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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화 (15/319)

14화

“그래? 흠…… 그래.”

레위시아는 이대로 셋이서 함께 저녁을 먹어도 재밌을 것 같다고 생각했지만, 이쯤에서 율리아의 말을 듣는 쪽을 택했다.

첫날부터 너무 심하게 몰아붙이면 바실리가 다시는 찾아오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재밌는 구경은 아껴서 오래오래 해야 한다.

“오늘은 너를 환영하는 의미에서 다 함께 식사할 생각이니까, 빨리 쫓아내고 식당으로 와.”

레위시아가 율리아의 손을 놓고 바실리에게서 몸을 돌렸다. 바실리는 레위시아에게 인사하려 고개를 숙였으나, 왕자는 그의 인사를 받아 주지 않았다.

레위시아가 응접실 밖으로 나가자마자 바실리가 율리아를 향해 거칠게 다가왔다.

“도대체 무슨 짓이야.”

“뭐가.”

“내가 2왕자를 얼마나 싫어하는지 알잖아. 우리 부모님도, 하다못해 크리스틴까지 저 레위시아와는 상극인데…….”

“잘 아네.”

“뭐?”

“내가 왜 여기 들어왔는지 잘 안다고. 그렇게 잘 알면서 왜 물어보는 거야?”

율리아는 그저 귀찮은 기색이었다. 몇 번이나 바실리의 이런 태도를 겪어 왔던 그녀는 빨리 이 순간이 지나갔으면 하고 바랄 뿐이었다.

물론 그런 사실을 전혀 모르는 바실리는 율리아가 하루 사이에 다른 사람이 된 것처럼 혼란스럽기만 했다.

“나한테 이러는 이유가 뭐야? 너를 해치려고 하이에나를 고용한 건 집사지, 내가 아니야. 율리아, 내 아가씨. 그걸 알았다면 내가 가만히 있었을 리 없잖아.”

“가만히 있어도 돼.”

“율리아!”

“그 ‘내 아가씨’라는 말 좀 그만해. 징그럽고 역겨우니까. 그리고 이런 식으로 찾아와서 했던 말 또 하는 것도 그만해. 지겨우니까.”

바실리는 어찌해야 할지 몰랐다. 그가 아는 율리아는 언제나 남에게 친절하게 말하려 애쓰는 사람이었다. 하물며 연인인 바실리에게는 아무리 피곤해도 웃어 주던 사랑스러운 여자였다.

“율리아, 내가 다 잘못했어. 뭐든 다 보상해 줄게. 부모님이 모르는 곳에 집을 사자. 네가 하고 싶어 했던 공부도 다 해. 아니, 차라리 바이칸 제국으로 유학을 보내 줄까? 1, 2년 정도 머리를 식힐 겸…….”

“바실리.”

율리아가 바실리의 말을 끊었다.

할 수만 있다면 지난 여덟 번의 삶 동안 자신이 마조람에 의해 얼마나 많은 고통을 겪었는지 다 말해 주고 싶었다. 하지만 그게 복수에 아무 도움 되지 않을 걸 알기에, 그녀는 그냥 바실리에게 진실을 하나 알려 주기로 했다.

“당신은 나를 사랑한 게 아니야. 사랑한다고 착각한 거지.”

“그게 무슨 소리야. 내가 널 얼마나 오랫동안…….”

“오랫동안 기만했지.”

율리아의 짙은 초록색 눈동자가 바실리를 꿰뚫어 보았다.

“빵 하나에 구원을 받은 것처럼 기뻐하는 결핍 덩어리. 당신에게는 아무것도 아닌 금화 하나가, 내게는 삶을 이어 갈 수 있는 빛이었어. 그걸 하나씩 던져 주면서 당신은 마치 신이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었을 거고.”

“아니야. 그렇지 않아.”

“고아 따위가 똑똑하면 얼마나 똑똑하겠어. 그런 호기심을 가지고 만났는데, 당신을 볼 때마다 천사라도 영접한 것처럼 우러러 바라보니, 얼마나 행복했겠어. 그렇지?”

바실리는 율리아의 말을 부정했다. 절대 그렇지 않다고, 네가 뭔가 착각하고 있는 거라고 화를 냈다.

하지만 율리아는 바실리 자신보다 그에 대해 더 잘 알았다.

“평민 고아와 운명적으로 사랑에 빠진 고귀한 귀족. 사람들은 당신을 낭만적이고 선한 도련님이라고 칭찬했을 거야. 그런 자신에게 취한 나머지, 날 이용하는 줄도 모르고 사랑이라고 착각해 온 거고.”

“나한테 화가 난 건 알겠는데, 아무것도 모르면서 그런 식으로 말하지 마. 내가 널 얼마나 원했는데…… 가문을 버리고 너와 함께 살아가겠다고 말했던 거, 잊었어?”

“날 버리고 가문을 택했잖아.”

“갇혀 있었어!”

바실리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갇혀 있었다고! 네게 가려고 했으니까! 아버지가 날 방에 가둬 놓고 아무 데도 못 가게 했다고 했잖아. 제발 날 좀 이해해 줘. 율리아, 나가자. 여기서 당장 나가. 레위시아 왕자는 좋은 사람이 아니야. 널 이용하고 도구처럼 쓰다가 버릴 거라고.”

“잘됐네. 그러려고 들어온 거거든.”

“율리아!”

“나한테 그따위 변명할 시간이 있으면, 너희 그 잘난 가문에 돌아가서 집사한테 물어봐. 날 죽이라고 하이에나를 고용할 때 뭐라고 했는지.”

“뭐?”

“‘건방진 평민 계집애가 주제도 모르고 도련님을 꾀어냈으니, 그 요사스러운 얼굴을 망가뜨린 뒤에 목을 잘라서 가져오너라.’”

율리아의 목소리가 차가웠다. 차갑다 못해 시리고 아팠다.

바실리는 어찌할 바를 몰라 몇 번이나 얼굴을 문지르고 머리카락을 쓸어 올렸다.

“내가…… 알아볼게. 집사가 그랬을 리 없지만, 그래도.”

마조람 후작이 지시했을 거라고도 말해 줄까 했지만, 율리아는 그냥 거기서 입을 다물었다.

전에는 바실리가 이렇게 괴로워하는 걸 볼 때마다 얼음을 삼킨 것처럼 뱃속이 시원했는데, 이제는 그것도 무뎌져 그때처럼 통쾌하지 않았다.

작별 인사 같은 건 필요 없었다. 잘 가라고 하고 싶지 않았다. 잘 있으란 말도 하고 싶지 않았다. 율리아는 바실리와 그의 가족들이 잘 있는 걸 바라지 않았다.

“사랑해.”

냉정하게 돌아서는 율리아에게 바실리가 마지막으로 말했다. 애절한 목소리였다. 그의 눈동자가 발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율리아는 그런 바실리를 한동안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러곤 짧게 허탈한 웃음을 터뜨리고, 그에게 말했다.

“그럼 파혼해 보세요.”

“……뭐?”

“곧 있으면 공주님하고 약혼한다면서요. 파혼해 보세요. 날 사랑한다는 도련님의 말이 진심이라면, 그 정도는 할 수 있어야지 않겠어요?”

못 하겠지만.

바실리와 대화가 길어져 왕자를 기다리게 했다는 생각에 서둘러 식당으로 향한 율리아는 그곳에서 생각지도 못했던 광경을 목격했다.

“왔어?”

레위시아 왕자와 코코가 창문에 달라붙어 바실리가 떠나는 모습을 구경하고 있었다.

“두 분, 뭐 하세요?”

“엿듣고, 엿봤지.”

레위시아는 기분이 좋아 보였다. 아까 바실리 앞에서도 그랬는데, 지금은 그때보다 훨씬 더 좋아 보였다.

코코는 엿봤다는 사실을 들켜서 부끄러웠는지, 새침한 얼굴로 자기 자리에 앉았다.

“앉아. 율리아 아르테. 내 궁에 온 걸 환영하는 의미에서 만찬을 대접하지.”

“고맙습니다.”

“바실리 자식이 똥 마려운 개처럼 끙끙거리는 걸 보여 줬으니, 내일은 드레스라도 한 벌 사 줄까? 코코가 괜찮은 옷가게를 많이 알거든.”

“괜찮습니다, 전하.”

“아니, 안 돼. 뭔가 보상을 줘야 앞으로도 그런 걸 많이 보여 줄 거 아니야. 드레스가 싫으면 돈은 어때? 갖고 싶은 게 있으면 말해 봐.”

아무래도 레위시아는 듣던 것보다 훨씬 더 바실리를 싫어하는 모양이었다. 잠시 고민하던 율리아가 코코를 한번 슬쩍 바라보고, 다시 왕자에게 말했다.

“전하, 왕궁 경연에 저를 데려가 주셨으면 합니다.”

“야.”

레위시아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는데, 코코가 그를 대신해서 입을 열었다.

“미쳤니? 거기가 어디라고 따라간다는 거야. 왕궁 경연이 뭔지는 알고 하는 말이야?”

“왕족, 그리고 유력 귀족 가문의 자제들이 모여서 실력과 인성을 평가받는 자리라고 들었어요. 공정한 경쟁을 통해 미래의 지도자들이 좀 더 높은 성취를 이룰 수 있도록…….”

“헛소리.”

“네?”

“거긴 미래의 지도자들이 미리 패싸움을 배우는 곳이야.”

작은 전쟁터지. 코코가 냉소적인 미소를 띠고 말했다.

“평민 시녀가 겁도 없이 끼어들었다가는 가루가 되도록 짓밟힐 거라는 말이고.”

“코코.”

“멍청하게 그런 곳에 따라갔다가 울고 돌아오지나 마. 우는 소리는 질색이니까.”

레위시아도 코코의 말에 동감하는지 두어 번 고개를 끄덕였다.

율리아는 그런 두 사람을 보며 가만히 입을 열었다.

“경연장에서 모두가 보는 앞에서 마조람을 끌어내리는 게, 지나가다 우연히 마주쳐서 따귀 한 대 때리는 걸 구경하는 것보다 훨씬 재밌으리라고 생각하지 않으세요?”

율리아의 목소리는 조금도 들떠 있지 않았다. 그냥 그 일은 반드시 일어날 거라고 예언하듯 차분하기만 했다.

“야.”

코코가 붉은 눈을 크게 치뜨더니 율리아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중얼거렸다.

“너…… 좀 더 분명하게 말해 줘야겠구나. 왕궁이 그렇게 만만한 곳인 줄 알아? 그렇게 건방지게 굴었다가는 어느 날 갑자기 쥐도 새도 모르게 죽어 사라질 수도 있어.”

“얌전히 시중만 들 거예요. 새 시녀가 들어왔는데 아예 안 데리고 다니는 것도 이상하잖아요. 경연장에 제가 나타나기만 해도 바실리는 신경이 쓰여서 어쩔 줄을 모를 텐데, 그것만으로도 전하께 도움이 되겠죠.”

코코가 코웃음 치며 다시 뭐라고 하려는 찰나, 레위시아가 슬그머니 끼어들었다.

“율리아.”

“네, 전하.”

“이번 왕궁 경연에는 크리스틴 마조람도 나오게 되어 있어. 아카데미를 졸업했으니까, 그쪽도 이제 자격이 되지. 물론 알고 하는 말이겠지?”

율리아가 살짝 웃었다.

“네, 전하.”

“난 널 보호해 주지 않을 거야. 다 큰 왕자가 어디 갈 때마다 시녀를 줄줄이 달고 다니는 것만큼 꼴불견인 게 없다고 생각해 왔거든. 그것도 알고 하는 말이겠지?”

“알고 있습니다.”

“좋아, 첫 경연 때 같이 가지.”

“전하!”

코코가 날카롭게 소리쳤다. 하지만 레위시아는 빙글빙글 웃으면서 의자에 등을 기대고 냅킨을 펼쳤다.

“자그마치 브레웨 훈장의 주인이라고. 크리스틴 마조람이 이길 수 없었던 단 한 사람이란 말이야. 그러니까 율리아, 경연장에서도 당연히 그렇게 해 주겠지?”

“물론입니다.”

율리아가 자신만만하게 답했다. 레위시아는 그런 그녀를 보며 느슨하게 웃었다.

“날 실망하게 하면 안 돼. 그럼 넌 바로 여기서 쫓겨나게 될 거야. 왕족의 측근 시녀가 되는 건 명예로운 일이지만, 들어오자마자 쫓겨나면 평생 조롱거리가 되겠지.”

“명심하겠습니다.”

살벌한 경고와 함께 식사가 시작되었다. 왕족의 궁에서 치러지는 환영의 만찬답게 온갖 종류의 산해진미가 식탁을 가득 채웠다.

오르테가는 식사 예절이 복잡한 편이었지만, 율리아는 물 흐르듯 자연스러운 태도로 식사를 시작했다.

걱정스레 그녀를 바라보던 코코가 주홍색 눈을 빠르게 깜박이더니 몰래 한숨을 내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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