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화
“닥쳐.”
때마침 덩치 큰 기사가 죽은 함장의 시체를 짊어지고 나타나 바다에 집어 던졌다. 갑판에 풍덩 소리가 살벌하게 울려 퍼지자, 병사들이 너도나도 입을 열고 소리를 질렀다.
“살려 주십시오! 제독님, 제발!”
“저희는 그냥 시키는 대로 한 죄밖에 없습니다. 돈을 챙긴 건 함장이에요! 정말입니다!”
비명과 애원, 온갖 변명이 쏟아졌다. 간혹 쓸 만한 정보를 내뱉는 놈이 있으면 카루스의 부하들이 데려와 따로 분류했다.
“다음엔 남부 함대 사령관의 배를 직접 친다.”
카루스가 말했다. 군함을 하나씩 치는 건 시간이 너무 오래 걸렸다. 그사이에 사령관이 증거를 인멸하고 도주할 우려도 있었다.
“카루스 님, 함장실에 증거가 될 만한 건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바닥에 감춰 둔 금고까지 모두 뒤졌지만…… 금화와 어음 몇 장이 전부인데, 상인연합에서 발행한 거라 추적이 어려울 듯합니다.”
“그래, 이렇게 쉽게 찾을 수 있을 거라곤 생각 안 했어.”
카루스가 중얼거렸다.
그냥 다 죽여 버릴까. 그의 분위기가 스산하게 가라앉자, 잡혀 있던 병사들의 발악이 거세졌다.
“저, 저는 해적들의 항로를 모두 외웠습니다. 남부에서 제일 오래된 항로라 아는 사람이 많지 않을 겁니다!”
“해적들이 제 얼굴을 압니다! 놈들에게 접근하기 위해선 제가 꼭 필요하실 겁니다!”
“사령관이 오르테가에 둔 애인이 누군지 압니다!”
무관심해 보였던 카루스가 그제야 고개를 돌렸다. 그러곤 마지막에 소리친 병사를 향해 손가락을 까딱거렸다.
“데려와.”
카루스가 기억하기로 남부 함대 사령관은 바이칸 제국에서 아주 영향력이 센 여성의 남편이었다. 그런 그가 오르테가에 따로 애인을 두고 있다면, 알아 둬서 나쁠 게 없었다.
“나머지도.”
해적들이 쓰는 항로를 안다는 병사와 해적들과 자주 어울렸다는 병사도 함께 끌려 나왔다.
그때 함장실을 뒤지던 부하들이 금고에서 찾은 나무 상자를 끌어다 카루스 앞에 내려놓았다. 그 안엔 번쩍거리는 금화가 가득 들어 있었다.
“해적의 금화로군.”
“해적에게서 압수한 거라고 우기겠죠. 어떻게 하실 겁니까?”
글쎄. 이걸 어떻게 할까.
금화를 손에 쥔 카루스가 멀리 있는 육지를 바라보았다. 정확히는 오르테가 왕궁이 있는 방향이었다.
카루스 란케아가 바다 위에서 제국을 배신한 해군을 벌하고 있을 때, 왕궁에서 마조람 저택으로 돌아온 바실리는 깊은 고민에 빠져 있었다.
그는 요즘 잠을 제대로 이루지 못해 몹시 피곤했다. 율리아와 타티아나 산맥 갈림길에서 만나기로 했던 날부터 지금까지 계속 지독한 불면증에 시달렸다.
‘율리아.’
감금되어 있었다던 변명은 반쯤은 진짜였다. 후작의 명령을 받은 집사가 병사를 시켜 그를 감시케 했다. 그래서 율리아에게 달려갈 수 없었다.
묶여 있다거나 문이 잠긴 건 아니었지만, 나가지 못하게 지키는 사람이 있었으니까 감금이었다. 심지어 처음엔 집사가 하이에나를 고용한 줄도 몰랐다.
‘알았다면 구하러 갔을 텐데.’
율리아가 어떻게 살아 돌아왔는지는 몰랐다. 하지만 그녀가 무사해서 얼마나 기뻤는지 모른다.
가문을 버리고 도망가려던 건 좋은 생각이 아니었다. 차라리 여기 남아서 율리아를 받아들이게끔 부모님을 설득하는 편이 좋으리라.
‘도대체 어떻게 된 거지.’
그런데 돌아온 율리아가 바실리를 거부했다. 꼭 다른 사람이 된 것처럼, 차갑고 무감정한 눈으로 그를 보았다. 밀어내는 것으로도 모자라, 그를 모욕하고 멸시했다.
그녀는 꼭 다른 사람이 된 것 같았다.
“집사는 어디 있지?”
바실리가 지나가던 하녀를 붙잡고 물었다. 하녀는 집사가 뒤뜰에 있다고 알려 주었다. 최근 뒤뜰 조경에 질린 후작 부인이 꽃의 종류를 바꾸라고 명령했기 때문이었다.
“내 방으로 오라고 해라.”
“네, 도련님.”
방에서 집사를 기다리는 동안에도 바실리는 율리아를 생각했다. 그는 정말로 그녀를 이해할 수 없었다. 아무리 화가 났다고 해도 어떻게 레위시아 2왕자의 시녀가 될 수 있단 말인가.
하물며 그 많은 사람 앞에서 크리스틴을 망신 주기까지 했다.
바실리는 제 부모님이 크리스틴을 얼마나 끔찍하게 아끼는지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후작 부부가 이번 일로 율리아를 용서치 않으리란 것도 알았다.
“도련님, 부르셨습니까.”
“율리아에게 하이에나를 보낼 때 뭐라고 했는지 말해.”
“예?”
“집사가 율리아를 처리하기 위해 하이에나를 고용했잖아. 뭐라고 명령했는지 말해 보라고.”
바실리가 분노를 꾹꾹 눌러 담아 말했다. 집사가 그의 연인인 율리아를 죽이려 했다는 것에도 화가 났지만, 아버지가 집사를 건드리지 말라고 명령했기 때문에 더 화가 났다.
“도련님의 마음을 어지럽힌 여자를 멀리 치우라고 말했을 뿐입니다. 기분 나쁘셨다면 죄송합니다.”
집사는 공손했다. 그리고 뻔뻔했다. 잘못한 것도 없으면서 사과한다는 투였다.
바실리는 그것조차 마음에 들지 않았다.
“내가 하이에나를 불러서 확인을 해 봐야 제대로 말할 건가?”
“도련님, 그들은 결국 실패했습니다. 이제 와 도대체 왜 이러시는지…….”
집사는 바실리에게 곧이곧대로 말할 생각이 없었다. 그 명령은 사실 후작의 입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이었다.
바실리가 후작가의 귀한 도련님이긴 하지만, 집사에겐 후작의 명령이 우선이었다.
“집사, 내가 기어이 하이에나를 만나 봐야겠어? 만약 집사가 진짜…… 그렇게 말했다면, 나는 너를 고발할 거야.”
“바실리 도련님!”
“하이에나도 다 고발할 거야. 형장에 나란히 세워 놓으면 누구라도 입을 열겠지.”
“이러지 마십시오. 전부 도련님을 위해 한 일들입니다! 잘 아시지 않습니까. 보십시오. 그 요사스러운 계집이 결국 무슨 짓을 저질렀습니까? 도련님과 아가씨께 감히 배은망덕하게…….”
“뭐라고 했는지만 말해. 그러면 더 문제 삼지 않을 테니까.”
“잊어버렸습니다.”
“살인 교사로 감옥에 가고 싶은가 보군.”
집사가 그제야 초조한 기색을 보이기 시작했다. 바실리보다 후작이 우선이기는 해도, 이대로 고발당하지 않으리란 법도 없었다.
집사가 보기에 바실리는 진심으로 율리아를 사랑하고 있었다.
“솔직하게 말해 줘. 나는 그냥 사실을 확인하려는 것뿐이야.”
“……얼굴을 망가뜨려 머리를 잘라오라고 했습니다.”
집사가 사실대로 털어놓자, 바실리의 표정이 무너졌다. 비틀거리던 그가 의자에 털썩 앉았다.
그러곤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 쥐고 중얼거렸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잊으십시오. 율리아 아르테는 도련님 인생에 오점이 될 여자입니다. 고작 여자 하나 때문에 가문의 이름에 먹칠하실 셈입니까? 물론 제가 잔인한 짓을 했다는 건 압니다.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으면 도련님께서……!”
“시끄러워!”
벌떡 일어난 바실리가 집사에게 주먹을 휘둘렀다. 싸움 같은 건 해 본 적 없는 도련님이었기에, 그가 휘두른 주먹은 그다지 위력적이지 않았다.
하지만 집사는 피하지 않고 그의 주먹을 맞아 주었다. 쓰러진 집사의 입술에 피가 맺혔다.
“후회할 게 분명한 일은 만들지 마세요. 저는 당신이 후작님의 뒤를 이어 마조람의 가주가 되기를 바랍니다. 그러니까 이 일은 여기서 묻으세요. 소꿉놀이는 어린 시절에 끝내는 겁니다.”
그러니까 그 여자도 금방 잊을 수 있을 거라고, 차라리 유흥가로 나가 돈을 주고 여자를 사라고, 집사는 그렇게 말하며 일어섰다.
멀리서 후작의 마차가 저택으로 들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바실리의 시선이 마차를 따라 움직였다.
문득 율리아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너는 나를 사랑하는 게 아니라, 사랑한다고 착각하고 있는 거라고. 궁핍했던 그녀에게 푼돈을 베풀며 우월감에 취한 나머지 자기 자신을 신처럼 여기고 있을 뿐이라고.
허탈한 웃음이 새어 나왔다.
바실리는 그럴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만약 율리아의 말이 사실이라면, 레위시아 왕자가 그녀의 손을 잡는 걸 보며 이토록 뜨거운 질투에 사로잡히지는 않았을 테니까.
“집사.”
“네, 도련님.”
“당장 부모님께 가서 말씀드려. 난 공주와 결혼하지 않을 거라고.”
바실리가 선언하듯 말했다.
* * *
새해 첫 경연에서 레위시아 왕자가 인상적인 활약을 보인 뒤, 두 명의 젊은 귀족이 그의 궁에 방문 요청을 했다.
파벌이 없는 유력 가문의 후계자와 가진 능력이 뛰어나서 누구에게도 잘 보일 필요가 없는 자들이었다.
“신통방통해.”
늦은 아침을 먹던 레위시아가 손가락으로는 율리아를 가리키고, 눈으로는 코코를 바라보며 말했다.
코코가 흥, 코웃음을 치더니 식탁에 놓인 스테이크를 조각조각 잘라 먹었다.
율리아는 조금 떨어진 자리에서 그런 두 사람을 보며 차를 마셨다.
“말해 봐. 바실리 마조람은 구제 불능의 멍청이인가? 어떻게 너 같은 여자를 놓칠 수가 있어? 뭐…… 나처럼 치명적인 매력이 있는 건 아니지만, 네 얼굴도 그 정도면 나쁘지 않잖아. 게다가 이렇게 신통방통한데.”
율리아가 애매하게 웃었다.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얼굴이라, 레위시아가 시원스레 대신 말해 주었다.
“대답할 필요 없어. 그냥 바실리를 욕하고 싶었을 뿐이니까.”
“네, 전하.”
“그래도 이건 좀 궁금한데. 그 신년사는 미리 생각해 둔 거야? 밤새 써서 외웠어?”
“아뇨.”
“그럼 그 자리에서 즉흥적으로 썼어? 말도 안 돼. 내가 봤을 땐 네가 부왕의 문장가보다도 더 잘 쓰는 것 같았는데?”
율리아가 또 애매하게 웃었다. 그러자 이번에는 코코가 레위시아를 대신해서 말했다.
“대답할 필요 없어. 저걸 인정하면 네가 국왕 전하의 문장가보다 글을 잘 쓴다고 잘난 척하는 거고, 아니라고 겸손 떨면 그건 그것대로 왕자 전하의 안목이 틀렸다고 말하는 것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