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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화 (7/319)

6화

또 그 미소였다. 칼처럼 선득하고, 아교처럼 끈적끈적한 미소. 앳된 얼굴에 걸맞은 순수함과 꼭 그만큼의 잔혹함이 공존하는 웃음.

죽어도 상관없다는 태도, 죽음 따위 두렵지 않다는 눈빛, 죽는대도 포기하지 않겠다는 의지.

카루스가 충고했다.

“그렇게 웃지 마라.”

“네?”

“난 너와 비슷한 사람을 몇 알아. 평범한 사람들은 이해할 수 없는, 칼날 위의 삶을 선택한 사람들.”

“그 사람들은 어떻게 살고 있는데요?”

“슬프고, 불행하게 살지.”

그런데도 웃는다. 그들의 미소는 보는 사람을 불편하게 만드는 재주가 있었다. 공허한 심장과 지독한 염증을 감추고자 만들어 낸 웃음이기 때문이다.

율리아가 두 손을 모아 무릎 위에서 깍지를 꼈다.

그녀는 마조람을 무너뜨리기 위해서 오르테가 왕궁에 들어가겠다고 말했다. 그리고 그건 카루스에게도 몹시 도움이 될 터였다.

“카루스 님.”

시선을 살짝 내리자 빗살 같은 속눈썹이 가지런히 드리워졌다. 붉은 입술이 벌어지며 동그란 앞니가 살짝 보였다.

“저는요. 마조람이 숨 쉬는 땅에선 아무것도 자라지 않게 할 거예요.”

맑은 목소리가 종처럼 울렸다.

“마조람의 성을 가진 자가 단 한 사람도 남지 않을 때까지 멈추지 않을 거고요. 마조람이 이루고자 했던 모든 꿈을 빼앗아 시궁창에 던져 버릴 거예요. 그들이 우리에게 저질렀던 잘못을 열 배, 스무 배로 돌려줄 수만 있다면…….”

아홉 번이 아니라, 아흔 번을 다시 살 수도 있다.

“복수는 이렇게 하는 거 아닌가요?”

율리아가 물었다.

슬프고 불행한 삶이라고 누가 장담하는가. 복수라는 달콤한 열매가 저 앞에 있는데, 손을 뻗지 않으면 그게 비정상인 거지.

“맞다.”

카루스가 대답했다.

“복수는 그렇게 하는 것이지.”

각오를 확인했으니, 일단은 네 부탁을 들어주겠다. 카루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 * *

바바슬로프가 걱정했던 것과는 달리, 율리아는 카루스와 함께 식사하고도 전혀 체하지 않았다.

오히려 긴 식사 시간 동안 그와 꽤 많은 대화를 나누었고, 식사를 마친 뒤엔 새 옷을 사라며 금화까지 받았다.

사흘은 금세 지났다.

율리아는 바바슬로프와 함께 브레웨 아카데미로 향했다.

도톰한 원피스에 작은 모자를 쓰고 긴 머리를 땋아 올린 그녀는 여느 부잣집 아가씨와 다를 바 없어 보였다.

“너무 긴장할 거 없어. 시험이라는 게 말이다. 될 대로 돼라! 이렇게 생각하면 잘되기 마련이거든?”

“긴장 안 해요.”

“난 했어. 내가 했다고. 시험은 네가 보는데 왜 내가 잠까지 설치고 지랄인지.”

마차에 오르기 전, 율리아보다 더 긴장한 바바슬로프가 같이 먹자며 따뜻한 초콜릿을 두 잔 사 왔다.

작은 컵에 담긴 초콜릿은 달콤하고 진했다. 율리아는 두 손으로 컵을 잡고 아주 조금씩 천천히 먹었다.

마차의 흔들림과 초콜릿이 주는 평온함에 취한 그녀가 오래전의 일을 떠올렸다.

언제였더라.

보육원 출신 평민인 율리아가 아카데미에서 두 번이나 수석을 차지했을 때였다.

시험을 앞두고 있던 율리아에게 원장이 찾아와 말했다.

“미안하다, 얘야. 이번 연말 평가에서는 꼭 마조람 후작 영애가 1등을 해야 해. 너 때문에 2등으로 밀렸으니, 영애가 그동안 얼마나 자존심이 상했겠니. 평민인 네가 그분을 이겨 봤자 득 될 게 하나도 없어. 귀족들은 자존심이 강해. 너도 알잖아.”

원장은 율리아를 붙잡고 몇 번이나 말했다. 너만 입을 다물면 모든 일이 잘 풀릴 거라고.

그때 자신은 뭐라고 대답했더라.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었나.

“물론 공짜는 아닐 거야. 후작님은 배포가 크신 분이지. 네가 좋은 데서 일하면서 편하게 살 수 있도록 뒤를 봐주실 거고.”

배포가 커서 그 후로 4년이나 계속 대리 시험을 치르게 했나.

“알겠지? 네 시험지에 크리스틴 마조람이라고 적는 거야. 영애는 네 이름을 적을 거고. 두 사람이 이름을 바꿔 쓴 걸 아무도 알아선 안 돼. 그러니까 문제를 조금 일찍 풀더라도, 다 끝날 때까지 기다렸다가 다른 애들이랑 같이 제출해.”

귀족의 자존심이라는 건 평민에게 대리 시험까지 시켜가면서 1등을 유지하는 거였나.

그 후 율리아는 크리스틴 마조람에게 아카데미 4년 연속 수석이라는 명예를 안겨 주었다.

어쩌면 이번 졸업시험도 비슷했을 것이다. 율리아가 없으면 크리스틴이 1등이다. 율리아보다 못했을 뿐이지, 크리스틴은 다른 학생들보다는 뛰어난 편이었으니까.

그런데 이를 어쩌나.

나는 이제 네가 그 작은 명예를 가져가는 것조차 참아 줄 수가 없는데.

초콜릿을 다 마신 율리아가 컵을 꽉 쥔 채 슬쩍 웃었다.

“바바슬로프.”

“응?”

“어디 가지 말고 시험장 앞에서 기다려 주세요. 부탁드려요.”

“알았다, 알았어. 하이에나 따위는 이 바바슬로프한테 맡겨.”

바바슬로프가 걱정하지 말라는 듯 율리아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려 주었다.

도착한 시험장엔 올해 졸업시험을 치르는 학생들이 미리 자리를 잡고 앉아 있었다.

율리아는 눈에 띄지 않게 조용히 들어가 맨 뒷자리에 앉았다.

“시험을 시작합니다.”

감독관이 빈 노트를 돌리자마자 여섯 개의 문제가 공개되고, 졸업 예정자들의 입에서 앓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이 해의 졸업시험은 문제가 어렵기로 유명했다. 율리아는 빈 노트에 정답과 의견, 해석을 빠르게 적어 넣었다.

얇은 펜이 춤을 추었다. 사각사각 소리가 시험장을 가득 채웠다.

“시간이 절반 남았습니다.”

감독관이 시간을 많이 흘렀음을 알려 주었다. 학생들은 아직도 1, 2번 문제에서 끙끙거리고 있었다.

율리아 혼자 6번까지 막힘없이 술술 답을 적었다.

그녀는 마지막으로, 이름을 적어 넣는 곳에 펜을 올렸다.

‘율리아 아르테.’

고풍스러우면서 시원시원한 필체였다. 율리아는 크리스틴 마조람이 아니라, 자신의 이름을 꽉 차게 써넣었다.

“시간이 거의 다 되었습니다.”

감독관이 마지막으로 시간을 알려 주었다. 학생들의 입에서 또 한 번 앓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드르륵 의자 끌리는 소리가 났다. 시험을 마친 율리아가 일어나는 소리였다.

시간이 아직 남아 있는데 벌써 노트를 제출하려는 학생이 있다니. 놀란 학생들의 시선이 모두 율리아에게 향했다. 감독관도 마찬가지였다.

율리아는 당당하게 걸어가 감독관에게 노트를 내밀었다.

그녀의 얼굴을 알아본 감독관이 노트를 펼쳐 보았다. 그러곤 그 안에 빽빽하게 적힌 정답과 해석을 보고 작은 감탄사를 내뱉었다.

율리아는 그에게 묵례하고 시험장 밖으로 걸어 나갔다.

“……율리아?”

그때 빠르게 복도를 걸어가던 율리아를 누군가 불러 세웠다.

크리스틴 마조람이었다.

얄궂은 일이었다. 물론 마주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긴 했다. 그렇게 되면 모른 척하고 바바슬로프와 함께 여관으로 돌아와야지, 다짐하기도 했다.

그런데 자신을 바라보는 크리스틴을 발견한 순간, 아주 심술궂은 마음이 들었다.

크리스틴은 경악한 얼굴이었다. 너무 놀라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는 모양이었다.

율리아는 크리스틴의 눈동자에서 순간마다 스쳐 지나가는 감정의 정체를 알았다.

반가움. 안도. 그리고 두려움.

크리스틴은 아직 어렸다. 후작이나 후작 부인처럼 독하게 단단해지지 않았다. 제 부모가 얼마나 사악한 인간들인지도 자세히는 몰랐다.

율리아는 생각했다.

너는 나를 보고 뭐라고 말할까. 살아 있어서 다행이라고? 그동안 걱정했다고? 너희 부모의 잘못을 사과한다고?

그럴 리가. 아니었다. 크리스틴은 이렇게 말할 것이다.

시험을 치른 거냐고.

“졸업시험…… 보러 온 거야?”

1등을 빼앗길까 두려워서.

“네 이름으로……?”

그러면 그렇지. 너희는 왜 이렇게 예상에서 한 치도 빗나가질 않을까.

갑자기 이 상황이 못 견디게 우스워졌다. 율리아가 크리스틴을 똑바로 바라보면서 웃음을 터뜨렸다.

“아하하하!”

때마침 시험 시간이 끝났음을 알리는 종소리가 아카데미 전체에 울려 퍼졌다. 시험장마다 많은 수의 졸업 예정자들이 쏟아져 나왔다.

“하하하…… 아하하하!”

율리아는 계속 웃었다. 그러면서 크리스틴을 향해 걸었다. 입을 꽉 다문 채 굳어 있는 크리스틴을 지나치면서, 율리아가 그녀의 귓가에 속삭였다.

“내가 미치지 않고서야 이번에도 네 이름을 써 줬겠어?”

“너…….”

한때는 크리스틴을 부러워하기도 했다. 왕국 제일이라는 귀족 가문의 외동딸. 그 지독한 후작 부부가 눈에 넣어도 안 아프게 생각한다는 어여쁜 아가씨.

그 아가씨의 작은 명예를 지키기 위해 처리되어야만 했던 평민 율리아 아르테는 이미 오래전에 죽고 없었다.

크리스틴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빠르게 멀어지는 율리아의 뒷모습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야! 너 왜 그래?”

미친 여자처럼 깔깔 웃으며 걸어오는 율리아를 보고, 바바슬로프가 재빨리 다가와 그녀의 모자를 내려 얼굴을 가렸다.

“아이고, 우리 애가 가끔 정신이 오락가락해서.”

사람들의 시선을 피해 빠르게 마차에 오른 바바슬로프가 율리아에게 은근슬쩍 물었다.

“시험 잘 봤어? 1등 할 수 있을 거 같냐?”

그제야 웃음을 그친 율리아가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율리아 아르테가 아직 살아 있고, 수도로 돌아와 아카데미 졸업시험을 치렀다는 소식이 마조람 후작가에 전해졌다.

후작은 집사에게 일 처리를 어떻게 하는 거냐고 짜증스레 물었고, 후작 부인은 하이에나들에게 금화를 두 배 주겠다고 전달했다.

크리스틴 마조람은 자신의 방에 틀어박혔다.

브레웨 아카데미 수석 졸업생에게 주어지는 명예로운 훈장이 율리아의 것이 된다고 생각하자, 자존심이 상해 견딜 수가 없었다. 그건 크리스틴의 오랜 꿈이었기 때문이다.

동시에 그런 자신이 혐오스러웠다. 자존심이 상했던 이유 역시 율리아를 도저히 이길 자신이 없기 때문이기도 했다.

마지막으로 율리아의 생존 소식을 들은 건 마조람의 고귀한 후계자이며, 한때 그녀의 연인이었던 바실리 마조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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