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화
시간이 짧아 신년사를 제대로 완성한 사람은 많지 않았다. 국왕의 수행 비서는 경연장 중앙에 칸막이를 세워 놓고, 그 위에 왕족과 귀족들이 제출한 신년사를 걸어 놓았다.
경연에 참석한 모든 사람이 그걸 읽었다.
대부분은 비슷비슷했다. 황제의 업적을 찬양하고, 제국에 충의를 다하겠다는 내용이었다. 지극히 속국다운 충성 맹세이기도 했다.
그런데 유일하게 그렇지 않은 신년사가 하나 있었다.
레위시아 오르테가 2왕자의 것이었다.
젊은 귀족 중 몇몇이 그 앞에 서서 움직이질 않았다. 그들은 신년사를 몇 번이고 다시 읽어 보더니 레위시아를 뚫어지게 바라보고, 이내 깊은 생각에 빠져들었다.
그들은 어느 파벌에도 속해 있지 않은 유력 가문의 후계자이거나, 혹은 자신의 능력이 뛰어나 이미 차세대 주역으로 꼽히는 자들이었다.
“레위시아 전하, 언제 식사 한번 하시죠.”
“그럴까.”
“전하의 궁이 그렇게 아름답다던데, 한 번도 방문한 적이 없네요. 언제 한번 초대해 주시겠어요?”
“……그럴까.”
그들은 오르테가 왕국을 사랑하는 젊은 혈기이며, 왕국이 제국으로부터 독립해서 우뚝 서기를 바라는 자들이기도 했다.
그러니 왕족 중에서 유일하게 비굴하게 굴지 않고 오르테가의 자존심을 지킨 레위시아에게 호감을 느끼는 것이다.
“바이칸에 보낼 신년사는 마조람의 것으로 하겠습니다.”
국왕의 수행 비서는 율리아가 예상했던 대로 크리스틴이 쓰고 1왕자가 제출한 신년사를 골랐다. 어차피 승자가 정해진 싸움이었기에, 아쉬워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시선이 느껴져 돌아보니, 크리스틴이 율리아를 바라보고 있었다.
자신이 쓴 신년사가 선택을 받았는데도 크리스틴은 조금도 기뻐 보이지 않았다. 앞으로 포섭해야 할 귀족들이 모두 레위시아 2왕자의 곁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크리스틴은 레위시아가 제출한 신년사가 율리아의 작품이라는 것을 알았다. 모를 수가 없었다. 지난 4년 동안 지겹도록 베껴야 했던 과제와 논문 속 율리아의 습관이 글에 고스란히 드러나 있었다.
지독한 열등감이 심장을 타고 독처럼 퍼져 나갔다. 머리는 뜨거운데 온몸이 차가웠다.
크리스틴은 할 수만 있다면 4년 전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졸업시험 전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그럼 이길 수 있을 것 같았다.
율리아는 그녀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너는 이번에도 졌어.’
말하지 않아도 닿았을 것이다.
‘왜, 또 이름 바꿔서 써 줄까?’
율리아가 한쪽 입꼬리를 천천히 들어 올리자, 드레스 자락을 꽉 움켜쥔 크리스틴이 달리듯 경연장을 빠져나갔다.
그날 저녁, 기분이 좋아진 레위시아가 율리아에게 상을 주겠다고 말했다. 전속 하녀를 배정해 주겠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율리아는 그 제안을 거절했다. 평민인 자신이 왕자궁에서 일하던 하녀까지 거느리게 되면 자칫 위화감을 조성할 수도 있다고 말했다.
“그럼 뭐가 갖고 싶은데?”
“보석이요.”
괜찮으니 말만이라도 고맙다고 할 줄 알았는데, 레위시아가 얼떨떨해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보석?”
“진주 장식 티아라요.”
“구체적이네?”
“취향이에요.”
왕자궁엔 보석이 많았다. 국왕의 애첩이 낳은 유일한 아들이다 보니, 다른 건 몰라도 돈과 보석은 넘쳐났다.
율리아는 레위시아가 상이라며 던져 준 값비싼 진주 장식 티아라를 들고, 곧장 코코의 방으로 갔다.
“뭐야?”
코코는 드레스보다 더 화려한 잠옷을 입고 잘 준비를 하고 있었다.
율리아가 문 앞에 서서 웬 조그만 상자를 내밀자, 코코가 받지는 않고 멀뚱히 서서 그게 뭐냐는 눈을 했다.
“사례예요.”
“무슨 사례?”
“아까 별안간 나타나서 절 구해 줬잖아요. 해코지당할까 걱정돼서 따라와 줬고요. 첫날엔 궁내부 관리들도 혼내 줬고.”
“야, 너 착각하지 마. 네가 어디 가서 얻어터지고 오면 전하의 명예에 상처가 나니까 짜증 나서 간 거야. 이게 뭐…… 네가 뭐라고, 내가 왜 널 구해 줘?”
“그냥 받아 주세요. 어차피 저한테는 안 어울리는 거니까.”
“싫어. 내가 왜 가난한 평민한테 선물을 받니?”
“안 받으면 버릴 거예요.”
율리아는 이상한 애였다. 코코가 아무리 뾰족하게 굴어도 기분 나빠하긴커녕 대수롭지 않게 받아넘겼다. 오히려 코코가 막말을 할 때마다 자꾸 웃음을 흘리는 게, 꼭 그래 주기를 바라는 것 같기도 했다.
“진짜 버릴 거예요.”
허락하지도 않았는데 성큼성큼 걸어 코코의 방에 들어온 율리아가 벽난로 앞에 서서 팔을 내밀었다. 그녀의 손에 들려 있는 조그만 상자가 불 위에서 아슬아슬하게 흔들렸다.
“왜 버려, 그걸!”
“코코가 안 받아 주면…….”
“야!”
코코가 잠옷을 휘날리며 달려와 상자를 낚아챘다. 그 바람에 뚜껑이 열리며 그 안에 있던 진주 장식 티아라가 밖으로 튀어나왔다.
코코는 그걸 두 손으로 받쳐 들고 홀린 듯이 바라보았다.
율리아가 웃으며 속삭였다.
“좋아하잖아요, 진주.”
왕궁 사람들은 코코가 없는 곳에서 그녀를 악마 시녀라고 부르곤 했다. 그래서 코코는 율리아가 자신 때문에 상처 받을까 봐 걱정했다.
하지만 율리아가 보기에 그녀는 달라진 게 거의 없었다.
“코코한테 어떻게 접근해요?”
“그냥 불쌍한 척해. 아니다. 불쌍한 척은 더 안 해도 되겠다. 고아에 평민에, 귀족 놈한테 버림받아서 죽었다 살아나기까지 했으면…… 이미 충분해. 왕궁 어디에서나 평민이라고 시비 걸리고 구박받을 텐데, 난 아마 네가 안쓰럽고 신경이 쓰여서 어쩔 줄을 모를 거야.”
“하여간 오지랖은…….”
“네가 왕궁에서 모두의 구박 데기가 되면 어떡하나 걱정돼서 아예 내 선에서 쫓아내려고 할 수도 있어.”
“그거 병이에요.”
“야, 나도 알아! 그래도 일단 견뎌. 그리고 왕자님이 상을 준다고 하거든, 진주 장식 티아라를 달라고 해.”
“왜 하필…… 그게 그렇게 갖고 싶었어요?”
“그게 아니라! 너처럼 불쌍한 애가 그 값비싼 걸 나한테 선물하면 내가 얼마나 빚진 기분이 들겠어! 어떻게든 열 배로 보상하려 하겠지! 그걸 노리란 말이야.”
“갖고 싶었으면서.”
“그야 이왕이면 좋아하는 걸 받아야지. 다음 생엔 너 때문에 내 운명이 뒤집힐 텐데.”
그건 나만 기억하는 다음 삶이 될 거라고, 코코는 아무것도 모른 채 이용만 당하는 거라고 말해도 소용없었다. 그러면 좀 어떠냐고, 쓸모가 있으면 써먹으라며 웃기도 했다.
삶을 거듭하면서 만났던 수많은 이들 중 유일하게 ‘내 편’이라는 말을 주저 없이 쓸 수 있었던 사람.
“이거 되게 건방진 소리로 들릴 수도 있는데…… 있잖아. 내가 너처럼 계속 다시 살고 있다면, 아마 나는 우리가 친구가 되었다는 사실만으로도 이번 삶은 실패하지 않았다고 생각했을 거야. 아, 닭살 돋으니까 새겨듣진 마! 그냥…… 너도 그랬으면 좋겠다고.”
나도 그랬어요.
만약 이번에도 죽어서 다시 또 살게 된다면, 그때는 당신의 친구로만 살다가 죽어도 후회하지 않을 것 같아.
율리아는 망설이는 코코의 손에서 티아라를 빼앗아 들고, 그녀의 머리에 직접 씌워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