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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화 (13/319)

12화

“코코 시녀님, 이게 그렇게 분노하실 일은 아니에요. 신체검사는 당연히 제가 할 거고, 율리아 시녀가 불편해한다면 다른 사람으로 교체할 수도 있습니다.”

“저기요, 관리직 시녀님.”

“신원 조사도 그래요. 간단한 질문 몇 개만 대답하면 되는 일이에요. 저희도 정말 이러고 싶지 않았답니다.”

관리직 시녀가 코코를 부드럽게 달랬다. 하지만 그게 꼭 철부지 어린애를 타이르는 것 같은 말투여서, 어찌 들으면 상당히 기분 나쁠 수도 있었다.

관리직 시녀는 모시던 왕족이 죽었을 때, 가문으로 돌아가지 않고 왕가에 충성하기 위해 남은 자들이 주로 가는 자리였다.

“여기 관리들한테도 잘 말해 둘게요. 율리아 시녀는 이제 레위시아 왕자 전하의 사람이니, 제대로 대우하라고요.”

그렇게 말하니까 꼭 그쪽에서 양보하는 것 같은 모양새가 연출되었다. 율리아는 저 노년의 관리직 시녀가 꼭 능구렁이 같다고 생각했다.

이제는 정말 싸우면 안 된다. 자칫 잘못했다간 일이 커져 코코에게 불똥이 튈 수도 있었다.

“코코, 저는 정말 괜찮아요.”

율리아가 코코에게 한 걸음 다가가 그녀의 소매를 살짝 잡았다가 놓았다. 그러곤 고개를 들고 희미하게 웃어 보였다.

코코는 그게 더 짜증 나는 모양이었다. 잔뜩 치뜬 눈으로 관리들을 한 번씩 노려보더니, 붉은 입술을 꽉 깨물었다가 놓았다. 그러곤 관리직 시녀를 향해 말했다.

“신원 조사가 됐건, 신체검사가 됐건…… 다 여기서 하시죠. 제가 보는 앞에서요. 죄인도 아닌 사람을 무작정 궁내부로 끌고 가게 둘 수는 없으니까.”

“그렇게 하지요.”

관리직 시녀가 부드럽게 웃으며 앞으로 걸어 나왔다.

율리아는 왕자의 궁에 있는 작은 방에서 관리들과 마주 앉아 몇 가지 질문에 대답했다. 출신 보육원과 마조람 후작에게 후원을 받았던 일, 브레웨 아카데미에 관련된 질문이 대부분이었다.

궁내부 관리들은 율리아와 바실리 마조람의 관계라거나 두 사람이 함께 도망치려 했던 일에 관해 묻고 싶어 했다. 하지만 앞에서 팔짱을 낀 채 서슬 퍼런 시선을 보내는 코코 때문에 그것까진 물어보지 못했다.

신체검사는 더 빨리 끝났다.

관리들을 모두 내보낸 뒤, 관리직 시녀가 율리아에게 속옷만 남기고 옷을 벗으라고 말했다.

코코는 그때에도 나가지 않고 방을 지키고 서 있었다.

율리아가 드레스를 벗고 자리에 섰다. 관리직 시녀는 그녀의 주위를 한 바퀴 돌며 문신이나 병이 없는지 확인했다.

율리아는 전체적으로 선이 가늘고 사슴처럼 목이 길었다. 자세가 단정하고 곧아, 등과 허리에서 다리까지 쭉 뻗은 모양새가 아름다웠다.

가까이에 서면 코코보다 한 뼘 정도 키가 컸는데, 팔다리가 가늘어 몸이 커 보이지는 않았다.

“고생했어요.”

신체검사가 끝난 뒤, 관리직 시녀가 웃으며 율리아의 어깨를 두드렸다. 그러곤 벗어 두었던 드레스를 입는 것까지 도와주었다.

“오랜만에 보는 진짜 미인이네요. 그동안 화려하고 매력적인 분들이야 많았지만, 이렇게 선이 우아하고 고전적인 얼굴이 진짜 미인이라고 나는 생각하거든요.”

관리직 시녀의 칭찬이 이어지자, 율리아가 대수롭지 않게 감사 인사를 했다.

“고맙습니다.”

그런데 코코는 그것조차 불만이었는지 짧게 코웃음을 쳤다.

“걔는 시녀예요. 전하의 애인이 아니라.”

“아무렴요, 코코 시녀님.”

“하고 싶은 조사 다 끝나셨으면 돌아가세요. 그 평민 시녀는 왕자 전하의 궁에 도착하자마자 제 방이 어딘지도 모른 채 끌려와서 조사받고 있었으니까.”

나이 많은 관리직 시녀는 코코의 앙칼진 반응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부드럽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곤 율리아에게 기분 나빠하지 말고 앞으로 궁 생활 잘하라는 덕담까지 해 주고 나서야 궁내부로 돌아갔다.

“따라와.”

이제야 율리아의 방을 안내해 줄 수 있게 된 코코가 문을 쾅 소리가 나도록 세게 열었다.

방 안내야 하녀나 시종을 시켜도 되었을 일인데, 굳이 궁내부의 신원 조사가 끝날 때까지 기다린 이유가 무엇일까.

율리아가 코코에게 말을 걸었다.

“코코,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하세요.”

“야, 너 집으로 돌아가.”

그러자 코코가 우뚝 걸음을 멈추더니 기다렸다는 듯 와르르 말을 쏟아내었다.

“이러고 여기서 살고 싶니? 브레웨 훈장의 주인이라며. 그럼 어딜 가든 먹고사는 데 큰 지장 없을 거 아냐.”

“전 갈 데가 없어요. 집도 없고, 가족도 없어요.”

“그렇다고 왕궁엘 들어와? 정신 좀 차려. 너 같은 평민 시녀를 저 사람들이 어떻게 바라보고, 어떻게 대하는지 방금 겪었으니 알겠지. 저건 아무것도 아냐. 앞으로는 저것보다 훨씬 더 더럽고 짜증 나는 일뿐일 텐데.”

“괜찮아요.”

“괜찮다고? 뺨을 맞아도 괜찮고, 채찍으로 맞아도 괜찮다고 할 셈이니?”

괜찮다는 말은 거짓이 아니었다. 율리아에게 이 정도는 상처도 아니었다. 그저 귀찮고 짜증 나는 정도일 뿐이었다. 지금까지 그녀가 겪었던 과거와 비교하면, 이 정도는 애교였다.

코코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모양이었지만.

“마조람의 후계자를 꾀어낸 요사스러운 여자라는 말도 모자라서, 이번에 레위시아 왕자를 유혹하려고 왕궁까지 들어간 탐욕스러운 계집이라고 할 텐데, 그런 말까지 들어가면서 왕궁에 있어야 할 이유가 뭐야?”

“죽기 싫어서요.”

율리아가 살짝 웃었다. 차분하고 담담한 태도였다.

“마조람 후작가에서 고용한 하이에나들이 제 목숨을 노리고 있거든요. 어디로 도망가든 끝까지 절 쫓아올 거예요.”

“차라리 다른 귀족한테 몸을 의탁하거나…….”

“오르테가 왕국에 마조람 후작의 영향력이 미치지 않는 곳이 있나요? 저는 잘 모르겠어요.”

코코가 눈을 천천히 깜박였다. 생각에 빠진 얼굴이었다. 율리아에 대한 소문은 코코도 익히 들었을 테니, 아마 그 일에 대해 생각하는 것이리라.

“그럼…… 바실리 마조람 그 자식은 널 가지고 놀다가 버린 것도 모자라서, 죽게 내버려 두고…… 이 지경이 되도록 아무것도 못 했다는 말이네?”

“네.”

“남자 보는 눈이 없어도 아주 더럽게 없구나, 너.”

코코가 무슨 말을 하든 시종일관 담담한 태도로 듣기만 하던 율리아가 처음으로 눈동자를 동그랗게 치떴다. 조금 놀란 얼굴이었다.

“왜, 기분 나빠? 그러라고 한 말이야. 남자를 골라도 어쩜 그렇게 한심하고 이기적인 놈을 골랐니? 눈이라는 게 달려 있으면 좀 제대로 보지 않고.”

“아뇨, 그게 아니라.”

율리아가 슬그머니 웃었다.

“똑같은 말을 들은 적이 있어서.”

“뭐 이런 애가 다 있어?”

질색하며 앞서 걷던 코코가 율리아를 데려다주고 휙 사라졌다.

율리아는 왕자궁 2층의 넓은 방을 배정받았다. 옷 방과 욕실이 딸린 방이었다.

본래 다른 시녀들은 가문에서 전속 하녀를 두 명 정도 데려온다는데, 평민인 그녀는 시중들어 줄 사람을 부를 여유가 없었다. 그래서 필요할 때에만 왕자궁 하녀들의 도움을 받기로 했다.

“그, 너무 기분 나빠하지 마십시오. 저래 봬도 걱정하시는 겁니다. 율리아 시녀님이 상처받는 일이 생길까 봐서…….”

궁내부 관리들이 돌아갈 때까지 기다렸다가 가방을 들어다 준 시종이 율리아를 달래기 위해 말을 걸었다. 코코의 뾰족한 태도 때문에 율리아가 의기소침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좋은 분인 것 같아요.”

“예?”

“아까 하녀들이 저 때문에 불편해하니까 나서서 정리해 주신 거잖아요. 처음부터 좋은 분인 것 같다고 생각했어요.”

“예에?”

“제가 평민이라서, 궁내부까지 따라갔다가 해코지라도 당할까 봐 걱정해 주신 것도 알아요.”

시종의 얼굴이 이상하게 일그러졌다. 친절하게 웃는 얼굴 그대로 굳어서 율리아의 말을 믿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하는 듯했다.

“걱정하지 마세요. 저는 코코 시녀님을 아주 좋아하니까요.”

“그…… 네, 알겠습니다. 그럼 편히 쉬세요. 왕자님은 내일 오실 예정이니까, 도착하시면 알려 드리겠습니다.”

율리아는 시종에게 고맙다 인사한 뒤 그를 내보내고, 옷 방으로 들어가 두 벌뿐인 원피스를 탁탁 털어 걸었다. 바바슬로프가 과자 사 먹으라고 준 금화가 들어 있는 지갑도 잘 챙겨서 서랍에 넣었다.

그러곤 창가로 걸어가 창문을 활짝 열었다.

얇은 커튼이 바람에 날려 장막처럼 펼쳐졌다. 창밖에서 변덕스러운 봄바람이 불었다. 파릇파릇하게 초록 옷을 입은 정원이 펼쳐지고, 저 멀리 높이 솟은 성탑이 보였다.

대륙에서 가장 아름답다는 오르테가 왕궁. 창틀에 두 손을 올린 율리아가 천천히 왕궁의 전경을 눈에 새겼다.

해가 지고 있었다. 유난히 붉은 노을이 어두워진 저녁 하늘을 물들였다. 코코의 주홍색 눈동자를 연상케 하는 노을이었다.

‘코코.’

이번엔 바깥에서 싸우지 않겠다. 왕궁 안에서, 계단을 오르듯 하나씩 해치울 것이다.

그렇게 하기로 약속했으니까.

율리아의 얼굴에 그린 듯이 매끄러운 미소가 걸렸다.

‘또 만났네요.’

코델리아 힌치. 그녀는 율리아가 여덟 번째 삶을 살았을 때, 마조람을 상대로 끝까지 함께 싸웠던 동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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