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화
“뭐?”
레위시아가 당황해서 두 눈을 크게 떴다. 그러더니 눈동자를 굴려 율리아의 왼쪽, 어느 방향을 바라보았다. 본다기보다는 가리키는 것 같았다.
율리아는 그곳에 바실리 마조람이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녀를 발견한 바실리가 이쪽으로 빠르게 다가오고 있었다. 성급하고 불규칙한 걸음이었다.
이 수많은 사람 중에도 오직 그의 존재만은 가시처럼 불쾌하게 걸리적거렸다.
“율리아!”
바실리가 그녀를 불렀다. 조급한 걸음과 떨리는 목소리에서 그의 분노와 불안이 여실히 느껴졌다.
마침 나타나 줘서 고맙네.
율리아는 한쪽 입꼬리를 올려 비웃음을 머금고, 레위시아를 향해 분명하게 말했다.
“저는 레위시아 왕자님의 시녀가 되고 싶습니다.”
바실리가 걸음을 우뚝 멈췄다.
자신을 보며 미심쩍어하는 왕자에게 조금 더 몸을 가까이 내밀고, 율리아가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후회하지 않으실 거예요.”
“어째서?”
“저를 시녀로 들이면 바실리 마조람이 후회하고 변명하고, 매달리고 무너지는 걸 가까이에서 보실 수 있거든요.”
“그래?”
레위시아가 곧바로 흥미를 드러냈다.
“너는 놈을 내치고 모욕하고, 조롱할 건가?”
“네.”
“좋다.”
레위시아가 환하게 웃었다. 악의적이고 짓궂은 미소였다.
왕족에게 평민 시녀 하나 들이는 건 일도 아니었다. 여차하면 언제든 내칠 수도 있었다.
그러나 마조람의 후계자가 망가지는 꼴을 가장 좋은 자리에서 구경할 기회는 흔치 않았다.
레위시아는 소원을 말한 율리아가 아니라, 충격받은 얼굴로 이쪽을 노려보는 바실리를 바라보며 선언했다.
“율리아 아르테. 너는 나의 측근 시녀가 될 것이다.”
예상했던 대로였다. 레위시아는 바실리를 엿 먹일 수만 있다면 이 정도 모험쯤은 얼마든지 받아 줄 용의가 있는 사람이었다.
“고맙습니다.”
율리아가 굽혔던 무릎을 폈다.
와아아아!
학생들이 환호성을 내질렀다.
후작가의 도련님에게 버림받았지만 당당하게 이겨 내고 자신의 능력으로 훈장을 쟁취한 뒤, 왕족의 측근 시녀가 된 여자.
아마 한동안 오르테가에서 가장 유명한 평민은 율리아 아르테일 것이다.
졸업식이 끝난 뒤, 율리아가 인파를 헤치며 아카데미를 빠져나가려던 때였다.
바실리가 빠른 속도로 다가오며 그녀를 불렀다.
“율리아!”
그는 흡사 달려오기라도 할 것처럼 보였다. 깔끔한 얼굴에 드러난 것은 놀랍게도 기쁨과 안도라, 율리아는 지긋지긋한 심정이 되었다.
“율리아, 살아 있어서 다행이다. 내 아가씨, 얼마나 찾았는지 알아? 왜 나한테 오지 않았어?”
거봐. 이렇게 말할 줄 알았다니까. 율리아는 재미없는 연극을 보듯 무감한 얼굴이었다.
뒤에서 걷던 카루스가 하, 하고 짧게 비웃었다.
“이리 와, 내 아가씨.”
바실리가 팔을 들어 율리아의 어깨를 감싸 안으려고 했다. 그 행동이 너무 자연스러워, 사람들의 눈엔 두 사람이 아직 사이좋은 연인인 것처럼 보였다.
그런데 율리아가 그에게서 한 걸음 크게 떨어졌다.
바실리가 애써 웃더니 거칠게 머리카락을 쓸어 올렸다.
“화났구나. 그래, 그렇겠지. 이해해. 근데 나 그날 네게 가려고 했어. 감시당하고 있었지만 그래도 네게 가려고 최선을 다했어. 조금만…… 조금만 더 날 기다려 줬으면 좋았을 텐데.”
“바실리.”
율리아가 자신을 피하자 당황한 바실리가 빠르게 해명했지만, 그녀에게선 조그만 마음의 틈도 느껴지지 않았다.
“정말이야, 믿어 줘. 내가 어떻게 너를 혼자 보내. 그건 있을 수 없는 일이잖아. 난 절대 널 배신하지 않아. 진짜야. 정말 가려고 했어. 작위, 가문, 이런 거 다 버리고…… 너랑 행복하게 살고 싶어서.”
“나 혼자 죽어 행복해지라고?”
율리아가 눈동자를 굴려 주위를 한 바퀴 둘러보았다.
마조람 후작가의 고귀한 후계자와 평민 여자의 금지된 사랑. 파국으로 치달은 두 사람의 결말을 구경하기 위해 모여든 사람들이 이쪽을 향해 눈과 귀를 활짝 열어 두고 있었다.
율리아가 차갑게 입을 열었다.
“그냥 내버려 뒀으면 혼자 알아서 얼어 죽었을 텐데, 하이에나까지 고용하느라 고생 많으셨겠네요. 그런데 아쉬워서 어떡하죠? 내가 이렇게 멀쩡하게 살아 있어서.”
“율리아…….”
“사랑한다면서 죽게 내버려 두고, 기다리라면서 암살자를 보내 놓고, 이제는 왜요. 직접 목이라도 조르시게?”
율리아의 말엔 칼날이 있었다. 감정이 없는 칼날이었다. 말하는 그녀는 무감하고 권태로운데, 듣는 사람에게는 끔찍하고 자극적인 이야기이기도 했다.
사람들이 충격받은 얼굴로 바실리를 바라보았다. 진짜냐고 묻는 듯했다. 입을 가린 채 비명을 삼키는 여자도 있었고, 욕설과 함께 헛웃음을 터뜨리는 남자도 있었다.
“율리아!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거야. 아니야. 절대 아니야. 어떻게 그런…… 어떻게 그렇게 말해!”
“오빠, 그만해.”
있는 줄도 몰랐던 크리스틴이 뒤에서 바실리의 팔을 잡아당겼다. 자존심 상해 나타나지 않을 줄 알았는데, 용케 졸업식에 참석했다 싶었다.
“율리아, 너도 그만해.”
“자존심 상하셨겠네요, 크리스틴 아가씨.”
크리스틴이 이를 꽉 깨물고 율리아를 노려보았다.
“이거, 갖고 싶었을 텐데.”
율리아가 훈장을 꺼내 손에 들고, 아무렇지도 않게 만지작거렸다.
“율리아, 너 왜 이래. 응? 꼭 다른 사람처럼……. 내가 어떻게 해야 할까. 뭐든지 할게. 부탁이야, 내 아가씨. 이러지 말고 내 얘길 좀 들어…….”
바실리의 말이 길어질수록 모여든 시선이 많아졌다. 동시에 크리스틴의 얼굴도 깨질 듯 위태로워졌다.
율리아가 웃으며 속삭였다.
“뭐든지 하겠다고?”
“그래, 뭐든지 할게.”
“그럼 도련님도 죽어 보세요.”
바실리와 크리스틴, 그녀의 뒤에 서 있는 카루스에게만 들릴 법한 목소리였다.
“율리아!”
“혼자 눈보라 치는 산맥에 갇혀 덜덜 떨면서, 손발이 얼어붙는 걸 느끼면서, 오지 않을 사람을 기다리며 울고 절망하고, 그러다 암살자들의 손에 죽어 보라고.”
한 서너 번쯤? 그러면 혹시 모른다. 이 비루한 평민이 귀한 도련님을 용서해 드릴지도.
율리아는 바실리를 보고 흥분하지 않았다. 소리를 지르거나 악다구니를 쓰지도 않았다. 그녀는 그를 한없이 업신여길 따름이었다.
사랑했던 과거가 그저 추억으로 남지 않아 다행이다.
짓밟히고 무너지고, 배신당하고 죽기까지 했던 여덟 번의 과거가 차곡차곡 쌓여 단단한 대지가 되더니 그녀의 영혼을 우뚝 세웠다. 무너지지 않는 성이 되었다.
“비켜요, 길 막지 말고.”
율리아가 걸음을 옮기자 그들을 중심으로 둥글게 모여 있던 사람들이 천천히 길을 내 주었다.
“율리아, 잠깐만!”
바실리는 그를 잡아 세우는 크리스틴을 뿌리치고 율리아에게 오려고 했다. 그는 가증스럽게도 율리아의 말에 상처라도 받은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카루스가 그를 막았다. 그가 율리아의 뒤에 슬쩍 끼어들어 넓은 등으로 바실리의 접근을 막았다.
카루스뿐만이 아니었다. 주위에 있던 사람 중 상당수가 율리아를 위해 바실리의 접근을 막았다. 바실리는 그저 인파에 갇힌 채 멀어지는 율리아를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그날 저녁, 저택으로 돌아온 크리스틴은 달리듯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 손에 잡히는 모든 것을 집어 던졌다.
비명을 지르고 울며 몸부림치는 딸을 보고 놀란 후작 부부가 달려왔지만, 크리스틴을 달랠 수는 없었다.
“그러게 왜 대리 시험 같은 걸 시켰어요? 왜요! 내가 그 애보다 못할 게 뻔하니까? 그래서 그랬어요? 4년 동안 내내 자존심 짓밟혀 가면서 남의 이름으로 시험 보게 하더니, 이게 뭐예요! 그 훈장을 얼마나 갖고 싶었는데!”
“크리스틴, 얘야.”
“이게 다 엄마 아빠 때문이에요! 그냥 처음부터 내 실력으로 했으면 결국엔 율리아를 이길 수 있었을 거라고요! 그러면 적어도 그동안 율리아가 나 때문에 2등을 해 준 게 아니냐고 수군거리는 소리는 듣지 않아도 됐겠죠!”
그렇게 말하면서도 크리스틴은 그런 자신이 혐오스러워 견딜 수가 없었다.
율리아는 저가 가져가야 할 마땅한 명예를 챙겼을 뿐인데, 그게 이렇게까지 화가 나다니. 자신이 역겨워 진절머리가 났다.
“오빠가 오늘 밖에서 무슨 짓을 당했는지 알아요? 그 많은 사람 앞에서 엄마 아빠가 율리아에게 암살자를 보냈다고, 평민 여자를 가지고 놀다가 죽이려고까지 한 파렴치한 귀족이라고 폭로를 당했다고요!”
“뭐라고? 그게 정말이냐?”
후작이 짙은 눈썹을 크게 우그러뜨렸다. 딸을 달랠 때는 한없이 자상해 보이던 후작의 얼굴이 순간 괴물처럼 보였다.
“잘난 귀족의 위신 세우려다가…… 나는 이렇게 창피를 당하고, 오빠는 이제 얼굴도 들지 못하고 다니게 됐어요. 만족하세요? 만족하시냐구요!”
“걱정하지 마라, 얘야. 그 평민 아이가 뭐라고 지껄였건 사람들은 금방 잊어. 결국엔 귀족의 편이 된단다.”
“공주님도 과연 그렇게 생각할까요?”
크리스틴이 물었다.
후작이 신음하며 한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그의 아들 바실리 마조람은 조만간 왕의 딸과 약혼식을 치르게 되어 있었다. 이 일이 자존심 강한 공주의 귀에 들어가면 일이 틀어질지도 몰랐다.
“나가세요. 혼자 있고 싶어요. 오빠한테나 가서 정신 차리라고 전해 주세요. 율리아는 이제 오빠를 증오하는데…… 오빠는 아직도 그 애를 사랑하는 것 같으니까.”
바보같이.
침대 위에 엎드린 크리스틴이 큰 소리로 울음을 터뜨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