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율리아가 여관 복도에서 바바슬로프에게 붙잡혀 있을 때, 카루스는 유흥가 골목에 있는 한 허름한 전당포에 와 있었다.
“이게 누구신가.”
전당포 주인이 안쪽에서 문을 열고 튀어나왔다. 비쩍 마른 몸에 눈까지 내려온 더벅머리, 낡은 안경을 쓴 남자였다.
“카루스 님!”
“맥스웰.”
카루스가 남자의 이름을 불렀다. 그러자 그가 입으로만 활짝 웃으며 양팔을 벌렸다.
“우리 포옹할까요?”
“닥치고 앉아라.”
“매정하기도 하지.”
맥스웰은 킬킬 웃으면서도 카루스에게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그러곤 철창 안쪽 사무실로 들어가 의자에 앉았다.
“알고 싶은 게 있어서 왔다.”
“무엇이든지요! 맥스웰은 모르는 게 없답니다. 제가 오르테가에 기생한 지도 벌써 십 년이나 되었으니, 이 나라 왕족의 불륜 상대가 몇 명이고 사생아가 몇 명인지도 다 알지요.”
“율리아 아르테.”
“뭔…… 테?”
“조사해 와.”
맥스웰이 레몬색에 가까운 노랑머리를 벅벅 긁었다. 그러곤 율리아 아르테라는 이름을 반복해서 중얼거렸다.
“율리아 율리아 아르테 아르테 율리아 아르테 율리아…….”
“모르는 모양이군.”
“아, 기억났다!”
맥스웰이 벌떡 일어났다가 다시 앉았다. 그러곤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카루스를 향해 얼굴을 바짝 들이밀고 물었다.
“의외의 이름이어서 그랬죠. 최근에 오르테가에서 제일 유명한 평민 여자 이름이 사령관님 입에서 나올 줄 몰랐달까.”
“유명하다고?”
“굉장히요. 후작가의 후원으로 살던 고아가 그 집 귀한 도련님을 꾀어내서 사랑의 도피를 하려고 했거든요. 배은망덕하고 요사스러운 여자라고 소문이 자자했는데……. 근데 그 여잔 왜 알고 싶으십니까?”
“그건 나도 알아.”
“그 여자를 죽이려고 후작이 하이에나를 고용했는데, 그 여자도 실종되고 하이에나도 실종되었지요.”
“그것도 알아.”
카루스가 눈썹을 찌푸리며 말했다.
“내가 아는 것 말고는 아무 정보가 없나? 그림자 정보상이란 별명이 울겠군.”
맥스웰이 씩 웃었다. 그러곤 의자에 앉아 팔짱을 낀 채로 몸을 뒤로 물렸다. 핏기 없는 입술이 비죽거리며 얄미운 소리를 내뱉었다.
“저는 뭐 식은 밥인 줄 아십니까? 양념을 쳐 줘야지요!”
맥스웰은 특별한 상인이었다. 그에게 정보를 사고 싶으면, 두 배의 돈을 내거나 그에 상응하는 정보를 팔아야만 했다.
그리고 그 정보의 무게는 언제나 맥스웰이 마음대로 정했다.
하지만 그것도 카루스 란케아에게는 그다지 통하지 않는 규칙이었다.
“기사단으로 복귀하고 싶나?”
카루스가 물었다. 가볍고 무심한 어투였다. 하지만 맥스웰에게는 청천벽력 같은 소리로 들렸다.
“싫어요, 제가 왜요! 저한테 칼 쓰는 것보다 더 잘하는 일을 하라고 하셨을 때는 언제고!”
“나한테 장사하려고 하니까 괘씸하잖아. 그냥 기사단으로 와.”
“알았어요, 알았어. 뭔 말을 못 해, 진짜!”
더벅머리를 벅벅 긁던 맥스웰은 그제야 제대로 된 정보를 풀어놓기 시작했다.
“율리아 아르테는 남부 항구 보육원 출신입니다. 마조람 후작이 후원하는 여러 고아 중 하나였는데, 애가 영리해서 열여섯 살에 최고 수준의 아카데미에 들어갔어요. 그리고 다음 해부터 4년 동안 2등을 했죠.”
“2등?”
“그러다 후작가 후계자랑 정분이 났는데, 하필이면 그걸 들켜서 보복을 거하게 당했습니다.”
“무슨 보복?”
“후작이 보육원 후원을 끊어 버렸어요. 마조람 정도 되는 가문에서 그렇게 나오니까, 다른 귀족들도 모두 그 보육원을 외면했죠. 가난한 원장은 오래 버티지 못하고 애들을 배에 팔았어요.”
맥스웰이 쯧쯧쯧 경박하게 혀를 차며 말했다.
“그리고 뭐, 일꾼이랑 강제로 결혼을 시키려고 했다던가? 그래서 도망쳤다고 알고 있습니다.”
기구한 사연이었다. 바바슬로프가 이 자리에 있었다면 불쌍해서 못 봐주겠다고 중얼거렸을 만큼.
하지만 카루스에게는 아무런 감흥을 주지 못했다. 그가 정말 궁금해하는 건 따로 있었다.
“점술가나 예언, 혹은 사기꾼이라거나. 그런 쪽으로 일한 적이 있나?”
“예?”
“마조람에서 은밀하게 정보를 다루는 끄나풀로 썼다거나.”
“그럴 리가요. 그랬다면 그렇게 무력하게 당하고 도망치지도 않았겠죠.”
그건 맥스웰의 생각이 옳았다. 원하던 정보를 얻지 못한 카루스가 맥스웰에게 명령을 내렸다.
“조사해.”
“그 여자요? 왜요?”
“싫으면 기사단으로 돌아와도 좋고.”
“발바닥 주름까지 조사해 오겠습니다.”
맥스웰은 당장이라도 율리아 아르테에 대해 조사하러 뛰쳐나갈 기세였다.
의자에 앉은 채 엉덩이를 들썩거리는 그를 한심하다는 듯 지켜보던 카루스가 다시 입을 열었다.
“남부 함대가 해적이랑 붙어먹고 있다는 말이 사실인지도 알아와.”
“예에? 그게 진짜예요? 미쳤어! 그 미친놈들이 감히, 그랬다고? 등신이 아니고서야!”
“정보상이라는 놈이 사기꾼보다도 정보가 느리군.”
도대체 네놈을 어디다 써야 할지 모르겠다고 말하면서, 카루스가 전당포를 나섰다.
깊은 잠을 자고 일어났더니 머리가 맑았다. 따뜻한 물에 샤워한 덕에 여독까지 다 풀린 느낌이다.
율리아는 창밖에 높이 떠오른 해를 보고 지금이 정오에 가까운 시간이라는 걸 알았다.
“왜 이렇게 많이 잤대.”
“내 말이 그 말이다.”
바바슬로프가 불쑥 나타나 말했다. 문가에 서 있던 그가 입을 쩍 벌리며 하품을 했다.
“잘 잤어요?”
“악몽 꿨어.”
“유령 꿈?”
“네가 나한테 평생 총각으로 늙어 죽을 거라고 예언을…….”
율리아는 그에게 그럴 리가 없다고, 면도하니까 열 살은 어려 보인다는 칭찬을 해 주고, 같이 아침을 먹겠냐고 물었다.
그런데 바바슬로프가 무거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안 돼. 카루스 님이 너 데려오래. 나 혼자 먹을 거야.”
“저는요?”
“종업원이 올려다 줄 거야. 체하지 않게 천천히 먹어. 우리 사령관이랑 겸상하면 체한다?”
율리아는 황제랑 겸상해도 체하지 않을 자신이 있었지만, 그냥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카루스의 방으로 갔더니 그가 문을 열어 놓고 율리아를 기다리고 있었다.
“부르셨어요?”
“들어와.”
율리아는 노크할 필요도 없이 안으로 들어가 문을 닫았다.
사령관의 방은 넓고 쾌적했다. 부지런한 종업원이 율리아가 오기도 전에 식사를 모두 올려다 놓고 갔는지, 테이블 위엔 2인분의 식사가 푸짐하게 차려져 있었다.
율리아의 시선이 음식을 한차례 훑었다. 늦게까지 잤더니 배 속이 텅 비어서 꼬르륵 소리가 우렁차게 들렸다.
“먹어라.”
카루스가 율리아에게 쟁반을 밀어 주었다.
마음 같아서야 주린 배부터 채우고 싶었지만, 율리아는 가만히 의자에 앉아 그가 용건을 꺼내기만을 기다렸다.
율리아의 눈동자를 탐색하듯 바라보던 카루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우린 네게 목숨을 빚졌다.”
“신경 쓰지 않으셔도 돼요.”
“신경 쓰여.”
카루스가 율리아의 말을 막았다. 그는 그녀에게 목숨 빚을 갚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듯했다.
따지고 보면 카루스가 율리아를 여덟 번이나 살려 준 셈이지만, 그녀는 그냥 입을 다물고 그의 말을 들었다.
“너를 그냥 보내 줄 수도 없어. 산맥에서의 일도 그렇고, 남부 해군이 해적들과 내통하고 있다는 걸 확인하기 전까지는.”
“카루스 님.”
“그렇다고 너를 데리고 있을 수도 없다. 마조람 후작은 계속해서 하이에나를 보내 너를 쫓을 테고, 그러면 우리 임무에 방해가 될 게 뻔하니까.”
카루스와 그의 기사들은 당분간 신분을 감추고 활동할 계획이었다. 그러니 율리아 때문에 마조람에 정체가 탄로 나기라도 하면 큰일이었다.
카루스가 날카로운 눈으로 율리아를 바라보았다.
“말해 봐라. 내가 어떻게 해야 하는지.”
“네?”
“그동안 네가 했던 말과 행동들을 보건대, 여기까지 예상하지 못했다면 그게 더 말이 안 돼.”
그는 율리아가 했던 말을 모두 신뢰하지는 않았지만, 그중 대부분이 실제로 일어났으며 확인해 볼 만한 정보라고 판단했다.
율리아가 설핏 웃으며 말했다.
“제가 말하면, 그대로 해 주시는 거예요?”
“봐서.”
카루스의 복잡한 상황을 이해한다. 그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겠지만, 율리아는 누구보다 그가 처한 상황을 이해한다고 자부했다.
‘수상한 여자’에서 ‘믿을 만한 정보원’으로 승급하려면 그가 짊어지고 있는 짐을 하나쯤은 덜어 주는 편이 좋겠지.
“제 사소한 부탁을 몇 가지만 들어주세요. 그러면 카루스 님께 유용하면서, 동시에 당신이 저를 감시할 수 있는 곳에 제 발로 들어갈게요.”
“말해 봐.”
“사흘 뒤, 브레웨 아카데미 졸업시험이 있어요. 제가 하이에나들에게 잡히지 않고 무사히 그 시험을 치르고 돌아올 수 있게 도와주세요.”
“이유는?”
“졸업시험에서 수석을 차지한 자에게는 브레웨 훈장을 수여해요. 저는 그 훈장이 꼭 필요하고요.”
카루스가 눈썹을 슬쩍 찡그리더니 뭔가를 떠올렸다. 그러곤 하, 하고 짧게 웃었다.
“그렇군.”
왜 그러지? 율리아가 의아해하는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신경 쓸 것 없다. 계속 말해 봐.”
“평민이 그 훈장을 받으면 왕궁에 들어갈 수 있어요. 왕궁 시녀는 명예직이거든요. 귀족들도 욕심내는 자리죠. 그때 카루스 님은 제 후원자가 되어 주시면 돼요.”
“뭐?”
카루스도 이건 예상치 못했다는 듯 놀라 되물었다. 지금까지는 적당히 그러려니 하며 듣고 있던 그가 의자 팔걸이에 걸치고 있던 팔을 움직여 팔짱을 끼었다.
그러곤 율리아를 똑바로 노려보며 물었다.
“왕궁 시녀가 되려는 이유는?”
“왕족의 손으로…….”
율리아는 웃고 있었다.
“마조람의 목을 치기 위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