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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화 (4/319)

4화

모닥불 불씨를 노려보듯 응시하던 율리아가 적절한 때에 장작 두 개를 보탰다. 불씨는 안정적으로 타오르고 있었다.

바바슬로프가 빌려준 털장갑을 품에 안고, 율리아는 카루스가 서 있는 방향을 바라보았다.

눈이 마주쳤다. 그도 마침 율리아를 보고 있었다.

냉소적인 눈빛이었다. 부하들의 목숨을 구하게 해 줬으니 은인이라고 불러야 마땅하지만, 첩자가 아니라는 보장이 없기 때문이다. 그녀는 그의 심정을 이해했다.

어디 한번 뒤흔들어 볼까.

“카루스 님.”

율리아가 그를 보고 슬며시 웃었다. 꿍꿍이가 느껴지는 미소였다. 카루스의 미간이 서서히 찌푸려졌다.

“제국군 남부 함대랑 해적들이 붙어먹고 있다는 거, 아세요?”

화살처럼 쏘아진 진실이 율리아의 입을 통해 잔인하게 흘러나왔다.

“미친.”

바바슬로프가 들고 있던 장작을 우르르 떨어뜨렸다. 가까이에 있던 기사들은 숨도 쉬지 않은 채 율리아를 바라보고 있었다. 소란스럽던 야영지가 불편한 침묵으로 가득 찼다.

카루스가 저벅저벅 소리를 내며 율리아에게 다가왔다.

“지금 뭐라고 했지?”

“오르테가 항구에 소금물 묻은 돈이 엄청 풀려 있어요. 해적의 돈이죠. 그 돈세탁을 누가 해 주고 있을까요?”

“귀족들이 하겠지.”

“마조람이에요.”

율리아의 미소는 이제 서리 칼날처럼 차가워져 있었다.

“당신은 마조람의 목을 쳐야 할 거예요.”

소녀처럼 앳된 얼굴에 포악한 짐승의 미소라, 카루스는 그녀에게서 시선을 뗄 수가 없었다.

일주일 뒤, 비가 왔다.

낮에는 짧은 소나기가, 밤에는 꽤 많은 양의 비가 계속 내렸다.

굵은 빗줄기가 쏟아지는 새벽이었다. 카루스와 그의 부하들이 오르테가 왕국의 수도 검문소에 들어섰다.

“어디서 오시는 분들입니까?”

“티타니아를 넘어서 왔는데.”

“어이구, 힘든 시기에 산맥을 넘으셨네. 들어가쇼. 여관 골목은 저쪽에 있소이다.”

개방적인 성향의 국가답게 그들은 검문이랄 것도 없이 통과되었다.

바바슬로프는 커다란 짐마차를 몰고 있었는데, 곁에서 말을 타고 있는 카루스에게 능글거리며 말을 걸었다.

“율리아가 알려 준 대로 하니까 그냥 통과해 버리네요. 진짜 신기하지 않습니까.”

“뭐가.”

“그냥요. 복덩이가 굴러들어 왔나, 싶기도 하고.”

으흐흐. 바바슬로프가 어깨를 떨며 웃었다. 카루스는 그런 자신의 부하를 한심하다는 얼굴로 노려보았다.

“오르테가는 반도 국가다. 산맥을 넘어오는 자들은 기껏해야 보따리상인, 약초꾼, 제국으로 돈 벌러 간 용병들일 뿐이야. 검문은 당연히 해적이 판을 치는 바닷가에서나…….”

“아이고, 알겠습니다. 누가 그걸 몰라요? 그냥 율리아가 불쌍해서 편 좀 들어 봤습니다.”

“불쌍할 것도 많군.”

“비 왔잖아요. 소나기 온 다음에 주룩주룩 왔잖아요. 이따 왕궁 앞에서 그 해방군인지 훼방꾼인지 하는 놈들이 시위 하나 안 하나 제가 가서 보고 올 거라니까요?”

“바바슬로프.”

카루스가 경고하듯 낮은 소리로 그를 불렀다. 움찔한 바바슬로프가 슬그머니 먼 산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마차 안에서 카루스와는 전혀 다른, 맑고 높은 목소리가 들렸다.

“바바슬로프.”

바바슬로프가 만면에 화색을 띠고 뒤를 돌아보았다.

“응? 왜?”

“이거 먹어요.”

마차 천막 사이로 작은 손이 튀어나왔다. 율리아였다. 그녀가 동그랗고 깊은 잔에 희뿌연 음료를 반쯤 담아 내밀었다.

“이건 또 뭐야?”

“우유에 꿀이랑 술을 섞은 거예요. 밖에서 마차 모느라 고생했잖아요.”

“네 몸이나 추스르라니까, 참.”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바바슬로프는 율리아가 만들어 준 음료를 빼앗듯 가져와 얼른 마셨다.

달콤하고 부드러우면서도 배 속이 뜨끈해지는 맛이었다. 부족한 듯 입맛을 쩝쩝 다시던 바바슬로프가 슬그머니 카루스의 눈치를 보았다.

그러곤 율리아에게 말했다.

“율리아, 한 잔만 더 만들어 봐. 사령관님이 노려보고 있어.”

“그럴까요?”

천막이 휙 걷어지더니 율리아가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아파서 다 죽어 갈 때는 감정도 없고 재미도 없는 여자인 줄 알았는데, 기운을 차린 뒤부터는 묘하게 신경에 거슬리는 행동을 많이 했다.

“드릴까요.”

율리아가 카루스에게 물었다.

“맛있는데.”

기사들도 그를 어려워해서 바바슬로프를 제외하곤 농담을 잘 건네지 않는데, 율리아는 그런 카루스가 무섭지도 않은지 태연한 얼굴로 말을 걸어 댔다.

카루스는 대꾸하지 않고 말을 몰아 앞으로 갔다.

매번 무시당하다 보면 시무룩해질 법도 한데, 율리아는 여전히 태연한 기색이었다.

강적이다. 강적이야. 바바슬로프가 그런 생각을 하며 설레설레 고개를 저었다. 그때 덩치 큰 기사가 슬그머니 다가와 율리아에게 말을 건넸다.

“나도 좀.”

“잠깐만요.”

천막 밖으로 머리만 내밀고 있던 율리아가 안으로 쏙 들어가더니 오래 지나지 않아 음료를 한 잔 더 들고 나왔다.

“고맙다.”

“다 카루스 님이 사 주신 건데요, 뭐. 제가 감사받을 일이 뭐가 있나요. 이 마차도 따지고 보면 기사님들 짐 실으려고 빌린 건데, 제가 그냥 뻔뻔하게 얻어 타고 있는 거고요.”

“그건 그렇지.”

덩치 큰 기사가 피식 웃더니 음료를 단번에 비우고 컵을 내밀었다.

“우린 아직 너를 믿지 않아.”

“알고 있어요.”

“그래도 이따가 오르테가 왕궁 앞에는 가 보려고 한다.”

날씨를 예상한 건 우연일 수 있다. 간혹 신통한 농부나 어부들도 날씨를 곧잘 읽어 내곤 하니까.

하지만 습격을 예고한 것도 모자라 해방군 시위까지 맞힌다면, 기사들은 앞으로 율리아의 말을 무시할 수 없게 될 것이다.

“카루스 님한테 여행자 여관으로 가지 말고 붉은 선원 모자가 그려진 여관으로 가라고 해 주세요.”

“왜?”

“몰래 들어온 거잖아요. 해적도 손님으로 받아 주는 여관으로 가야 입이 무거운 주인과 종업원들을 만날 수 있죠.”

바바슬로프가 율리아의 어깨를 두드리며 감탄사를 내뱉었다.

“어이구, 이 복덩이 자식.”

“그 이상한 말 좀…….”

“야, 인마. 너도 그 마조람인지 뭔지 그놈들한테 쫓기는 몸이라며. 하이에나가 언제 나타날지 모르니까 어떻게든 카루스 님한테 잘 보여서 우리 옆에 붙어 있어. 그래야 시체 안 치우지.”

“그놈의 시체 좀 그만 치워요. 대장이나 부하나…… 왜 그렇게 남의 시체를 자꾸 치워 준대.”

“치우지 마?”

“버려요, 그냥.”

죽은 다음에 시체 거둬서 좋을 일이 뭐가 있냐고, 율리아가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어차피 죽으면 열 번째로 가게 될 테니 별로 상관없었다.

그날 오후, 붉은 선원 모자가 그려진 여관에서 휴식을 취하던 카루스는 묘하게 흥분한 바바슬로프의 방문을 받았다.

그리고 그를 통해 오르테가 왕궁 앞에서 한 무리의 해방군이 기습 시위를 벌였다는 사실을 전해 들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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