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화
3. 코델리아 힌치
과거, 두 번째 삶에서 율리아는 바실리의 같잖은 변명을 믿고 싶어 하는 또 다른 자신이 제 안에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건 사랑이라기보다는 두려움에 가까웠다. 내가 멍청하게 이딴 놈을 사랑이라고 착각하다니, 그 실패로 인한 자괴감이 두려웠다. 그래서 차라리 바실리의 변명을 믿어 버릴까도 했다.
율리아를 사랑한다면서 공주와 결혼하겠다는 그는 변명도 참 가관이었다.
“율리아, 그건 내 힘으로 어쩔 수 없는 일이야. 내 마음은 전부 너를 향하고 있지만…… 나는 마조람의 아들로 태어났어. 가문에 책임과 의무가 있잖아. 이해하지? 공주님은 그냥 내 껍데기와 결혼하실 뿐이야. 우리 사이는 아무것도 변하지 않아.”
우스웠다. 그걸 말이라고 하느냐고 묻고 나서, 그게 그의 진심이라는 것도 알았다.
바실리는 자기합리화의 천재였다. 또 지독하게 이기적이었다.
율리아는 그제야 자신의 선택이 최악이었음을 인정했다.
“공주랑 결혼? 웃기는 소리 하지 마. 네가 가엾은 평민을 가지고 놀다 버린 뒤에, 공주랑 결혼하기 위해 그 여자를 죽여 없애려 했다고 폭로할 거야. 네 가문의 비리 장부를 만든 것도 모자라, 네 여동생을 위해 4년 동안이나 대리 시험까지 쳐 준, 충성스러운 평민을!”
“율리아!”
“나는 너 때문에 괴물이 되었는데…… 그런 나를, 뭐라고?”
“제발 어리석은 짓 좀 하지 마.”
“어디 또 죽여 보시지!”
바실리는 제 손으로 율리아를 죽이지는 못했다. 하지만 그녀가 달아나지 못하게 감금시킬 수는 있었다.
그는 율리아를 사랑하는 자신의 마음이 진짜라고 믿었다. 실제로 괴로워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 자신의 명예나 자존심보다 사랑하지는 않았다.
율리아는 바실리에 의해 감금되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하이에나의 손에 죽었다.
* * *
“마음이 죽어서요.”
널 버린 남자 앞에서 어떻게 그렇게 차분할 수 있었냐고 묻는 바바슬로프에게, 율리아가 대답했다.
“이 세상에서 내 마음을 제일 잘 죽일 수 있는 건 나인 것 같거든요. 상처 위에 상처가 생기고, 덧나기 전에 또 상처가 생기고, 피 흐르고 살점이 떨어져 나가도 계속 외면하다 보면 그렇게 돼요.”
바바슬로프는 황당해했다.
“그건 그냥 그 자식이 나쁜 새끼라서 그런 거잖아. 바보야. 넌 아무 잘못이 없어. 상처받은 건 넌데, 왜 네 마음을 괴롭혀?”
“그래야 편하니까?”
“뭐래. 엉엉 울고 욕을 퍼부은 다음, 잘난 새 남자로 갈아 치워 버려. 그렇게 네댓 번 갈아치우고 나서 다시 말해.”
“그냥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내가 했던 게 사랑이 맞긴 할까? 혹시…… 어리고 멍청한 마음에 덕지덕지 꾸며 놓은 환상은 아니었을까.”
“뭔 소리야, 그게.”
“그런 거 있잖아요. 유니콘이나 뿔 달린 악마 같은, 세상에 없는 것들. 내 사랑은 그렇게 특별하다고 착각했는데, 실은 아주 흔하고 시시한 비극이었던 거예요.”
내용은 신랄한데 얼굴은 웃고 있다. 심지어 그게 제 이야기인데도 자기 연민 같은 건 느껴지지 않았다.
“너…….”
바바슬로프는 뭔가 할 말이 많아 보이는 얼굴로 율리아의 이야기를 듣고 있었는데, 입술을 몇 번이나 우물거리다가 결국엔 아무 말도 못 하고 도와 달라며 카루스를 노려보았다.
“왜.”
“뭐라고 좋은 말 좀 해 봐요.”
“네놈이 못하는 걸 왜 나한테 하래.”
“율리아가! ……저는 말재주가 없잖습니까.”
“내가 더 없어.”
그건 그래. 바바슬로프가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카루스는 그런 그를 한번 노려보더니 이렇게 말했다.
“넌 그냥 남자 보는 눈이 없었던 거다. 없어도 아주 더럽게 없었어.”
“아니, 무슨 말을 해도 그렇게 사람 기분 나쁘게……. 참 그것도 재주입니다, 진짜.”
바바슬로프가 슬그머니 율리아의 눈치를 보았다. 물론 그녀는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이었다.
“걱정해 줘서 고마워요. 바바슬로프는 정말 다정한 사람인 것 같아요. 나중에 결혼하면 분명 아내한테 사랑받을걸요.”
“진짜?”
율리아에게 칭찬을 들은 바바슬로프가 몸 둘 바를 모르고 쑥스러워했다.
졸업식이 끝나고 하루가 지났다. 일행은 여관 식당에 앉아 헤어짐을 준비하고 있었다.
두 사람의 대화엔 관심 없다는 듯 메뉴판만 응시하던 카루스가 율리아를 흘깃 보더니 지나가는 투로 말했다.
“어제 있었던 일…… 마조람 후작의 귀에 다 들어갔을 텐데, 대비책은 생각해 뒀나?”
“일단은 괜찮을 거예요.”
“어째서?”
“마조람 후작이 암살자를 보냈다는 증거가 없으니까요. 제가 할 수 있는 건 그냥 바실리가 나쁜 놈이라고 소문내는 정도인데, 그걸 가지고 후작이 직접 나서면 보기에 안 좋죠.”
“그 하이에나들을 다 생포할 걸 그랬군.”
카루스가 메뉴판을 내려놓으며 여관 직원을 불렀다. 이제나저제나 그의 부름만 기다리던 직원이 재빠르게 다가와 메뉴를 받아 적었다.
“이거랑 이거, 이것도. 음료는 됐고, 맥주와 물을 많이.”
“네, 알겠습니다. 다른 건요?”
“오늘 떠날 예정이니까 미리 계산하지.”
카루스가 직원에게 돈을 내밀었다. 그러곤 계산을 마친 뒤 율리아에게 다시 물었다.
“내가 그때 하이에나들을 잡아다가 네 손에 넘겨주었으면, 네 그 복잡한 복수도 한 번에 끝나는 거였나?”
“네? 그럴 리가요.”
율리아가 조그맣게 소리를 내어 웃었다.
“하이에나들이 제 손에 있었다면 후작가의 진짜 병력이 움직였을걸요. 그러면 저는 졸업시험을 치르긴커녕 지금쯤 시체 조각조차 남지 않고 남부 해안의 물고기 밥이 되었겠죠.”
“그런가.”
카루스가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율리아의 말이 옳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었다.
이번엔 바바슬로프가 물었다.
“바실리인가 파슬리인가 그 새끼는 이제 와 왜 그러는 건데? 나 같으면 미안하고 죄스러워서 얼굴 들고 나타날 엄두도 못 낼 것 같은데.”
“그야 바실리는 바바슬로프가 아니니까…… 그리고 그거, 진심일걸요.”
“뭐가?”
“절 사랑한다고 하는 거요. 진짜로 집을 떠나 너와 도망치려고 했다. 그런데 감시를 당하고 있어서 어쩔 수가 없었다. 우리에게 시간이 조금만 더 있었다면, 분명 행복해졌을 거다.”
“제정신이 아니고서야.”
바바슬로프는 도저히 바실리를 이해할 수 없다고 말했다. 율리아는 그냥 저도 그래요, 라고 맞장구를 쳐 주었다.
식사를 마친 뒤엔 각자 짐을 쌌다. 율리아가 왕성에 들어가게 되었기 때문에, 카루스와 바바슬로프도 여관을 떠나 본래의 목적을 위해 움직일 예정이었다.
“서운해.”
“저도요.”
바바슬로프가 훌쩍 코를 마시더니 굵은 손가락을 꿈지럭거리며 율리아를 힐긋거렸다.
“너 인마, 잘 들어. 왕궁은 그냥 신분 높고 화려한 사람들이 매일 연회나 하고 노는 그런 곳이 아니야. 눈 뜬 사람 코도 베어 가고, 귀도 베어 가고, 혀도 잘라 가는 데라고. 알았지? 조심하고 또 조심해.”
“알았어요.”
율리아에겐 짐이랄 게 거의 없었다. 그래서 바바슬로프의 짐을 함께 싸고 있었는데, 그가 자꾸만 그녀의 뒤를 졸졸 따라다니며 쉬지 않고 잔소리를 해 댔다.
“무엇보다! 남자 조심하고, 응? 바실리인가 그 자식처럼 저밖에 모르는 등신은 다시는 상종하지 말고. 알았어?”
“명심할게요.”
“또 찾아와서 지랄하면 가운데를 발로 뻥 차 버려.”
율리아가 이번에는 소리를 내서 웃었다. 그러다 귀족 폭행죄로 감옥에 간다고 말하기도 했다.
“넌 애가 똘똘하긴 한데 왜 이렇게 떼어 놓기가 불안하냐.”
“제가 왜요?”
“그냥 좀 위태로워…….”
그때, 여관 밖에서 웅성거리는 소리와 함께 목청 좋은 남자의 외침이 들렸다.
“레위시아 오르테가 2왕자 전하의 명입니다! 율리아 아르테는 왕자 전하의 측근 시녀로서 입궁할 채비를 갖추시오!”
율리아가 벌떡 일어나 창밖을 확인했다. 화려한 마차와 여섯 명의 병사, 그 앞엔 시종으로 보이는 자가 여관 입구에 커다란 상자를 내리고 있었다.
“뭐, 뭐야?”
“세상에…….”
“뭔데, 왜 그래?”
“왕자 전하께서 저를 데려오라고 사람을 보내셨나 봐요. 두 분은 2층에 계세요. 저 혼자 내려갈게요.”
율리아는 서둘러 움직였다. 바바슬로프의 방에서 복도로 나가자, 마침 카루스가 자기 방에서 나오고 있었다.
“카루스 님.”
“알고 있다.”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카루스는 잠시 말없이 율리아를 쳐다보기만 했다. 그러다 그녀에게 가까이 다가와 귓가에 속삭이듯 입을 열었다.
“율리아.”
“네.”
“필요한 게 있으면 맥스웰을 찾아라. 그가 널 도와줄 거야.”
율리아가 놀란 눈으로 카루스를 바라보았다. 묻고 싶은 게 많았지만, 아래층에서 왕자가 보낸 시종이 그녀를 찾고 있었다.
“어서 가 봐.”
카루스가 율리아의 등을 부드럽게 밀었다. 그러곤 바바슬로프와 함께 계단 난간 위에 서서 그녀의 모습을 지켜보았다.
“율리아 님?”
왕자의 시종이 계단 밑에서 율리아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천천히 계단을 내려가 시종이 내민 손을 잡고, 율리아는 왕자가 보냈다는 상자 앞에 섰다.
“레위시아 왕자 전하께서 율리아 시녀님께 선사한 것입니다.”
그 안엔 눈이 부시도록 아름다운 빛깔의 크림색 드레스가 있었다.
연회용 드레스는 아니지만, 그만큼의 정성이 보였다. 요란한 장식이나 보석은 없었으나 달빛처럼 창백한 레이스가 물결처럼 흘렀다. 단아하면서 우아하고, 고급스러우면서도 세련된 옷이었다.
크게 숨을 들이마신 율리아가 배 위로 두 손을 모았다. 그러곤 무릎을 살짝 굽혔다 펴고 말했다.
“준비하겠습니다.”
평민 소녀가 왕자의 측근 시녀가 되는 명예로운 순간을 목격하게 된 여관 주인이 싱글벙글 웃으며 비싼 방을 내어 주었다.
율리아는 그 안에 들어가 혼자서 드레스를 입었다.
큰 상자엔 드레스, 작은 상자엔 구두, 더 작은 상자엔 브로치가 들어 있었다.
방으로 들어갈 땐 수수하고 평범한 소녀였는데, 밖으로 나올 땐 고아한 왕궁 시녀님이 되어 있었다.
“가시죠.”
시종이 내민 손을 잡고, 율리아가 마차에 오르기 위해 움직였다.
계단 위에서 그녀를 바라보던 카루스가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율리아는 그를 향해 느리게 눈을 깜박였다. 두 사람의 시선이 서로에게 살짝 닿았다가, 밀어내듯 멀어졌다.
“와아아아!”
거리엔 이미 많은 사람이 모여 있었다.
시녀는 명예직이었다. 신분 높은 귀족의 딸들도 왕족의 측근 시녀가 되려면 아주 많은 시간과 노력을 들여야만 했다. 그런 자리에 평민이 당당하게 들어가게 됐으니, 한동안 많은 사람의 입에 오르내릴 일이었다.
화려한 마차 문이 열리고, 율리아가 그 안으로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