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6화 (17/319)

16화

낯이 익었다. 아카데미에서 몇 번 본 기억이 났다. 어떤 교수의 딸이었을 것이다. 아카데미를 다니는 내내, 율리아는 그 교수가 학생인 크리스틴에게 쩔쩔매는 모습을 몇 번이나 보았다.

“율리아.”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입을 꼭 다물고 서 있던 크리스틴이 말을 걸었다.

율리아는 어디 한번 하고 싶은 말이나 해 보라는 뜻에서 고분고분하게 크리스틴을 바라보았다.

“경연장에서 나가. 널 위해서 하는 말이야. 여긴 네가 있을 만한 곳이 아니거든. 레위시아 왕자님이 무슨 생각을 하신 건진 몰라도…….”

역시 쓸데없는 말이었다. 율리아는 더 들어 줄 것도 없다는 듯 크리스틴의 말을 단호하게 잘라냈다.

“마조람의 영애께서 무슨 권리로 제게 명령을 내리는지 모르겠네요.”

“뭐?”

“저는 레위시아 2왕자 전하의 시녀입니다. 마조람 영애의 하녀가 아니라.”

크리스틴은 율리아를 거의 쏘아보다시피 바라보고 있었다. 화가 난 것 같기도 하고, 서운해하는 것 같기도 했다.

사실 어느 쪽이건 상관없었다. 율리아는 크리스틴과의 악연이 참 질기다고 생각했다.

크리스틴의 곁에 있던 귀족들이 그녀를 대신해서 율리아에게 화를 냈다.

“이봐! 왕궁 시녀가 무슨 대단한 작위라도 되는 줄 아는 모양인데, 그게 왜 명예직인 줄 알아? 남는 게 아무것도 없어서 그렇게 부르는 거야.”

“평민이라 그런가? 왕궁 땅 한번 밟아 보고, 왕족의 궁에서 하룻밤 자 보고…… 그런 게 하고 싶었던 모양이지? 가엾게도.”

“됐어. 그만두자. 우리만 우스워질 뿐이야.”

꼴이 우습다는 건 아는 모양이지. 율리아는 그 순간에도 무심히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런 그녀의 반응이 거슬렸는지, 그만두자던 귀족 청년이 코앞으로 다가와 율리아의 이마를 손가락으로 툭툭 건드리며 이죽거렸다.

“바실리 님을 유혹하는 데 성공한 몸이니, 이번에는 레위시아 전하인가? 참 너 같은 계집애들은 왜 그렇게 하는 짓이 비슷한지 모르겠어. 신분 높은 남자한테 기생충처럼 붙어서 피나 빨아먹고…….”

처음엔 그냥 툭툭 건드리는 수준이었는데, 갈수록 힘이 세지더니 율리아의 몸이 흔들리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래도 율리아의 무표정은 흔들리지 않았다. 그녀는 그 순간에도 이 남자를 어떻게 시궁창으로 끌어들일지, 그걸 고민하고 있었다.

누명을 씌울까, 사기를 쳐 줄까. 빈털터리로 만들어서 고기잡이배에 팔아 버릴까.

실랑이가 길어지자 여기저기서 시선이 모여들더니 분위기가 어수선해졌다. 주목을 받자 기세등등해진 남자의 손놀림이 아까보다 더 거칠어졌다.

그냥 경연장 밖으로 나가서 기다려야 하나, 율리아가 그런 고민을 하고 있을 때였다.

“그 손 떼.”

코코가 나타났다.

“손가락 뜯어 버리기 전에.”

조명을 받아 선명하게 빛나는 주홍색 눈동자에서 살벌한 기운이 쏟아졌다.

율리아의 이마를 툭툭 치던 청년이 순간 몸을 움찔 떨었다. 그는 코코에게 겁먹었다는 사실이 자존심 상했던지, 손을 내리면서도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코코?”

율리아가 놀란 얼굴로 코코를 불렀다. 그런데 코코는 율리아에게 대답은 해 주지 않고, 남자를 보면서 사납게 말했다.

“감히 레위시아 2왕자 전하의 측근 시녀를 모욕했겠다? 왕족의 시녀를 건드리면, 왕족의 명예에 누가 되는 거라고 배우지 못했니? 아, 그런 거 배울 만큼 아직 자라지 못했나? 몇 살이니, 일곱 살?”

“그게 무슨…… 코델리아 힌치 영애, 말을 삼가시죠.”

“너나 삼가시지. 어디 마조람의 발닦개 나부랭이가 감히 왕자 전하의 측근에게 막말을 지껄여? 그 입을 꿰매 줄까, 찢어 줄까? 아예 지져 버릴까?”

크리스틴과 패거리의 얼굴에서 점점 혈색이 빠져나갔다. 율리아는 이쯤에서 코코를 말려야겠다고 생각했다. 코코는 평소엔 그냥 정 없이 차가운 사람처럼 보이지만, 화가 나면 상대의 영혼이 쪼그라들 때까지 물고 늘어지는 경향이 있었다.

“코코, 그만해요.”

“마조람 영애는 왜 가만히 있는 거야? 율리아가 아니라 그쪽 집안 남자 형제가 매달리는 거라고 정정해 줘야지. 자존심 상해서 그래? 바실리 마조람은 절차고 나발이고 싹 다 무시하고 왕자궁에 쳐들어오더니, 여동생은 여럿이서 한 사람 괴롭히는 것밖에 할 줄을 모르나?”

코코의 목소리가 컸다. 이제는 경연장의 거의 모든 사람이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런 식의 싸움은 좋지 않았다. 누구에게도 아무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렇게 생각한 율리아가 코코의 한쪽 팔을 부드럽게 잡아끌었다.

“코코, 저는 괜찮으니까…….”

“사과할게요.”

크리스틴이 말을 꺼냈다.

“우리가 말을 심하게 한 건 인정해요. 나는 율리아가 걱정이 되어서 한 말이었는데…… 오해의 소지가 있었죠. 사과할게요.”

크리스틴다운 사과였다. 그녀는 언제나 자신이 정의의 편이라고 믿었다.

“하지만 코델리아 힌치 영애도 예의를 좀 지키셔야 할 것 같네요. 귀족이, 그것도 왕자 전하의 측근 시녀님이 천민이나 쓸 법한 말을 써서 되겠어요?”

“뭐라고?”

코코가 기막혀 하더니 율리아를 바라보았다. 율리아는 가만히 고개를 저으며 더 상대하지 말라는 의사를 전했다. 여기서 싸워 봤자 빌미만 주게 될 것이다.

코코가 입꼬리를 한쪽만 올려 웃더니, 율리아의 손을 콱 움켜쥐고 세게 잡아끌었다.

“뭐래. 사과를 얘한테 해야지, 왜 나한테 하는 거야.”

혼잣말인데, 다 들리는 혼잣말이었다.

크리스틴의 얼굴이 설핏 굳었다. 먼저 사과함으로써 품위를 지키고자 했는데, 코코가 또 다른 곳에서 정곡을 찔러 버렸기 때문이었다.

“가자.”

코코는 어찌할 바를 모르고 서 있는 크리스틴을 경멸하듯 쏘아보곤 율리아를 데리고 그 자리를 떠났다.

“여긴 여전히 기분 나쁘네. 가문의 힘이 자기 힘인 줄 알고 으스대는 멍청이들이 한가득해.”

“안 오실 줄 알았어요.”

율리아가 은근슬쩍 말을 꺼내자, 버럭 화를 내려던 코코가 얼굴을 찡그리더니 짧게 혀를 찼다.

“거봐. 내가 뭐랬니. 너 같은 애가 여기 따라와 봤자, 가루가 되도록 까이고 울면서 돌아올 거라고 했잖아.”

울면서 돌아가진 않았을 것 같지만, 율리아는 그냥 입을 다물고 고개만 끄덕였다.

이전 삶에서 만났던 코코는 이 시기의 자신을 ‘천하에 재수 없는 애’라고 표현했지만, 율리아가 보기엔 별로 그렇지 않았다.

코코는 언제나 약자에게 약했다. 약하고 불쌍한 애들이 핍박을 이겨 내려고 애쓰는 모습을 보면 도와주지 않고는 못 배기는 성격이었다.

말투가 곱지 않아서 늘 오해를 받았으나 코코야말로 진짜 정의로운 사람이라고, 율리아는 생각했다.

“다 싸웠어?”

가까이 지내는 귀족들과 인사를 마친 레위시아 왕자가 율리아의 곁으로 돌아왔다. 그는 율리아 곁에 새침한 얼굴로 서 있는 코코를 보더니, 그럴 줄 알았다며 피식 웃었다.

“이제 발표할 거야. 어디…… 새해 첫 경연이 뭔지 볼까.”

레위시아가 눈으로 웃었다. 그가 가리키는 곳을 보니 한 중년의 남자가 극장의 무대였던 경연장 중앙으로 걸어 나오고 있었다.

“부왕의 수행 비서 중 한 사람이야. 첫 경연의 심사관이기도 하고.”

중앙에 선 국왕의 수행 비서가 누군가를 찾듯 시선을 굴렸다.

그는 1왕자의 곁에 나란히 서 있는 마조람 후작가의 남매를 확인한 뒤에야 첫 경연에 대해 발표했다.

“올해는 우리 오르테가 왕국과 바이칸 제국이 보호 동맹을 맺은 지 정확히 20년이 되는 해입니다. 여러분은 그를 기념하여 바이칸의 황제께 바칠 신년사를 써 오시기 바랍니다.”

“허.”

레위시아가 놀란 얼굴로 율리아를 돌아보았다.

“진짜네?”

율리아는 그냥 웃었다.

이후엔 각자의 공간으로 흩어져 신년사를 작성했다.

1왕자를 따라 반대편 방으로 들어가던 바실리가 끈질기게 율리아를 바라보았지만, 그녀는 단 한 번도 그와 시선을 마주치지 않았다.

율리아는 준비된 방으로 들어오자마자 왕자에게 양해를 구하고 의자에 앉아 거침없이 신년사를 써 내려갔다.

아무 고민 없이 마구 쓰는 것 같은 엄청난 속도에, 레위시아와 코코가 율리아의 어깨너머에 서서 테이블 위에 놓인 종이를 내려다보았다.

“하…… 하하.”

레위시아가 기가 막힌다는 듯, 한숨과 함께 웃음을 흘렸다.

율리아가 쓴 신년사에는 격식과 재치가 있었다. 제국의 승리를 축하하고 황제의 마음이 평화에 기울었음을 재확인하면서도, 절대 비굴함을 내보이지 않았다.

단어 선택도 신통하기 그지없었다. 교묘하게 표현을 바꿔 가면서 오르테가는 바이칸 제국의 동맹국이지만 그게 주종 관계를 뜻하는 건 아니라는 걸 은연중에 드러냈다.

위엄 있고 당당하되, 공격적이지는 않았다.

마지막 문장까지 완벽하게 마치고 펜을 놓는 율리아에게 레위시아가 물었다.

“크리스틴 마조람은 어때?”

“네?”

“아카데미에서 1, 2등을 다투었다며. 문장 실력이 비슷하다는 뜻인가?”

율리아가 종이를 레위시아에게 내밀었다.

“아뇨.”

“응?”

“크리스틴은 단 한 번도 저를 이긴 적이 없습니다, 전하.”

그 말을 들은 레위시아와 코코의 얼굴에 약간의 놀라움이 번졌다. 그들은 크리스틴이 4년 동안 브레웨 수석을 차지해 왔다는 걸 알고 있었다.

율리아의 말은, 그게 대리 시험의 결과이거나 혹은 그녀가 그동안 크리스틴에게 일부러 져 줬다는 걸 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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