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바람이 높은 소리를 내며 울었다. 겨울의 마지막 날을 기점으로 이 시기 산맥에는 늘 강추위와 함께 눈보라가 찾아왔다.
그러다 며칠이 지나면 봄의 시작과 함께 거짓말처럼 사라지는 것이다.
카루스와 그의 부하들은 떠날 채비를 모두 마치고 길목 어귀에 모여 있었다.
율리아가 나타나자 그들 모두의 시선이 한꺼번에 쏟아졌다.
미친 여자를 바라보는 동정심 가득한 시선이라니.
비련의 여주인공이 따로 없었다. 연인에게 버림받고 미쳐 버린 여자만큼 안쓰럽고 불편한 존재가 또 있을까.
어쩐지 웃음이 날 것 같았다.
마조람 후작가의 후계자를 목숨보다 사랑했던 과거는 첫 번째 삶으로 완전히 끝났다. 그런데 계속 같은 순간으로 돌아오니 더는 그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걸 증명할 길이 없다.
“이봐, 말 탈 줄 알아?”
바바슬로프가 율리아를 자신의 말이 있는 곳으로 이끌었다.
“진짜 이 어두운 밤에 출발합니까? 해 뜬 뒤에 가도 될 텐데, 굳이…….”
안내를 맡은 약초꾼 둘이 볼멘소리를 했다. 기사들이 무서워서 싫다고 거절은 못 하고, 의미 없이 신세 한탄이나 하는 것이다.
율리아가 그들에게 다가갔다.
“이거 받아요.”
장갑을 벗은 그녀가 약지 손가락에 끼고 있던 반지를 쑥 빼더니 약초꾼에게 내밀었다. 미련이라곤 한 톨도 없어 보이는 행동이었다.
“이, 이게 뭡니까?”
“수고비예요.”
“그게, 음. 기사님들한테 금화도 받았고요. 거, 괜찮소이다.”
일단 거절하긴 했는데, 반지를 바라보는 약초꾼들의 눈동자에 아쉬움이 가득했다. 율리아가 내민 건 그들의 눈에도 무척 값비싸 보이는 반지였다.
“알려지지 않은 길로 안내해 주세요. 큰길에서 절대 보이지 않는 산길이요. 위에선 아래를 볼 수 있고, 반대로 아래에선 위를 볼 수 없어야 해요.”
“예? 아니, 뭐.”
“우리가 떠난 뒤에 누가 와서 묻거든 모른다고 하세요. 당분간 산맥을 떠나 있으면 더 좋고요.”
율리아가 반지의 대가를 제시하자 약초꾼들의 얼굴에 두려움이 깃들었다. 보통 수상한 의뢰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먼 두려움보다는 눈앞에 있는 보석이 우선이었다. 저들끼리 눈빛을 주고받은 그들이 율리아가 내민 반지를 챙겨 주머니에 넣었다.
“약초나 캘 겸 멀리까지 다녀오죠, 뭐.”
고개를 끄덕인 율리아가 바바슬로프의 말에 먼저 올랐다. 승마를 배울 일이 없는 평민 여자치고는 날렵한 몸놀림이었다.
카루스는 여전히 율리아를 관찰하고 있었다. 그의 시선이 그녀의 차림새와 장갑을 훑고, 마지막으로 약초꾼들이 가져간 반지에 머물렀다.
“출발한다.”
그러곤 냉랭한 목소리로 출발 명령을 내렸다.
* * *
낭만주의자들은 가끔 오르테가 왕국과 바이칸 제국을 구분 짓는 산맥을 티타니아라고 불렀다.
겨울과 봄의 경계, 중앙 대륙과 남부의 경계, 산맥은 냉혹하면서 사랑스러운 요정 티타니아와 닮았다는 것이다.
이른 아침이었다. 노련한 약초꾼들만 안다는 산길을 따라 밤새 산맥을 넘은 카루스와 기사들은 멀리 동이 트는 하늘을 바라보며 헛웃음을 흘렸다.
“귀신이 곡할 노릇이네.”
그토록 매섭게 몰아치던 눈보라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눈은 고사하고, 두꺼운 구름 사이로 파란 하늘과 흰 햇살이 쏟아지고 있었다.
겨울과 봄의 경계, 그 말이 이토록 잘 어울릴 수가 없었다.
“진짜 눈이 그쳤잖아!”
바바슬로프는 자신의 품에 안기다시피 기대어 말을 타고 있는 율리아를 신기해 죽겠다는 얼굴로 힐긋거렸다.
그녀의 말은 모두 사실이었다.
산맥 어귀 은사시나무 군락지에 가까워졌을 때였다. 일행은 약초꾼들의 안내를 받아 본래의 경로보다 한참 높은 샛길로 향했다.
그렇게 가파른 절벽을 오른쪽에 끼고 조심스레 전진하던 그들은 절벽 아래에서 정체불명의 레인저 부대를 발견했다.
“카루스 님.”
정찰조가 조용히 아래를 가리켰다. 눈 덮인 은사시나무 사이마다 위장한 레인저들이 몸을 낮추고 석궁을 조준하고 있었다.
“정말 다행입니다. 그냥 맞닥뜨렸다면 크게 당할 뻔했어요.”
이쪽은 서른이 채 안 되는데, 저쪽은 백여 명이었다. 카루스의 부하들이 아무리 뛰어난 기사라고 해도 이런 곳에서는 기습에 대비하기 어렵다.
카루스의 강렬한 시선이 율리아를 샅샅이 훑고 지나갔다.
두 번째도 마찬가지였다. 여행자들의 마을이 얼마 남지 않아 확인해 보니, 수상해 보이는 자들이 지나가는 사람을 일일이 검문하고 있었다.
“너희는 이제 가 봐도 좋다.”
카루스가 길 안내를 맡았던 약초꾼들을 보내 주었다. 산맥을 거의 벗어났으므로 이제는 그들이 필요 없어진 까닭이었다.
“바바슬로프.”
“예.”
“여자를 깨워라.”
“예? 간신히 잠들었는데…….”
율리아는 산길을 내려오는 동안 몇 번이나 까무러쳤다. 어찌나 열이 심하게 오르는지, 바바슬로프가 일부러 장갑을 벗어 손을 차갑게 만든 뒤 이마를 식혀 주었을 정도였다.
한데 매정하기 짝이 없는 사령관 카루스가 겨우 잠든 율리아를 깨우라고 말했다.
“조금만 더 재우죠. 이러다 죽어요.”
“깨우라고 말했다.”
카루스는 율리아를 봐줄 생각이 전혀 없어 보였다. 바바슬로프가 걱정스럽게 율리아를 내려다보았다.
그런데 잠든 줄 알았던 율리아가 천천히 눈을 뜨더니 희게 질린 얼굴로 카루스를 바라보고 있었다.
“너는 내게 두 번의 습격이 있을 거라고 말했지. 첫 번째 습격은 은사시나무 군락지, 두 번째는 여행자들의 마을 입구라고.”
“……네.”
“솔직하게 털어놓을 기회를 한 번만 주겠다. 율리아 아르테.”
“저는 첩자가 아니에요.”
율리아는 카루스가 무슨 질문을 할지 다 알고 있었다.
“왕국을 팔아먹으려고 제국군에 붙은 기생충은 더더욱 아니고요.”
“증명해 봐.”
뭘 어떻게 증명해야 할까. 율리아는 자신이 아홉 번이나 다시 살고 있다는 걸 이미 다 말했다. 그녀의 말을 믿지 않는 건 카루스의 선택이었다.
예언이라도 해야 하나.
“일주일 뒤에 봄비가 올 거예요. 낮에 짧은 소나기가 한 번, 그리고 밤새도록 내릴 겁니다. 비가 그친 뒤에는 오르테가 왕궁 앞에서 해방군 청년들이 첫 공개 시위를 할 거고요.”
율리아의 말에는 한숨이 섞여 있었다. 이렇게 말하면 저들이 자신을 어떻게 바라보게 될지, 이미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마, 마녀냐?”
역시나. 바바슬로프가 어깨를 움찔거리면서 물었다. 그는 자신이 마녀와 함께 말을 타고 있는 건 아닌지 걱정하고 있었다.
기사들이 수군대는 가운데, 카루스 혼자 무덤덤했다. 그는 율리아의 말을 천천히 곱씹어 보더니 다시 물었다.
“날씨 읽는 법을 배웠나? 바다가 가까운 지방이니 그렇다 치고…… 해방군이라. 오르테가에 하찮은 불온 세력이 있다는 소식은 들었지.”
“제 말을 믿고 안 믿고는 당신의 자유예요.”
물론 그에 따른 결과는 당신의 책임이겠지만.
카루스는 율리아가 생략한 말까지 모두 알아듣고는 칼날 같은 웃음을 흘렸다.
“그럼 이것도 대답해 봐.”
“네.”
“우릴 습격하려는 자들은 누구의 지시를 받은 거지?”
수군거리던 기사들이 입을 딱 다물고 모두 이쪽을 바라보았다.
율리아가 갈라진 입술을 움찔 떨었다. 감추려고 노력해도 흘러나오는 저들의 살기 때문이었다.
카루스 란케아는 읽어 내기 어려운 남자였다. 그가 이 상황을 흥미로워하고 있는 건지, 아니면 분노를 억누르고 있는 건지, 그녀는 알 수가 없었다.
“제가 여기서 그걸 말하면 믿어 주실 건가요?”
“뭐?”
카루스가 눈썹을 꿈틀거렸다.
“믿어만 준다면 뭐든 대답해 드릴 수 있어요. 그런데…… 당신은 답을 이미 알고 계신 것 같은데요.”
이번에는 기사들의 시선이 율리아를 떠나 카루스에게 닿았다.
“사령관님.”
무리 중 가장 덩치가 큰 기사가 물었다. 우묵한 눈매에 살기가 넘실거렸다. 감히 황제의 기사들을 습격하려 하다니. 당장 적의 목을 베러 가자고 말할 기세였다.
카루스는 여전히 율리아를 응시하고 있었다.
“데네브라 황비겠지.”
그러곤 제국에서 그와 반목하던 황족의 이름을 입에 담았다.
기사들은 그럴 줄 알았다는 얼굴이었다. 지긋지긋한 분노와 경멸의 말이 쏟아졌다.
율리아는 그 광경을 차분히 지켜보았다.
“율리아.”
카루스가 그녀를 이름으로 불렀다. 처음 있는 일이었다. 놀란 율리아의 눈동자가 조금 확장되었다.
“당분간 우리와 함께 간다.”
“네. ……알겠습니다.”
“몸을 추슬러라. 내 부하가 시체 치우는 일을 하지 않도록.”
“명심할게요.”
카루스는 율리아의 대답을 기다리지도 않고 말머리를 돌렸다. 그가 먼저 출발하자 나머지 기사들도 그를 따라 움직이며 말을 몰았다.
하아. 율리아가 조그맣게 한숨을 내쉬었다.
“저기…… 마녀 아니지? 차라리 요정이라고 해 줄래? 나 그런 거 진짜 무서워하거든?”
율리아의 귓가에 바바슬로프의 목소리가 자장가처럼 들렸다. 그녀는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이다가 간신히 잠에 빠져들었다.
수도로 향하는 길, 일행은 좁은 강을 끼고 있는 구릉지에서 밤을 보내게 되었다.
이틀 만에 열이 내린 율리아는 기사들과 함께 부지런히 돌아다니며 마른 나뭇가지를 구해 왔다. 그녀의 초콜릿색 머리카락이 바람을 타고 이리저리 흩날렸다.
“아픈 사람한테 일 시키는 건 좀 그렇지 않냐. 우리가 그렇게까지 정 없는 인간들은 아니야.”
바바슬로프가 율리아에게 차라리 강으로 가서 낚시나 하라고 권했다. 그건 가만히 앉아 있으면 되니까.
하지만 사냥도 낚시도 이미 다른 기사들이 다 해 버려서, 율리아는 결국 모닥불 가에 앉아 불씨를 지키는 처지가 됐다.
“마차를 하나 구하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짐을 덜어내면 말들도 피로가 덜할 거고.”
“상인을 만나면 마차를 빌리도록 해. 빈 마차면 더 좋고.”
바바슬로프와 카루스가 나누는 대화를 들으면서, 율리아는 앞으로의 계획을 되새겼다.
이전의 삶에선 언제나 카루스의 부하들이 습격으로 죽었다. 그는 늘 혼자 살아남았다.
크게 분노한 카루스는 오르테가로 향하던 걸음을 돌려, 다시 제국으로 돌아갔다. 부하들의 복수를 하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정확히 1년 뒤, 다시 기사단을 꾸려 오르테가로 왔다.
‘1년이 빨라졌어. 카루스는 황제의 명령을 따르겠지.’
황제는 카루스와 그의 기사들에게 남부 함대가 왜 해적 따위를 상대로 고전하고 있는지 이유를 조사해 오라고 했다.
그러려면 그 함대가 주둔하고 있는 오르테가에 대한 정보는 필수였다. 제국에서 태어나 한 번도 오르테가에 와 본 적 없는 저 기사들은 남부의 귀족들이 어떤 족속인지 모른다.
‘나는 정보를 팔고, 그는 내게 힘을 실어 주고.’
괜찮은 관계가 될 것 같다. 의심하고 감시한대도 괜찮았다. 자신이 그에게 도움되는 존재라는 걸 증명하기만 하면 된다.
뭐가 좋을까. 율리아의 머릿속에서 수많은 정보가 떠올랐다가 가라앉았다. 몇 번이나 다시 살게 되니 이즈음에 일어났던 일이 가장 선명했다. 그중엔 바이칸 제국과 관련된 것도 많았다.
‘뭐든 괜찮아. 실패하면 다시 시작하면 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