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화
* * *
“바실리 마조람?”
봄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저녁, 외출에서 돌아온 카루스가 율리아에게 다가와 물었다.
“네?”
율리아는 바바슬로프와 함께 식사 중이었다. 커다란 닭 다리가 두 사람의 손에 사이좋게 하나씩 들려 있었다.
“그 남자인가? 너를 눈보라 속에서 얼어 죽게 내버려 뒀다던 녀석 말이다.”
“그건 왜 물으세요?”
“바실리 마조람이 곧 왕의 딸과 결혼할 거라는 소문이 무성해.”
“흐음.”
율리아가 알 수 없는 비음을 내며 닭 다리를 물어뜯었다. 기름진 고기에 작은 잇자국이 남았다. 그녀는 그리 기분이 나빠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고 카루스의 말을 아예 무시하는 것도 아니었다.
“아무렇지도 않나?”
“제가 어떤 반응을 보이길 바라세요?”
카루스의 차가운 시선이 율리아의 얼굴을 꼼꼼하게 훑었다. 그녀는 그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두 사람 사이에 차갑고 뜨거운 기운이 부딪치며 긴장을 부추겼다.
“내가 체할 것 같아.”
바바슬로프가 중얼거렸다.
율리아를 관찰하는 걸 포기한 카루스가 의자에 앉아 말했다.
“인원을 나누어 여관을 옮길 생각이다. 너를 찾는 하이에나들의 숫자가 늘었어. 하이에나가 아닌 자들도 너를 찾고 있고.”
그건 아마 바실리 마조람이 따로 고용한 용병일 것이다. 율리아가 그렇게 말하자, 카루스가 미묘하게 얼굴을 찡그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미련이 남은 건가?”
“그 남자는 저를 버리지도 못하고, 구하지도 못하고, 무시하지도 못하는 등신일 뿐이에요.”
“뭐?”
“집사가 하이에나를 고용했다는 건 후작이나 후작 부인에게서 금화가 나왔다는 거고, 하나뿐인 후계자가 그 사실을 알고도 막지 못했다는 건 그 자식이 등신이라는 증거…….”
“쉿.”
카루스가 낮게 경고했다.
그들은 여관 1층 식당에서 식사하고 있었다. 그런데 열린 문밖에서 서너 명의 용병들이 여관 주인에게 금화를 건네며 뭔가를 묻고 있었다.
“율리아.”
카루스가 눈짓으로 테이블을 가리켰다.
율리아는 되물을 것도 없이 재빨리 몸을 낮춰 테이블보 아래로 들어갔다. 율리아가 먹던 음식과 식기들은 바바슬로프에 의해 어느새 카루스 앞으로 옮겨져 있었다.
입이 무거운 여관 주인은 천연덕스러운 얼굴로 아무것도 모르겠다고 대답했고, 용병들은 여관 식당으로 들어와 홀을 꽉 채운 손님들을 눈으로 한 바퀴 둘러보았다.
“이봐. 어디서 온 자들이냐?”
용병 하나가 카루스와 바바슬로프에게 다가와 물었다.
율리아가 먹던 닭 다리를 집어 그녀의 작은 잇자국을 없애 버린 카루스가 고기를 우물거리며 말했다.
“그건 알아서 뭐 하게?”
“우리는 귀족 나리에게 고용된 용병…….”
“여기에 귀족 나리한테 고용 안 당해 본 용병이 있나?”
카루스의 말에 여관을 채우고 있던 남자들이 껄껄 웃었다. 그들 중엔 사복을 입고 정체를 감춘 기사단도 있었고, 해적이나 용병도 있었다.
“신분을 밝혀라. 안 그러면 좋지 않은 일을 겪게 될 거야.”
“귀찮아 죽겠군.”
카루스가 망토를 펄럭이며 안쪽 주머니에서 신분증을 꺼내 테이블 위에 던졌다.
그건 그가 바이칸 제국의 전쟁 용병임을 증명하는 패였다.
“전쟁터에 다녀왔나?”
카루스의 신분증을 확인한 용병들의 눈동자에 작은 경외의 빛이 어렸다. 바이칸의 전쟁터에서 살아 돌아온 자들은 용병들 사이에서도 존경을 받았다.
“실례가 많았군. 푹 쉬게.”
그들은 바바슬로프가 낑낑거리며 신분증을 꺼내 주려고 하자 됐다고 손사래를 치며 물러났다.
“왜 내 건 안 봐? 야! 지금 사람 차별하는 거야?”
손님들이 다시 웃음을 흘렸다. 율리아는 테이블보 밑에서 기어 나와 카루스의 옆자리에 앉았다.
냅킨으로 입을 닦은 카루스가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식당 곳곳에 흩어져 있던 기사들에게 눈짓했다.
“여관 주인에게 사례하고, 인원을 나눈다. 누가 고발할지 모르니 서둘러.”
“알겠습니다.”
카루스가 약속을 지키기 위해 움직였다. 그는 율리아가 무사히 왕궁에 들어갈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서 하이에나로부터 그녀를 지킬 셈이었다.
빠르게 짐을 챙겨 밖으로 나온 기사들은 마치 모르는 사이처럼 각자 다른 방향으로 흩어져 걸었다.
아홉 번째 삶을 시작하면서 율리아는 몇 가지 계획을 세웠다.
그중 하나가 카루스의 부하들을 살려 그가 자신과 손을 잡도록 하는 것이고, 또 다른 하나는 브레웨 아카데미 훈장을 받아 왕궁 시녀가 될 수 있는 자격을 얻는 것이었다.
“율리아, 어느 왕족의 시녀로 들어갈 생각이지?”
카루스가 물었다. 그다지 곤란한 질문은 아니었는지, 율리아가 냉큼 대답해 주었다.
“오르테가 왕궁에서 마조람을 가장 싫어하는 사람이요.”
“뭐야. 그럼 우리 편이네?”
바바슬로프가 히죽 웃었다. 율리아가 그를 따라 웃었다.
“졸업식만 끝나고 나면 당신이 저 때문에 귀찮을 일은 없을 거예요. 시녀가 되어 왕궁으로 들어간 뒤엔 마조람도 함부로 저를 죽이려 시도하지 못할 테고요.”
“귀찮다니? 인마, 서운하다. 우리 중에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 아무도 없어. 그나저나 왕궁은 안전한 거야? 마조람이 그렇게 대단한 귀족 놈들이면 왕궁도 위험할 수 있는 거 아냐?”
바바슬로프가 눈꼬리를 축 늘어뜨리며 물었다. 걱정이 묻어나는 눈빛이었다.
율리아가 안심하라는 듯 그의 어깨를 두드렸다.
“걱정하지 마요. 왕자님이 저를 지켜 줄 거예요.”
“왕자님?”
카루스가 되물었다. 오르테가엔 여러 명의 왕족이 있었고, 그중엔 왕자라 불리는 자도 세 명이나 되었다.
“어느 왕자?”
“2왕자 레위시아 오르테가.”
율리아의 말에 의하면 레위시아는 오르테가 왕궁에서 마조람을 가장 경멸하는 왕족이었다.
어느 정도냐 하면 후작가의 후계자인 바실리와 마주치기만 하면 빈정거리고 싸우기 일쑤에, 크리스틴이 예의상 건네는 인사는 늘 무시로 일관하고, 후작 부부만 보면 저 병균 같은 것들 때문에 인간 세상은 곧 멸망할 거라고 악담을 흘리고 다녔다.
율리아는 그래서 그를 골랐다.
“마조람의 뒤통수를 후려칠 수만 있다면 시녀가 아니라 연인으로 삼아 달라고 해도 그러자고 할걸요.”
그 외에도 중요한 이유가 있었지만, 지금은 이렇게만 말해 두는 편이 좋았다.
카루스가 물었다.
“레위시아 왕자는 왜 마조람을 그토록 싫어하는 거지?”
“뭐 이것저것 있지만…… 제일 큰 이유는 그거겠죠.”
“그거?”
“왕자님의 친모가 왕의 애첩이기 때문이에요. 마조람 후작에게는 다음 대의 왕위 후보가 중요하지, 애첩의 아들 같은 건 거추장스러운 식충이에 불과하니까요.”
마조람 후작이 왕자인 레위시아를 천시하니까 경멸로 갚아 줬다는 이야기였다.
“레위시아 왕자의 영향력이 어느 정도기에?”
“알려진 것보단 강해요.”
“마조람으로부터 너를 지킬 수 있을 만큼은 되나?”
카루스가 묻자, 율리아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렇게 만들어야죠.”
만족할 만한 대답이 아니었는지, 카루스는 굳은 얼굴을 풀지 않았다.
그들은 브레웨 아카데미를 향해 가고 있었다. 흔들리는 마차 안에서 창밖을 살피던 율리아는 정면에서 느껴지는 따가운 시선에 고개를 돌렸다.
카루스가 자신을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다.
“또 궁금한 게 있으세요?”
“그것도 너의 그 과거 때문에 알게 된 것 중 하나인가?”
카루스는 율리아가 죽지 못하는 저주에 걸려 아홉 번이나 다시 살고 있다는 말을 믿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까지 그녀가 예측한 일들이 평범한 이유로는 설명되지 않는다는 것 또한 인정하고 있었다.
아카데미에 도착했다는 마부의 목소리를 듣고, 율리아가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오늘 바실리 마조람이 졸업식에 올 거예요. 저를 보고 이렇게 말할 거고요.”
문을 열자, 바깥엔 이미 많은 사람으로 가득 차 있었다.
“‘살아 있어서 다행이다. 내 아가씨, 얼마나 찾았는지 알아? 왜 나한테 오지 않았어?’”
“하!”
카루스가 입가에 조소를 머금었다. 그는 바실리를 몹시 같잖게 여기고 있었다.
“따귀라도 날릴 생각인가?”
“그보다 더한 거요.”
단호히 말하고 마차에서 내린 율리아가 인파 속으로 나아갔다.
* * *
성대한 졸업식이었다. 오르테가 최고의 학술기관인 브레웨 아카데미가 1년 만에 졸업생을 배출하는 날이었기 때문이다.
수석 졸업생에게 수여하는 브레웨 훈장은 엄청난 가치가 있었다. 그래서 교육열에 불타는 귀족들은 조금만 똑똑한 자식이 태어나면 넌 언젠가 브레웨 훈장의 주인이 될 거란 말을 입에 달고 살았다.
“올해의 수석 졸업생은…….”
높은 단상, 수많은 사람의 시선이 집중된 곳에 학장이 서 있었다. 그는 한 손으로 훈장을 높이 들어 올리고, 부리부리한 눈으로 누군가를 찾았다.
율리아는 학생들 사이에 당당하게 서 있었다.
학장이 율리아를 찾았다. 눈이 마주치자, 그가 웃었다. 착각이 아니었다. 늙은 학장의 얼굴에 아이처럼 짓궂은 미소가 걸리는가 싶더니, 졸업식장 가득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율리아 아르테입니다!”
충격과 의문, 감탄이 터져 나왔다. 모두가 이번 해의 수석 졸업생은 크리스틴 마조람일 거라고 믿고 있었기 때문이다.
“율리아라고?”
“진짜야? 크리스틴이 아니라?”
율리아가 움직였다. 놀란 학생들이 주춤거리며 길을 터 주었다.
율리아는 빽빽하게 붙어 서 있던 학생들 사이를 뚫고 당당하게 걸어 단상 앞으로 왔다.
평민. 고아. 후작가의 후계자를 유혹해서 도망치려던 여자.
그리고 브레웨 훈장의 주인.
“올해는 레위시아 왕자 전하께서 졸업식에 특별히 참석하신 바, 치하의 말씀을 듣겠습니다.”
웅성거리는 소리가 더욱 커졌다. 평민이 수석을 차지한 것도 놀라운데 왕족까지 행차하다니. 그것도 아름다운 외모로 젊은이들 사이에서 인기가 많은 레위시아 2왕자였다.
레위시아가 단상 위에 나타났다. 왕자가 미소를 짓더니 단상 아래를 향해 한 손을 내밀었고, 율리아는 그의 손을 잡고 무릎을 굽혀 인사했다.
“율리아 아르테.”
레위시아의 목소리가 넓은 졸업식장을 가득 채웠다.
“너의 노력에 경의를 표한다. 오르테가의 왕족으로서, 선물을 주고 싶구나.”
율리아와 레위시아의 눈이 마주쳤다.
어디 한번 원하는 걸 말해 보라며 의무적인 미소를 띠고 자신을 내려다보는 왕자에게, 율리아가 말했다.
“왕자 전하의 시녀가 되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