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복수자
마조람 후작을 무너뜨리기 위해선 바이칸의 힘이 필요하다.
율리아는 여덟 번의 삶을 살고 나서야 그 사실을 깨달았다.
마조람 후작은 개인이 아니었다. 수많은 가문과 그들 사이의 이해관계, 그리고 온갖 권력자들이 얽혀 있는 하나의 덩어리였다. 그리고 그 꼭대기엔 국왕이 있었다.
‘그래서 계속 실패했던 거야.’
후작을 무너뜨려도 왕이 건재한 이상 아무 소용없었다. 그녀는 개인이었고, 상대는 왕국이었다.
‘바이칸 제국의 힘을 이용하려면, 카루스 란케아를 손에 넣어야만 해.’
율리아는 계속 생각했다. 자신의 목표를 이루면서 카루스에게도 도움이 되는 길을 찾고자 애썼다.
그를 이용하고 버리는 방법도 있었다. 하지만 율리아는 다른 건 몰라도 그를 배신하는 짓만은 하고 싶지 않았다.
카루스 란케아는 매번 자신의 목숨을 구해 주는 은인이기 때문이었다. 그게 의도하지 않은 우연이라 해도 상관없었다.
자정에 가까운 밤이었다. 율리아는 카루스의 방문 앞에 서 있었다.
“카루스 님.”
다른 기사들은 고된 여정으로 쌓인 피로를 푸느라 낮부터 깊은 잠에 빠졌지만, 그녀는 아직 맑은 정신을 유지하고 있었다.
“드릴 말씀이 있어요.”
카루스는 대답하지 않았다. 깊이 잠들어서 그런 것 같지는 않았다.
“카루스 님은 없어.”
바바슬로프였다. 그가 복도 한쪽에서 어슬렁어슬렁 걸어왔다.
“들어가, 인마. 밤이 늦었다.”
“그쪽은 왜 깨어 있어요?”
율리아가 물었다.
어슴푸레한 등잔불이 복도를 밝혔다. 바바슬로프는 그 아래에 서서 난처한 듯 턱을 매만졌다.
“율리아, 난 네가 좋아.”
“저도 바바슬로프가 좋아요.”
“네가 하는 말도 믿어.”
“고마워요.”
율리아가 냉큼 대답했다. 적당히 미소도 지었다. 하지만 바바슬로프는 마주 웃어 주지 않았다.
“그래도 있잖아. 너무 수상쩍은 행동은 안 하는 게 좋아.”
그는 진심으로 율리아를 걱정하는 것 같았다.
“네가 마녀이건, 혹은 예언자이건…… 목숨을 구해 준 은인인데 가둬 놓고 심문하고 싶진 않아. 그건 좀 많이 야만적이거든. 내 말 알아듣지?”
“……네.”
“가서 자. 내일 아침에 맛있는 거나 시켜 먹자.”
그러곤 어색한 손짓으로 율리아를 방으로 이끌었다. 무척 조심스러운 태도였다.
율리아가 설핏 웃으며 그에게 말을 걸었다.
“저기, 바바슬로프. 미안해하지 않아도 돼요.”
“어?”
“당신이 저를 감시하고 있다는 건 처음부터 알고 있었어요. 그래도 저는 당신이 싫지 않아요. 진짜예요.”
“나도 그래.”
그러니까 그 칼, 감출 필요 없다고 율리아가 속삭였다.
의심받고 있다는 건 처음부터 알고 있었고, 그런 거로 서운해할 만큼 머릿속이 꽃밭인 것도 아니라고.
바바슬로프가 얼굴을 구기면서 웃었다.
“눈치 빠른 여잔 무서운데.”
그의 허리춤엔 중간 길이의 검이 절묘하게 숨겨진 채였다.
율리아는 바바슬로프가 그 칼로 자신을 죽인다고 해도 원망하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그건 그가 그녀에게 따뜻한 털장갑을 건네줬을 때부터 정해진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