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화
시종의 안내를 받아 궁 안으로 들어가니 화사하게 꾸며진 실내가 눈에 들어왔다. 흰 벽에 나무색 장식, 싱그러운 생화가 곳곳에서 향기를 뽐냈다.
아름다운 궁이었다. 창문을 통해 쏟아진 햇살이 화려한 샹들리에를 타고 반짝이며 부서졌다. 커튼과 장식용 테이블, 화병에 이르기까지 어울리지 않는 것이 없었다. 그 모든 게 과하지 않게 조화로워 주인의 품격을 대신하고 있었다.
“어…….”
율리아가 안으로 들어서자 복도를 오가던 하녀들이 당황해 멈칫거리며 섰다. 그녀에게 인사를 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혼란스러워하는 얼굴이었다.
본래 하녀들은 왕자의 측근 시녀와 마주치면 공손히 인사해야 하는데, 율리아의 신분이 그들과 같은 평민이라 어떤 방식의 인사를 해야 할지 모르겠는 모양이었다.
율리아는 그들의 고민을 덜어 주기로 했다.
“안녕하세요.”
머리를 숙이지는 않되, 부드럽고 겸손해 보이도록.
왕족의 시녀는 왕족의 얼굴을 대신하는 존재이기에 필요 이상으로 자신을 낮추어서는 안 되었다. 그래서 먼저 인사를 건네면서도 머리를 숙이지는 않았다.
그런데 하녀들이 더 큰 혼란에 빠지고 말았다.
“코코 시녀님한테 하듯이 인사해야 하는 거야?”
“몰라, 내가 어떻게 알아?”
“코코 시녀님은 백작 가문 영애잖아. 달라야 하는 거 아냐? 똑같이 인사했다가 코코 시녀님이 기분 나빠하면 어떡해?”
저들끼리 속닥거리느라 대충 인사하고 넘어갈 수 있는 적당한 때를 놓쳐 버린 하녀들이 쭈뼛거리며 율리아를 바라보았다.
시녀, 코코는 그때 나타났다.
“치마 잡아.”
높고 단단한 목소리였다. 정 없이 차가운 말투인데, 발음이 정확하고 끝이 부드럽게 떨어져 묘하게도 우아하게 들렸다.
“치마를 잡거나 고개를 숙여서 인사해. 전하를 대할 때처럼 무릎을 굽히거나 허리를 숙이지는 말고. 나한테 하듯이 하란 말이야. 나 참…… 내가 이런 것까지 알려 줘야 하니?”
“코코 시녀님!”
“내가 그깟 인사에 기분 나빠할 만큼 속이 좁고 싸가지가 없는 사람인 줄은 또 몰랐네. 너희가 평소에 날 어떻게 생각하는지도 잘 알았고.”
“그런 거 아니에요.”
쭈뼛거리던 하녀들이 코코에게 슬그머니 다가가 섰다.
재밌는 광경이었다. 하녀들을 혼내고 있는 건 코코인데, 이 어색한 상황에서 그쪽으로 도망간다는 건 그들이 그녀를 믿고 의지하고 있다는 뜻이었으니까.
몰래 웃음 짓던 율리아가 코코에게 먼저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처음 뵙겠습니다. 율리아 아르테입니다.”
코코가 율리아를 바라보았다.
양귀비를 연상시키는 진한 주홍색 머리카락과 눈동자, 귀밑에서 짧게 자른 단발은 모양 좋게 말려 동글동글 어여뻤다.
코코는 율리아가 입은 것과 크게 다르지 않은 크림색의 드레스를 입고 있었는데, 소매와 장식이 좀 더 화려하고 치마가 짧아 발목이 보였다.
“코델리아 힌치. 다들 코코라고 부르고 있으니까 너도 코코라고 불러.”
“네, ……코코.”
코코가 어서 가 보라며 손짓하자 하녀들이 밝은 얼굴로 복도 저편으로 사라졌다.
율리아는 그들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코코에게 물었다.
“왕자 전하께서는 언제 돌아오시나요?”
“몰라.”
코코가 앞장서고, 율리아가 그녀의 뒤에서 걸었다. 그리고 그 뒤엔 율리아의 짐 가방을 든 시종이 따라왔다.
“기본적인 건 다 알고 온 거겠지? 모르는 게 있으면 물어봐도 되지만 너무 귀찮게는 하지 마.”
“네.”
“왕궁 가까운 곳에 집이 있다면 출퇴근해도 상관없어. 왕자님은 시녀를 달고 다니는 걸 좋아하지 않는 편이라서, 꼭 필요할 때만 있어 준다면 나머지 시간엔 하고 싶은 걸 해도 되고.”
“꼭 필요할 때가 언제인데요?”
율리아가 묻자. 앞서 걷던 코코가 홱 뒤를 돌아보았다. 인형처럼 무표정한 얼굴에 처음으로 감정이 떠올랐다.
“몰라서 묻는 거니?”
“네, 말씀해 주세요.”
“바실리 마조람을 내치고 모욕하고, 조롱해야지. 네가 여기 들어올 수 있었던 건 브레웨 훈장의 주인이어서가 아니야. 마조람 후작가와의 관계 때문이지.”
코코의 얼굴에 떠오른 건 선명한 비웃음이었다. 율리아를 비웃는 건지, 아니면 그런 유치한 이유로 시녀를 들인 왕자를 비웃는 건지, 그것도 아니면 바실리를 비웃는 건지는 알 수 없었다.
율리아는 기분 나빠하지 않았다. 오히려 희미하게나마 미소를 짓기까지 했다.
코코는 그런 율리아를 탐색하듯 째려보더니 흥미가 식었는지 다시 홱 고개를 돌렸다.
“네가 쓸 방은 2층…….”
율리아가 코코를 따라 2층으로 올라가기 위해 첫 번째 계단에 발을 디뎠을 때였다.
궁 바깥에서 어수선함이 느껴졌다.
누군가 또 2왕자의 궁을 방문한 모양이었다. 병사들이 용건을 묻는 소리가 들리고, 약간의 실랑이가 있었다.
곧이어 문이 열리더니 두 명의 관리와 한 명의 시녀가 안으로 들어왔다.
“궁내부에서 왔습니다. 이번에 들어온 시녀가 누굽니까?”
불친절하고 성의 없는 태도였다. 그들은 인사는커녕 이름을 밝히지도 않았다. 2왕자의 궁에 좋은 일로 방문한 게 아니라는 걸 누구라도 알 수 있을 법했다.
율리아는 단정하게 서서 그들에게 말했다.
“제가 이번에 2왕자 전하의 시녀가 된 율리아 아르테입니다.”
“아, 그쪽이군.”
관리가 수염 아래서 입술을 꾹 다물더니 율리아를 위아래로 쓱 훑어보았다. 꼭 상인이 물건을 고르는 듯한 시선이었다.
“따라오너라. 왕궁에서 일하려면 신상 조사를 거쳐야 하니.”
그들은 율리아를 데리고 궁내부로 가려고 했다. 율리아가 의아함을 느끼고 물었다.
“신상 조사라니요? 저는 왕자 전하께서 직접 임명하신…….”
“말이 많구나. 평민이 왕족의 시녀가 되려면 신원이 확실한지, 출신이나 과거에 불온함이 없는지 꼼꼼하게 살펴야 한다. 나 참, 내가 이딴 걸 일일이 설명하기나 하고…….”
그의 말은 율리아의 신분이 평민인 데다 수치스러운 과거가 있는 여자이기 때문에 수상쩍은 구석이 없는지 데려가 조사해 보겠다는 것이었다.
따라가야 하나.
율리아는 고민했다. 오르테가 왕궁 역사에 평민이 왕족의 측근 시녀가 된 사례가 거의 없어 이러는 것 같았다. 보통 왕족의 시녀가 된 평민은 그의 애첩이거나 애인이었다.
“네가 누군가의 사주를 받고 왕궁에 숨어든 첩자일 수도 있지 않으냐. 우리는 그런 것을 모두 알아야 한다. 그러니까 잔말 말고 궁내부로 가서 관리직 시녀님께 신체검사부터 받아라.”
“신체검사요? 지금…… 제 몸을 검사하겠다는 말씀인가요?”
율리아가 고요히 물었다. 그녀의 목소리에 은은히 깃든 노여움을 읽었는지, 관리가 울컥 역정을 냈다.
“우리는 뭐 한가해서 이러는 줄 아느냐? 네 몸에 불길한 사교도의 문신이 있지는 않은지, 병에 걸린 건 아닌지, 여자 행세를 하고 들어온 남자는 아닌지, 알아야 할 거 아니냐. 그러게 왜 너 같은 평민 계집이 시녀가 되겠다고 나서서는……!”
관리가 언성을 높여 율리아를 윽박질렀다. 동시에, 계단 위에서 그걸 지켜보던 코코의 가느다란 인내심도 뚝 끊어졌다.
“듣자 듣자 하니까 아주 웃기고 자빠졌네.”
율리아보다 몇 계단 위에 올라 서 있던 코코가 완전히 이쪽으로 돌아서서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코코의 주홍색 눈동자가 평소보다 붉었다. 그 안에 가득 차오른 짜증이 우르르 쏟아졌다.
“궁내부 관리들이 왕족의 시녀를 데려가서 죄인 다루듯 조사하고, 옷을 벗겨 몸까지 검사하는 줄은 몰랐네? 언제 그런 절차가 생겼어? 내가 왕궁에서 생활한 지가 10년이 다 되어 가는데, 처음 듣는 얘기거든?”
“코코 시녀님.”
관리들이 한숨을 내쉬었다. 코코가 이 일에 끼어들 줄은 몰랐는지, 그녀를 설득하려 입을 열었다.
“레위시아 왕자님은 아직 미혼입니다. 평민 여자, 그것도 이런저런 소문까지 달고 다니는 여자가 별안간 왕자 전하의 측근 시녀가 되었는데, 어떻게 저희가 아무 조사도 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걸 왜 그쪽에서 해.”
“이게 궁내부의 소관이 아니면 무엇입니까. 저 애가 시녀가 된 이상, 왕궁 내의 일인 것을요.”
“아하.”
코코가 입술을 비틀었다. 하얀 얼굴에 조소가 가득했다. 우아했던 말투가 이제는 완전히 비아냥으로 들렸다.
“레위시아 전하께서 직접 임명한 시녀가 불온한 년인지 의심스러우니, 궁내부 관리님께서 친히 데려가 조사해 주시겠다는 거네? 심지어 브레웨 학장이 올해의 훈장을 수여한 애를?”
“코코 시녀님, 말씀이 좀.”
“하물며 신체검사? 저기서 일하는 하녀 애들한테도 한 적 없는 신체검사? 내가 제대로 들은 게 맞지, 지금?”
“그, 그거야 당연히 관리직 시녀님께서…….”
“나도 벗겨서 검사하라 그러지그래?”
“예?”
“내 몸에 흉악한 사교도 문신이 있을지 알 게 뭐야, 안 그래? 전염병 발진이 있을 수도 있고, 내가 전하를 해치러 들어온 하이에나인데 시녀 행세를 하고 있을 수도 있는 거잖아? 그쪽 말이 그렇잖아, 지금?”
코코의 목소리가 갈수록 커졌다. 이제는 아예 궁이 쩌렁쩌렁 울리도록 고함을 지르는 수준이었다. 멀찌감치 숨어서 이쪽을 살피던 하녀들이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발을 동동 굴렀다.
코코, 코델리아는 힌치 백작의 무남독녀 외동딸이었다. 게다가 그녀는 왕궁 내에서 악마 시녀라 불릴 만큼 악명이 높았다.
분위기가 살벌해지자, 율리아는 이쯤에서 코코를 말려야겠다고 생각했다.
“코코, 저는 괜찮아요.”
“뭐?”
“제가 조사만 받고 오면 되는 일이니까…….”
“닥쳐, 율리아 아르테. 너는 레위시아 전하의 측근 시녀야. 그분의 명예를 함께 짊어지고 지켜야 할 의무가 있어.”
코코의 엄한 목소리가 율리아의 어깨에 묵직하게 내려앉았다.
“왕족의 시녀가 가져야 할 첫 번째 덕목은 충성심이요, 둘째가 품위이다. 모르고 들어온 건 아니겠지? 시녀는 왕족의 일상을 함께 하기에, 스스로 드높이되 책임을 진다!”
코코는 율리아를 가르치는 것처럼 말하고 있었지만, 그건 사실 관리들을 질책하는 말이었다.
궁내부 관리들이 얼굴을 찡그린 채 시선을 주고받았다. 그들은 코코가 여기 버티고 있는 이상 율리아를 강제로 데려갈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러자 지금까지 관리들의 뒤에 서서 조용히 사태를 관망하던 노년의 시녀가 뒤늦게 한 걸음 앞으로 나와 입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