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화
* * *
‘저주라.’
카루스 란케아는 저주나 마법 기물, 주술 같은 걸 믿지 않는 편이었다.
바이칸 제국에도 비슷한 전설이나 소문이 종종 있었지만, 한 번도 그것들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 본 일이 없었다.
그가 믿는 건 전쟁터에서 인간은 칼과 창, 화살 앞에 무력하다는 것이고, 때로는 사람의 목숨이 실력보다 행운으로 좌우된다는 정도였다.
그런데 그는 요즘 율리아 아르테를 떠올릴 때마다 답을 알 수 없는 수수께끼를 마주한 기분이 들어 답답했다.
율리아가 꺼내 놓는 그 많은 정보는 그녀가 맥스웰 같은 그림자 정보상이라서 가능한 게 아닐까, 이런 의심도 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기엔 그녀의 행보가 너무 이상했다.
애초에 가진 정보가 많다고 해서 미래를 예측할 수 있을 리도 없었다.
‘내 이름을 알고 있었어.’
카루스가 율리아의 말에 귀를 기울이게 된 시발점이 바로 그것이었다.
오르테가의 평민 여자가 저 먼 제국군 기사단장의 얼굴과 이름을 어떻게 알고 있었을까.
율리아는 습격과 날씨, 해방군 시위를 예고했다. 또 레위시아 2왕자에 대해 알고 있었다. 그 어렵다는 브레웨 훈장을 받았으며, 바실리 마조람이 무슨 말을 할지 그것까지 모두 알고 있었다.
만약 율리아가 말한 대로 제국군 함대가 해적의 돈을 유통하고 있다는 것까지 확인되면, 그때는 어떻게 해야 할까.
‘일단은 감시해야겠지.’
카루스는 아무리 생각해도 답이 나오지 않으리란 걸 알았다.
그럼 차라리 오르테가 왕궁에 사람을 심어 놓고 가까이에서 감시하는 편이 나았다.
의심스러운 것과는 별개로 카루스는 율리아가 아까웠다.
제국에서 만났다면, 어쩌면 제 사람으로 삼았을지도 모르겠다. 아무도 모르는 곳에 들여놓고 가장 비밀스러운 일에 썼을 것이다.
숨 쉬듯 자연스럽게 사람을 조종하는 능력은 발군이고, 누구든 대화할 때 그 어두운 녹색 눈동자에 사로잡히면 시야가 좁아져 불리한 입장에 서게 된다.
그녀는 겁이 없는 정도가 아니라, 하루살이처럼 내일이 없는 듯 살았다.
“진짜였습니다.”
율리아가 왕궁에서 보낸 마차를 타고 간 뒤, 여관을 떠나려는 카루스에게 맥스웰이 찾아왔다.
표정을 숨기는 것만큼은 여느 배우 못지않게 철두철미하던 녀석이 잔뜩 긴장한 기색으로 입을 열었다.
“제길, 진짜였다고요. 대체 어떻게 아셨습니까? 우리 제국군 함대가 바다 위에서 해적의 금화를 대신 실어다가 항구에 내려 준답니다.”
“뭐?”
“돈을 세탁하는 건 이 나라 귀족들인 모양인데, 워낙 많은 사람이 연루되어 있어서…….”
카루스의 눈빛에 스산한 기운이 맴돌았다. 그는 창밖 저 너머 어딘가에 있을 바다를 떠올리며 짐승 같은 미소를 지었다.
“하! 바이칸의 해군이 고작 해적 놈들의 돈 심부름이나 하고 있단 말이지.”
“카루스 님.”
“폐하께서 진노하시겠군.”
카루스가 중얼거리자, 맥스웰의 얼굴이 해쓱해졌다. 황제의 진노도 무섭지만 당장은 눈앞에 있는 그의 상관이 더 두려웠기 때문이다.
“증거는 찾았나?”
“아뇨. 놈들이 어찌나 철두철미하게 관리하는지, 오르테가 사람 중엔 그에 대해 증언하겠다는 놈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렇다고 의심만으로 남의 나라 귀족을 납치, 고문할 수도 없잖습니까.”
“그럼 제국군을 치면 되겠군.”
우린 바이칸의 기사들이니까, 바이칸의 해군을 치는 건 괜찮겠지. 카루스가 이상한 논리로 저 자신을 설득하더니, 맥스웰에게 말했다.
“난 부하들과 함께 바다로 가겠다. 넌 오르테가 왕궁으로 들어가서 레위시아 왕자의 측근 시녀가 된 율리아 아르테를 전력으로 도와.”
“예?”
“그냥 뒤만 좀 봐줄 생각이었는데…… 일이 이렇게 된 이상, 확실하게 아군으로 만들어 두는 편이 좋겠지.”
맥스웰이 그게 무슨 소리냐고 물었지만 카루스는 설명해 주지 않았다. 그 대신 그는 맥스웰의 손에 엄청난 액수의 어음을 쥐여 주고, 이렇게 말했다.
“원하는 모든 것을 지원해 줘라. 물건이건, 사람이건. 가리지 말고 전부.”
“전부요?”
“그래. 전부. 율리아 아르테에게 엄청난 배경이 있다고, 은막의 후원자가 그녀를 위해선 뭐든 내어 줄 준비가 되어 있다고 모두가 느낄 수 있도록.”
도대체 율리아 아르테가 무엇이기에? 더벅머리 아래 맥스웰의 두 눈이 가느스름해졌다.
같은 시각, 율리아도 카루스를 생각하고 있었다.
‘소문하곤 달라.’
카루스 란케아는 바이칸 제국에서 이름보다 별명으로 더 유명한 사람이었다.
그는 리바이어던 기사단의 통솔자이며, 같은 이름을 가진 함대의 제독이고, 황제의 두 번째 기사라는 특별한 호칭까지 가지고 있었다. 그중 가장 많이 알려진 것이 함대의 사령관이란 지위여서, 사람들은 그를 ‘무혈 제독’이라고 불렀다.
몸 안에 더운 피가 흐르지 않는 것처럼 냉혈한이어서 그런 별명이 생긴 건지, 아니면 그가 피 흘리는 모습을 본 자가 아무도 없어서 그런 건지는 몰랐다.
‘둘 다겠지.’
율리아는 그 소문이 조금 잘못되었다고 생각했다.
카루스가 신중한 지휘관이며 대단한 기사라는 것은 알겠으나, 냉혈한이라는 말은 틀렸다. 그건 그녀가 몇 번이나 겪었던 과거에서 카루스가 부하들의 죽음에서 벗어나지 못해 복수자의 길을 걸었던 것만 봐도 알 수 있는 사실이었다.
카루스 란케아는 적과 아군의 구분이 확실한 사내일 뿐이었다.
적에겐 한없이 무정하고 잔혹하지만, 아군에겐 마냥 든든하고 믿을 수 있는 사람.
‘그의 적이 되어선 안 돼.’
고작 십여 일을 함께 보냈을 뿐인데도 율리아는 카루스와 그의 부하들에 대해 꽤 많은 것을 알 수 있었다.
수많은 전장을 헤치며 생사고락을 함께한 그들 사이에는 타인이 침범할 수 없는 견고한 유대가 있었다. 그건 상관의 권위나 부하들의 충성심만으로는 설명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형제 같았어.’
율리아는 그 안에 속해 있던 지난 며칠간 전에 없던 평안함을 느꼈다.
죽었다가 다시 시작할 때마다 하이에나들에게 쫓기며 불안해했던 그녀는 카루스와 바바슬로프의 보호 아래서 매일 밤 아주 깊은 잠을 잤다.
카루스 란케아는 성공할 것이다. 황제가 내린 임무를 완수하는 것뿐만 아니라, 그 안에 도사리고 있는 권력자들의 부적절한 협력 관계를 파악하게 되리라.
율리아는 아직 그에게 해야 할 말이 많이 남아 있었다. 미래에 대한 정보는 귀하지만, 서로에게 신뢰가 쌓이지 않으면 무용지물이 될 수도 있다.
‘괜찮아. 바이칸의 해군이 해적들과 내통하고 있다는 걸 확인하고 나면, 그는 반드시 날 찾아오게 될 거야.’
마조람의 목을 치기 위해선 여러 개의 무기가 필요하다.
심장을 찌를 화살, 목을 자를 검, 든든한 방패와 묵직한 창. 치명적인 독이 필요할 수도 있고, 막대한 금화가 들어갈 수도 있다. 왕족이란 신분, 무리를 이룬 귀족, 어쩌면 도둑이나 사기꾼이 필요해질 수도 있다.
율리아는 그 모든 걸 차근차근 준비해 놓고, 마조람의 모든 것을 빼앗을 생각이었다.
‘내겐 카루스가 필요해. 그러려면 내가 먼저 그에게 필요한 사람이 되어야만 한다.’
카루스 란케아는 율리아가 찾은 최고의 무기였다. 그는 무엇이든 될 수 있었다.
그리고 또 한 사람.
율리아가 반드시 찾아야 할 인연이 왕궁에 있었다.
“시녀님, 곧 왕자 전하의 궁에 도착합니다!”
마차 밖에서 시종이 우렁차게 외쳤다. 율리아는 알았다고 대답하며 드레스와 머리카락을 정돈했다.
마차는 왕성 정문을 통과한 뒤 넓은 정원을 가로질렀다. 그러곤 오르테가 왕궁을 대표하는 다섯 개의 성을 지나 한 아름다운 건물 앞에 멈춰 섰다.
레위시아 오르테가 2왕자의 궁이었다.
율리아를 마중 나왔던 시종이 마차 문을 열며 넉살 좋게 말을 걸었다.
“레위시아 왕자 전하께서는 오늘 자리에 안 계십니다. 제가 율리아 시녀님의 방을 안내해 드리고, 짐 정리도 도와드리겠습니다.”
“저는 짐이 별로 없어요. 정리는 안 도와주셔도 됩니다. 그래도 고마워요.”
율리아는 최대한 겸손한 태도로 말했다.
그녀는 왕궁에서 일하는 시종들에게 잘 보일 필요가 있었다. 하녀나 하인도 마찬가지였다. 왕족의 측근 시녀가 되었으나 신분상 평민인 그녀의 애매한 위치 때문이었다.
시종은 그런 그녀가 마음에 들었는지, 조금 더 친근한 미소를 띠고 손을 내밀었다.
“그럼 그 가방이라도 들어다 드리겠습니다. 이리 주세요.”
“고맙습니다.”
레위시아 왕자의 궁은 전통을 중시하는 오르테가 왕궁에서 가장 느슨한 분위기를 가진 곳이었다. 다들 자유분방한 왕자의 성격이 묻어나는 거라고 말했지만, 율리아는 그가 왕위 후계 싸움에서 한 걸음 떨어져 있는 애첩의 아들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아시는지 모르겠지만 저희 궁엔 시녀장이 안 계십니다. 시녀님도 원래 한 분뿐이었는데, 이번에 율리아 시녀님이 오시면서 두 분이 되었어요.”
시종은 율리아에게 최대한 많은 걸 알려 주고 싶어 했다. 왕궁 생활에 익숙지 않을 그녀를 위한 배려였다.
“그 시녀님은 어떤 분인가요?”
율리아가 조심스레 물었다.
그녀의 눈동자가 반짝반짝 빛났다. 입가엔 어느새 작은 미소가 걸려 있었다. 누가 봐도 선배와 잘 지내고 싶어 하는 신입처럼 보이는 모습이었다.
조금 망설이던 시종이 목소리를 낮추어 대답했다.
“코코 시녀님은 어려운 분입니다. 나쁜 사람이란 말은 절대 아니에요. 레위시아 왕자님도 그렇게 말씀하셨고요. 다만…… 좋고 싫은 게 워낙 명확한 분이어서.”
칭찬인지 염려인지 모를 말이었다. 그래도 율리아는 작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