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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화 (14/319)

13화

힌치 백작의 무남독녀 외동딸이며, 왕궁 내에서는 주로 악마 시녀라는 별명으로 불리었고, 오랫동안 레위시아 왕자의 가장 든든한 아군이었던 사람.

“야, 너 이번에도 다시 살게 되면 꼭 날 찾아와. 2왕자궁으로 오란 말이야. 알아들어?”

“왜요.”

“왕궁에서 시작해. 시녀가 되라고. 브레웨 훈장, 그거 원래 네 거라며.”

“싫어요. 시녀 같은 건 해서 뭐 해요. 매일 연회나 끌려다니고, 비싼 향수나 찻잎 구별하는 게 무슨 대단한 무기라고. 설마 왕족의 애첩이 되어서 나라를 막장으로 만들라는 얘기는 아니죠? 난 그런 거 못 해요. 차라리 왕을 독살하고 도망치는 게 낫지.”

“이게 아무것도 모르면서 막말하네. 너 왕족의 시녀가 무슨 일을 하는 사람들인지 알아?”

“드레스 입고 왕족이랑 어울려 다니면서 친구인 척하는 거요.”

“왕족을 주무르고 조종하고, 키울 수 있는 사람이야. 왕족을 무대 위에 세우기도 하고, 무대 아래로 끌어 내릴 수도 있는 사람. 누구보다 권력에 가까운데 눈에 띄지는 않고, 거취는 자유롭지.”

“말도 안 돼.”

“네가 레위시아 오르테가의 측근 시녀가 된 날부터 마조람 후작은 꿈자리가 뒤숭숭해지기 시작할 거야. 뭔가 불쾌한 예감이 들겠지. 하찮은 평민 계집이 왕궁으로 들어가 무슨 소릴 지껄이고 다닐지 몰라서 촉각을 곤두세우게 될 거라고.”

그때 율리아에게 레위시아 2왕자를 고르라고 조언한 것도 코코였다.

“넌 왜 모든 일을 혼자서 하려고 해? 이 나라에 마조람 후작을 원수로 여기는 사람이 너 하나뿐이리라고 생각하니? 그 나쁜 새끼들이 그 오랜 시간 동안 너 하나만 괴롭혔을 것 같아? 절대 아냐.”

“그게 왕자님이라고요?”

“레위시아 왕자는 국왕의 애첩이 낳은 자식이지. 근데 그거 알아? 그 애첩이라는 분이 지금의 왕비보다 먼저 국왕을 만났다는 거.”

“……몰랐어요.”

“가난한 남작 가문의 딸이었지만 원래는 왕비가 되실 분이었어. 마조람이 좀 더 높은 신분의 다른 왕비를 그 자리에 앉히지 않았다면, 어쩌면…… 신분 차이를 극복하고 왕비가 되셨을 수도 있다고. 마조람은 그분에게 애첩이라는 부적절한 호칭을 붙여서는 안 되는 거였어.”

“코코, 난 왕족들의 복잡한 사생활 같은 건 관심 없어요. 누가 누구를 배신했건, 누가 누구의 친자식이건…… 알 게 뭐야. 나한테 필요한 건 마조람을 물고 찢어 줄 늑대예요.”

“카루스 란케아가 늑대라면, 레위시아 오르테가는 독수리야. 너는 그 두 사람을 모두 손에 넣어야 해. 내가 도와줄게.”

“다시 살게 되면 어차피 코코는 날 기억하지 못할 텐데, 그게 다 무슨 소용이에요. 당신 성격에 날 뭐라고 생각하겠어요? 겁 없는 하루살이라거나 정신 나간 계집애라고…… 욕이나 안 하면 다행이지.”

“내 호감을 얻을 수 있는 아주 쉬운 방법을 알려 주면 되잖아.”

“그게 뭔데요.”

“일단 시녀로 들어와.”

그때 코코의 표정이 어땠더라.

율리아는 그날의 일을 그림으로 그릴 수도 있었다. 그 떨떠름한 얼굴. 코코는 앙칼지고 도도한 인상이었지만 의외로 표정이 풍부했다.

“난 좀 재수 없는 편이었는데, 너 괜찮겠어? 내가 막말한다고 도망치거나 토라지면 안 돼.”

“뭐래. 내가 그걸 몰라요?”

“하긴, 내가 누굴 걱정해.”

코코는 율리아가 저주에 걸려 계속 다시 살고 있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믿어 준 사람이었다. 그리고 율리아가 복수에 거의 성공할 뻔했을 때, 가장 가까이에서 도움을 준 사람이기도 했다.

그러니 코코를 좋아한다고 말했던 건 사실일 수밖에 없었다.

율리아는 코코가 좋았다. 코코가 과거의 인연을 다 잊었대도 상관없었다.

* * *

하루가 지났다. 밤새 생각을 정리하느라 잠을 설친 율리아는 평소보다 조금 늦은 시간에 눈을 떴다.

왕궁에 들어온 첫날부터 늦잠이라니. 자신의 무신경함에 헛웃음을 흘리며 식당으로 내려갔더니, 하녀들이 율리아를 보고 깜짝 놀라 물었다.

“시녀님, 왜…… 벌써 일어났어요?”

“이게 일찍 일어난 거예요?”

“코코 시녀님은 아침을 점심에 드시는데…… 왕자님도 별로 다르지 않으시고요.”

그렇구나. 늦게 일어나는 습관은 이때도 다르지 않았구나.

율리아는 원래 일찍 일어나는 편이라고 둘러댄 뒤, 하녀들과 함께 아침을 먹었다.

신분은 같아도 위치가 다르다 보니 관계가 굉장히 애매했지만, 율리아는 적당하게 예의를 차릴 줄 알았고, 절묘하게 거리를 둘 줄도 알았다. 식사 한 번에 그녀의 마성에 홀린 하녀들이 조금 편안해진 얼굴로 디저트를 챙겨 주었다.

그날은 평화롭고 무료하게 지나갔다. 궁내부에서 시비를 걸러 오지도 않았고, 코코는 정말 늦은 시간에 일어나 오후에야 얼굴을 비추었다.

레위시아 왕자는 언제쯤 돌아오는 것일까.

사람을 보내 데려올 때는 언제고, 궁에 나타나지도 않는 왕자에 대해 율리아가 고민하고 있을 때였다.

“율리아 시녀님, 레위시아 왕자 전하께서 돌아오셨습니다.”

밖에서 시종이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해가 지고 있었다. 저녁 시간이 다 되었는지 오가는 하녀들의 발소리가 분주해졌다.

율리아는 자리에서 일어나 드레스를 정돈한 뒤, 복도로 나가 시종을 따라 걸었다.

“언제 도착하셨나요?”

“이제 막 마차에서 내리셨습니다. 저, 그런데…….”

“왜 그러세요?”

“마조람 후작가의 바실리 도련님께서 찾아와 계십니다.”

시종은 잘못한 것도 없으면서 꼭 죄지은 사람처럼 그녀와 시선을 맞추지 못했다. 율리아는 왕자궁에서 일하는 모든 사람이 자신의 사연에 대해 알고 있을 거라고 확신했다.

“어휴, 하필 왕자 전하께서 도착하기 직전에 찾아오셔서 저희로서는 막을 방도가 없었습니다. 그래도 걱정하지 마세요. 이제 전하께서 돌아오셨으니 그만 가라고 말씀하시겠지요.”

“그러지 않을걸요.”

“예?”

“아무것도 아니에요.”

레위시아 왕자는 바실리를 쫓아내지 않을 것이다. 이 좋은 구경거리를 놓칠 사람이 아니니까.

그나저나 의외였다. 죽었다 깨어난 율리아가 차갑게 밀어낼 때마다 바실리는 매달리고 변명하길 주저하지 않았지만, 이렇게까지 성급하게 구는 경우는 처음이었다.

아무래도 율리아가 레위시아 왕자의 측근 시녀가 된 게 그를 크게 자극했던 모양이었다.

율리아는 계단을 내려가 레위시아가 바실리를 데리고 들어갔다는 응접실로 향했다.

활짝 열린 문 안에서 두 남자가 서로를 노려보고 서 있었다.

“전하.”

율리아가 레위시아를 불렀다. 드레스 자락을 살짝 잡고 무릎을 구부려 인사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레위시아와 바실리가 동시에 율리아를 바라보았다.

“어서 와, 율리아.”

레위시아가 한 손을 내밀며 말했다.

“기다리고 있었어. 네 손님이 와 있더라고? 그래서 내가 같이 저녁이나 먹자고 했거든.”

어때, 잘했지. 레위시아가 율리아를 보며 웃었다. 아름다운 얼굴 가득 악의적인 웃음이 피어났다.

율리아는 레위시아가 내민 손을 살짝 잡고, 그의 곁에 섰다.

바실리는 몹시 기분이 나빠 보였다. 화내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게 겉으로 드러날 정도였다.

“율리아, 얘기 좀 해.”

율리아는 그런 그의 모습을 감상하듯 건조하게 바라보았다.

“저는 율리아와 할 얘기가 있습니다. 그녀의 손을 놓아주십시오, 왕자 전하.”

바실리가 다시 말했다. 이번에도 대답은 율리아가 아니라 레위시아가 했다.

“이봐, 바실리. 내가 얼마나 후회했는지 알아? 브레웨 아카데미 졸업식이 끝나자마자 왕궁으로 돌아오지 말고 율리아 옆에 남아 있을걸. 그랬으면 그 많은 사람 앞에서 네놈이 망신당하는 꼬락서니를 코앞에서 구경했을 텐데.”

“전하!”

“여긴 내 집이야. 율리아는 내 시녀고, 네놈은 허락도 없이 나타난 불청객이란 소리지. 그러니까 할 말이 있으면 내가 보는 앞에서 해. 집주인은 구경할 권리가 있으니까.”

어때, 잘했지. 레위시아가 또 율리아를 쳐다보고 웃었다. 이번에는 악의뿐 아니라 약간의 후련함까지 머금은 미소였다.

마음 같아서는 잘했다고 칭찬이라도 해 주고 싶었지만, 율리아는 현명하게 짧은 미소로 대답을 대신했다. 그러곤 바실리에게 말했다.

“마조람의 후계자께서 제게 무슨 볼일인지 모르겠습니다.”

“할 말이 있다고 했잖아. 율리아, 너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왕궁에 들어온 거야?”

“제가 그걸 후작 영식께 말씀드려야 할 이유라도 있나요?”

“밖으로 나가서 얘기하자. 네가 원하는 건 뭐든지 다 들어줄 테니까…….”

“무례하시네요.”

율리아의 차가운 일갈에, 바실리가 얼굴을 굳혔다. 반대로 레위시아 왕자의 얼굴엔 더욱 진한 웃음기가 피어올랐다.

“무례하다니?”

“저는 레위시아 오르테가 2왕자 전하의 측근 시녀입니다. 고귀한 왕족의 명예를 함께 짊어지고 지켜야 할 의무가 있는 시녀이지요. 후작 영식께서는 예의와 절차를 갖춰 약속을 잡는 게 좋겠습니다.”

“하!”

마지막에 웃은 사람은 레위시아였다. 손끝에 살짝 올려 두기만 했던 율리아의 손을 꽉 당겨 잡고, 레위시아가 큰 소리로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하!”

“전하.”

“왕궁 경연이 시작된다고 해서 온종일 기분 더러웠는데, 이 순간을 위한 인내였나. 내가 시녀 하나는 참 잘 골랐지.”

레위시아는 바실리의 시선이 그가 잡은 율리아의 손에 머물러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래서 더 놓기가 싫어졌다. 보란 듯이 당겨 잡고 서 있었더니, 바실리가 레위시아를 한 대 때리기라도 할 기세로 노려보았다.

율리아는 그걸 다 알면서도 시치미를 뚝 뗀 채 레위시아에게 말했다.

“저 때문에 전하께서 저녁 시간을 방해받게 되었어요. 죄송합니다. 제가 후작 영식을 잘 설득해서 보내도 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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