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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화 (16/319)

15화

드레스를 사 주겠다던 레위시아의 말은 진심이었다. 코코가 그에게 평민인 율리아는 왕궁에서 입고 다닐 만한 드레스를 마련할 돈이 없을 거라고 귀띔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다음 날이 되자마자 율리아 앞으로 십여 개의 커다란 상자가 배달되었다.

“이게 다 뭐니?”

코코가 물었다. 율리아는 모르겠다고 대답했다. 상자를 가져온 건 왕궁 밖에서 온 일꾼들이었는데, 그들은 누가 벌써 값을 다 치렀다며 이렇게 말했다.

“후원자께서 보내셨습니다.”

“후원자요?”

“네, 필요한 게 있을 때는 무엇이든 사라고 하셨습니다.”

“아.”

후원자. 카루스 란케아였다. 헤어지던 날, 여관에서 율리아를 바라보던 그의 눈빛이 떠올랐다.

코코가 수상쩍다는 얼굴로 상자를 바라보았다. 보육원 출신 평민 시녀를 이렇게까지 후원해 주는 사람이 누군지 궁금한 모양이었다.

하지만 아직은 말해 줄 수 없었다. 무엇보다, 율리아도 카루스가 이런 행동을 할 거라곤 전혀 예상치 못했다.

일꾼들은 상자를 내려놓자마자 서둘러 왕궁을 빠져나갔다. 상자를 방까지 옮겨 준 건 왕자궁에서 일하는 시종들이었다. 율리아는 그들에게 일일이 고맙다고 인사하고 방으로 돌아왔다.

상자 속엔 눈부신 드레스가 여러 벌 들어 있었다. 모두 왕궁 시녀임을 나타내는 우아한 크림색의 드레스였다.

겨울이 지나 봄으로 넘어가는 계절이라 적당히 도톰한 옷부터 조금 가벼운 것까지, 세심하게 신경 쓴 티가 났다. 심지어 드레스만 들어 있는 것도 아니었다. 구두와 장갑, 외투에 작은 손가방까지 없는 게 없었다.

옷과 구두는 꼭 맞춘 것처럼 그녀에게 딱 맞았다. 율리아는 저도 모르게 실소를 흘리고 말았다.

헤어지기 전, 카루스가 말했다.

“필요한 게 있으면 맥스웰을 찾아라. 그가 널 도와줄 거야.”

찾기도 전에 나타난 카루스의 부하가 율리아에게 값비싼 선물을 안겨 주었다.

이건 경고일까, 아니면 호의일까. 그가 가까이에서 지켜보고 있다는 걸 암시하는 선물인 것은 알겠는데, 거기 담겨 있는 의미가 무엇인지 아직 확실치 않았다.

‘어쩌면…….’

율리아는 지금쯤 카루스와 그의 부하들이 제국군 함대가 해적들의 금화를 운반하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한 건 아닐까 생각했다.

* * *

왕궁에서 매해 치러지는 경연은 왕족보다는 귀족 가문의 자제들에게 더 중요한 행사였다.

어느 왕족에게 줄을 설 것인지, 어느 왕족이 그들에게 부귀영화를 가져다줄 능력 있는 지도자인지, 어느 가문이 어느 왕족의 편에 서는지, 그런 것들을 미리 파악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또 한편으로는 자신의 특기나 능력을 공식적으로 뽐낼 기회의 장이기도 했다.

누군가는 학문과 식견을, 누군가는 상재를, 누군가는 예술을, 또 다른 누군가는 검술을 자랑으로 내걸었다.

세 명의 왕자와 한 명의 공주, 그리고 수십 명에 달하는 귀족 가문의 자제들은 올해의 첫 경연 종목이 무엇일지 무척 궁금해하고 있었다.

어차피 매번 바뀌기 때문에 미리 준비할 수는 없었으나, 그래도 하루라도 빨리 알고 싶어서 안달하는 자가 많았다.

“작문이에요.”

“뭐?”

“바이칸 제국의 황제에게 바칠 신년사를 써 오라고 할 거예요.”

물론 율리아는 그것마저 다 알고 있었기에, 레위시아에게 먼저 알려 줄 수 있었다.

“그걸 네가 어떻게 알아?”

“올해는 오르테가 왕국이 바이칸 제국의 보호를 받게 된 지 20년이 되는 해고, 황제가 얼마 전부터 정복 전쟁을 멈추고 내실을 다지고 있기 때문이에요.”

“그게 그거랑 무슨 상관이야.”

“황제는 속국의 왕에게 충성심을 요구할 텐데, 오르테가는 바다에 제국군 함대를 주둔시키는 거로 상납금을 대신하고 있잖아요. 그러니까 충성심을 표현할 신년사라도 써 오라고 하겠죠.”

“그걸 부왕께서 직접 쓰면 자존심이 상하니까…… 우리 같은 애새끼들한테 대신 쓰게 하겠다는 건가.”

레위시아는 눈치가 빨랐다. 영리한 편이기도 했다. 율리아는 그의 추측이 옳다는 의미로 크게 고개를 끄덕여 주고, 하던 말을 이었다.

“전하께서 하실 일은 첫 경연의 승자가 되어 황제에게 신년사를 바치는 게 아니에요. 어차피 어떻게 써도 선택받지 못할 테니까요.”

“그럼?”

“친제국파를 공격해서 오르테가의 독립을 원하는 젊은 귀족들의 마음에 불을 지피는 것이죠.”

국왕은 중립을 표방하고 있었지만 실은 친제국파였고, 마조람은 오르테가의 대표적인 친제국파였다.

1왕자와 바실리는 아버지인 국왕과 후작의 분신이나 다를 바 없었다. 그러니 황제에게 바치는 신년사를 쓸 때도 최대한 황제의 심기를 어지르지 않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율리아가 원하는 건 레위시아가 그들과는 달리 고고하고 독립적인, 오르테가의 자존심을 지키려는 왕족임을 드러내는 것이었다.

“중립, 좋죠. 그런데 그것만으론 부족해요. 오르테가는 바이칸 제국의 식민지가 아니에요. 속국이라 불리고 있긴 하지만, 엄밀히 따지면 보호 동맹이고.”

“그게 속국이잖아.”

“다른 사람은 다 그렇게 말해도 왕족인 전하는 그렇게 말하면 안 된다는 거예요. 승리를 축하하고 평화를 지지하되, 절대 비굴하게 굴지 마세요.”

“그러다 황제가 그걸 보고 기분이 나빠져서 오르테가를 정복해야겠다고 생각하면 어떻게 할 거야? ……라고 날 공격하겠지.”

“황제는 그런 거 신경 안 써요. 그리고 전하께서 아무리 완벽한 신년사를 적어 내도, 선택받는 건 어차피 저쪽 파벌일 거예요.”

레위시아는 거울 앞에서 옷매무새를 다듬고 있었다. 진한 회색 정장에 붉은 스카프가 세련되게 어울렸다.

그가 거울을 통해 율리아를 보고 말했다.

“신년사는 네가 쓰도록 해.”

“제가요?”

“어차피 저쪽에선 크리스틴이 쓰게 되어 있잖아. 바실리는 문장력이 약하고, 1왕자는 그런 걸 손수 하는 성격이 아니니까, 당연히 크리스틴이 해야겠지. 나도 내 시녀 솜씨 좀 보고 싶고.”

“알겠습니다.”

율리아가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함께 가기로 했으니 그 정도는 문제없었다.

“마음 단단히 먹어.”

채비를 마친 레위시아가 뒤돌아섰다. 투명하리만치 흰 피부에 연한 갈색 눈동자, 긴 금발이 곱게 어우러졌다.

레위시아는 사람들이 그의 아름다운 외모를 좋아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권력도 세력도 없는 애첩의 아들이지만, 그는 그 외모 덕에 제법 인기가 있는 편이었다.

“갈까, 율리아.”

“네, 전하. 모시겠습니다.”

코코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왕자와 함께 궁을 나서던 율리아가 잠시 뒤를 돌아보았지만, 코코의 방 창문은 굳게 닫힌 채였다.

경연장은 왕궁에서 두 번째로 큰 건물에 마련되어 있었다. 그곳은 한때 왕족의 후원을 받기 위해 화가나 배우, 가수들이 찾아와 재주를 뽐냈다던 실내 극장이었다.

검은 벨벳 위에 구름처럼 풍성한 회색 커튼, 그 위에 덮인 새하얀 레이스가 밝은 조명을 받아 은은하게 빛났다.

율리아는 레위시아의 등 뒤에 서서 그를 따라 경연장 안으로 들어갔다.

귀족들은 대부분 무리를 짓고 서 있었다. 1왕자와 바실리 마조람이 있는 곳에 가장 많은 사람이 모여 있고, 그다음은 1왕녀의 파벌이었다. 나머지는 친분에 따라 무리를 오가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여기서 기다려.”

레위시아는 경연장 입구에 율리아를 남겨 둔 채 몇 안 되는 자신의 친구들을 향해 움직였다.

작은 전쟁터라더니.

경연장을 둘러보던 율리아의 시선이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멀리서 보니 더 확실하게 느껴졌다. 귀족들은 왕족을 중심으로 파벌을 나누고, 그 사이에서 인맥을 넓히려 기를 쓰고 있었다.

3왕자는 아직 어려 경연에 참여하지 못했고, 두 명의 왕자와 한 명의 공주가 친분을 가장해 접근하는 무리를 적당히 받아 주고 내치면서 경연을 준비했다.

레위시아는 인기와는 별개로 파벌이 없었다. 그가 왕위 후계로 거론되지 않는 애첩의 아들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다 보니 경연장에서는 권력 싸움에 관심이 없는 몇몇 귀족들과 주로 어울렸다.

그때 구석에 서서 분위기를 살피느라 여념이 없는 율리아에게 누군가 다가왔다.

크리스틴 마조람이었다.

“율리아, 너…… 네가 여기 왜 있어?”

크리스틴은 한껏 치장한 모습이었다. 두 명의 귀족 영식과 한 명의 귀족 영애가 그녀의 뒤를 따라 걸어왔다.

율리아는 눈동자를 거의 움직이지 않고 그들 모두의 얼굴을 머릿속에 새겼다.

“대답해.”

“왕자님의 측근 시녀로서 전하를 보필하러 왔습니다.”

“네가?”

이번에 말한 건 크리스틴이 아니었다. 구불거리는 갈색 머리카락에 기름을 발라 뒤로 넘긴 청년이었는데, 율리아는 그의 인상착의를 재빨리 살피곤 그가 마조람 후작가의 방계 친척 중에 하나라는 사실을 떠올렸다.

“이 경연장에 평민 따위가 입장할 수 있었던가? 나는 그런 말은 듣지 못했는데. 왕족과 귀족, 그리고 기껏해야 왕족의 수행 비서 정도 아니었어?”

율리아는 눈앞의 청년이 왜 이렇게 유치한 시비를 거는지 그 이유를 알고 있었다.

그의 가문은 마조람이 던져 주는 먹이가 없으면 살아갈 수가 없는 가축이나 다름없기 때문이었다. 그러니 마조람의 공주라 불리는 크리스틴을 위해서라면 평민 시녀 하나쯤은 엉엉 울게 만들어 내쫓아야 한다.

“그러게. 레위시아 왕자님도 참 짓궂어. 어차피 쫓겨날 게 뻔한데, 놀리려고 데리고 다니시는 걸까? 원래 이렇게 예쁘장하고 도도한 애들이 놀리는 맛이 있잖아.”

“평민이 도도해 봤자…….”

그들이 서로를 보며 웃음을 나누었다. 율리아는 이번에는 청년의 말을 받아 준 여자를 살펴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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