그녀에게 달려와 소식을 알렸다.
“율리아 시녀님! 주문하신 물건이 도착했다고 합니다.”
율리아가 미묘하게 굳은 얼굴로 밖으로 걸어 나왔다. 반가우면서도 의심스러웠다.
“안녕하십니까, 율리아 시녀님. 주문하신 물건입니다. 상자가 무척 무거운데 안으로 들어다 드릴까요?”
마차에서 내린 자는 공손한 태도로 율리아를 대했다. 실제로 상자가 굉장히 묵직했기에, 시종이 그러겠느냐며 율리아를 바라보았다.
“네, 그러는 게 좋겠어요. 부탁합니다.”
“예, 그럼 안내해 주십시오.”
네 명이나 되는 일꾼이 하나의 상자를 함께 들었다. 그들은 시종의 안내를 받아 율리아의 방으로 상자를 가져다주었다.
“여기 서명해 주시면 됩니다.”
처음 마차에서 내렸던 남자가 율리아에게 다가와 주문서를 내밀었다. 그녀는 차분한 태도로 종이를 훑어보다가 문 앞에 서 있는 시종에게 말했다.
“그만 가 보셔도 돼요. 알려 주셔서 고마워요.”
“예, 시녀님. 필요한 일이 있으면 부르세요.”
시종이 별 의심 없이 물러가고, 상자를 들고 왔던 일꾼들도 모두 마차로 돌아가기 위해 방 밖으로 나갔다.
안엔 율리아와 주문서를 들고 온 남자만 남아 있었다.
“당신이 맥스웰인가요?”
율리아가 물었다.
더벅머리 때문에 눈매가 가려져 인상을 알기 어려웠다. 지극히 평범하면서도 어딘가 모르게 위험한 느낌이 드는 남자였다.
“어떻게 아셨습니까?”
맥스웰이 어깨를 으쓱하자, 율리아가 주문서라며 받은 종이를 들어 올렸다. 거기엔 아무것도 적혀 있지 않았다.
“직접 올 줄은 몰랐는데, 무슨 일인지 물어봐도 되나요?”
“음……. 일단 상자부터.”
맥스웰이 씩 웃더니 방 한쪽에 놓아 둔 상자의 뚜껑을 열었다.
“……아.”
율리아가 저도 모르게 작은 감탄사를 내뱉었다. 그녀의 눈동자에 놀람과 경탄의 빛이 어렸다.
상자 속엔 번쩍거리는 금화가 가득 들어 있었다.
“우리 후원자님이 보내시는 겁니다. 일을 도모할 때는 현찰이 필요한 법이라면서. 아, 물론 공짜는 아닙니다? 대가로 뭘 좀 물어보고 오라고 하셨거든요.”
“뭐죠?”
“결정적인 증거를 찾으려면 어디로 가야 하느냐고, 그렇게 물으셨습니다.”
살짝 커졌던 율리아의 눈동자가 다시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그녀는 금화로 가득 찬 상자를 바라보며 깊은 생각에 빠졌다.
카루스가 증거를 찾고 있다.
‘그가 사실을 확인했구나.’
카루스에게 사실을 알려 주는 건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그가 찾는 진짜 증거는 마조람 후작이 가지고 있는 장부였다.
해군과 해적은 돈세탁 장부 같은 위험한 증거를 남기지 않았다. 하지만 귀족인 마조람 후작은 언제 어디서, 누구에게 배신당할지 모르기에 반드시 꼼꼼하게 장부를 기록해 두고 아무도 찾을 수 없는 곳에 감춰 두었다.
율리아가 생각에 빠져 있는 동안 맥스웰은 집요한 시선으로 그녀를 관찰했다. 숨소리와 눈썹의 움직임, 표정 변화 하나까지 놓치지 않겠다는 태도였다.
생각을 마친 율리아가 말했다.
“장부는 찾을 수 없어요.”
“흠?”
“전쟁이라도 벌이지 않는 이상 지금 당장은 어려워요. 그러니까 차선을 택하라고 하세요.”
“제가 뭐라고 전하면 되겠습니까?”
“사령관의 신병을 먼저 확보하고, 그동안 그가 모아 둔 비자금을 압수하라고 하세요. 돈은 애인의 집에 숨겨 뒀을 거예요.”
율리아는 맥스웰에게 남부 함대 사령관의 애인이 누구인지, 그녀가 어디에 사는지까지 모두 알려 주었다.
더벅머리 아래 맥스웰의 눈동자가 번쩍번쩍 빛났다.
“그게 결정적인 증거가 되겠습니까? 아직 모르시는 모양인데…… 우리 후원자님도 그렇고, 그분이 섬기는 분도 철두철미하기가 이루 말할 수 없어서.”
바이칸의 황제가 어떤 사람인지는 율리아도 잘 알고 있었다.
“그걸로도 충분할 거라고 전하세요. 결과를 받아 보면 알게 될 거예요.”
카루스가 원하는 건 해군과 해적, 돈세탁에 손을 보탠 오르테가의 귀족들까지 모두 엮어 넣을 수 있는 물적 증거일 것이다.
하지만 황제가 진짜 원하는 건 따로 있었다. 율리아는 카루스가 그 사실을 빨리 깨닫길 바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