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카루스는 이번에도 방을 나서지 못하고 발목을 잡혔다.
“저주? 미신이나, 신화 같은 것 말인가?”
“네.”
“믿지 않는다.”
그는 군인이며, 기사였다. 부하들의 목숨을 책임지는 사령관이기도 했다. 전쟁터에서 그따위 것에 기대 살다간 비명횡사하기 마련이라고 늘 생각했다.
뜬금없는 질문에는 이유가 있을 터였다. 카루스는 이번이 마지막이라고 생각하며 여자와 말을 섞었다.
“그런 건 왜 묻지?”
여자는 어느새 울음까지 그친 뒤였다. 맑게 갠 눈동자에 독이 퍼지듯 어둠이 드리워졌다.
이윽고 작은 입술이 벌어지더니 그 안에서 믿을 수 없는 이야기가 흘러나왔다.
“저는 죽지 못하는 저주를 받았어요.”
“뭐?”
“아홉 번이에요. 죽은 줄 알았는데…… 항상 이날로 돌아오죠. 당신은 매번 똑같이 말해요.”
여자는 카루스를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다.
“‘산맥 갈림길에서 얼어 죽어 가는 너를 발견했다. 암살자가 셋이나 붙었더군. 부하들이 모두 죽여 없앴지만, 다시 오지 않으리란 보장이 없어.’”
말을 하면 할수록 목소리가 단단해졌다. 죽음의 문턱에 다녀온 사람치고는 지나치게 담담한 태도였다.
원래 미친 여자인가. 미친 척하는 여자인가. 연인에게 버림받은 불쌍한 평민이라더니, 전혀 그렇게 보이지 않았다.
“카루스 란케아.”
여자가 말했다.
“이대로 내려가면 당신 부하들은 모두 죽어요.”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산맥을 완전히 벗어나기 전에 습격이 두 번 있을 거예요. 레인저들이 덫을 놓고 기다리고 있으니, 약초꾼들이 사용하는 골짜기 길로 우회해서 가세요.”
“뭐라고?”
“산비탈을 따라 내려가다 보면 은사시나무 군락이 나타나요. 거기서 한 번, 산맥 어귀 여행자들의 마을 입구에서 한 번.”
“지금 습격이라고 했나?”
“피하세요. 부하들을 잃고 싶지 않다면.”
내 말대로 하지 않으면 당신은 살더라도 부하들이 다 죽을 것이다. 여자가 경고했다.
“미친 여자의 헛소리라고 생각하셔도 상관없어요. 정 못 믿겠다면 절 방패 삼아 끌고 가셔도 괜찮아요.”
카루스의 눈가에 짙은 살기가 꼈다.
그는 여자가 한 말을 믿지 않았다. 그렇다고 완전히 흘려듣지도 않았다. 의심이 몸집을 키워 또 발목을 잡았다.
* * *
율리아 아르테는 저주받았다.
그녀가 그 사실을 처음 깨달은 건 두 번의 삶이 허망하게 끝난 뒤였다.
스물한 살, 미친 듯이 사랑했던 후작가의 도련님에게 배신당한 그녀는 연인을 기다리다가 눈보라 속에 갇혀 얼어 죽었다. 그게 첫 번째 죽음이었다.
그런데 눈을 떠 보니 카루스 란케아라는 이름의 제국군 사령관에게 구출된 뒤였다.
그녀는 그때 자신이 한 번 죽었다는 사실조차 깨닫지 못했다.
율리아는 마조람 후작가로 돌아가 연인에게 물었다. 그토록 사랑한다면서 왜 날 버렸느냐고, 왜 그 추운 곳에서 밤새 기다리게 했느냐고 따졌다.
그러다 살해당했다. 후작가에 고용된 하이에나에 의해서.
두 번째 죽음이었다. 이번에는 고통이 선명했다.
그녀의 목을 조르던 살수의 손, 할퀴고 긁고 몸부림쳤으나 무력했던 자신. 의식이 멀어지는 건 한순간이었고, 율리아는 그제야 죽음을 실감했다.
그런데 눈을 떠 보니 눈보라 속에 갇혀 죽어 가고 있던 그녀를 카루스 란케아라는 이름의 제국군 사령관이 구출한 뒤였다.
같은 날, 같은 곳, 같은 사람.
믿을 수가 없었다. 처음엔 자신이 질 나쁜 꿈을 꾸고 있다고 생각했다. 혹은 죽은 뒤의 삶이란 게 인간의 가장 불행했던 순간을 반복하게 하는 것인가, 하는 의구심이 들었다.
세 번째 삶, 율리아는 이번엔 자신을 위해 살아 보기로 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그녀는 삶에 대한 희망의 끈을 놓지 않은 상태였다. 마조람 후작가의 영향력이 미치지 않는 먼 곳으로 가서 평범하게 살면 행복해질 수 있으리라고 믿었다.
하지만 하이에나들은 율리아를 포기하지 않았다. 마조람 후작은 그녀의 시체를 확인해야만 직성이 풀릴 모양이었다.
왕국 밖까지 따라온 하이에나들의 손에 또 한 번 죽음을 맞게 되었을 때, 율리아는 마침내 복수를 결심했다.
세 번 죽었으니, 세 번 죽여야 직성이 풀릴 것 같았다.
네 번째부터는 복수하기 위해 살았다.
그녀는 마조람을 무너뜨리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더럽고 비열한 짓도 많이 했다. 처음에나 어렵지, 하다 보니까 점점 무뎌졌다.
어쩌면 그녀는 미쳐 가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렇게 다섯 번, 여섯 번, 일곱 번, 여덟 번을 살았다.
율리아는 귀족의 정보를 모아 사고파는 장사꾼이 되어 보기도 했고, 마조람 후작가와 반목하는 가문으로 들어가 승냥이처럼 살아 보기도 했다.
“실패하고, 또 실패하고, 성공할 뻔했다가 실패하고…… 배신당하고.”
율리아가 제 과거라면서 풀어놓은 이야기는 솔직히 놀라웠다.
미친 여자인 걸 모르고 들었다면 솔깃했을지도 모른다. 실제로 카루스는 방을 나서긴커녕 의자에 도로 앉아 그녀의 말을 끝까지 들어 주고 있었다.
“율리아 아르테라고.”
“네.”
“그럼 이제 후작가의 후계자는 사랑하지 않는 건가?”
그가 물었다.
그러자 의무를 이행하듯 술술 잘만 흘러나오던 율리아의 목소리가 우뚝 멈췄다.
그녀는 카루스가 그런 걸 물어볼 줄은 몰랐다는 듯, 눈썹을 움찔 떨었다.
“그걸 왜…….”
“말해 봐.”
카루스는 반드시 대답을 들어야겠다며 율리아를 재촉했다.
“네 말대로라면 몇 번을 죽어 가면서도 떨쳐내지 못했던 연인이잖아. 집요하게 복수에 매달렸던 것도 너무 사랑했기 때문이 아닌가.”
그의 말 속엔 비웃음이 배어 있었다.
“비극적인 사랑 이야기만큼 인간의 심금을 울리는 것도 없지. 좋은 소설이 될 뻔했군.”
율리아는 쉬이 대답하지 않았다. 검은색에 가까워진 녹색 눈동자가 탐색하듯 카루스를 응시했다.
“당신이 제 말을 믿지 않는다는 건 알고 있어요.”
“그래?”
“제가 어떻게 반응하는지 보려고 일부러 조롱하는 건가요? 안 그러셔도 됩니다. 이건 그냥…… 고해 같은 거니까.”
“그 고해의 대상이 왜 하필 나인지 그건 좀 궁금한데. 난 사제가 아니야.”
“제 목숨을 계속해서 구해 주고 있으니까요.”
카루스가 날카롭게 웃었다. 기가 막혀 내뱉은 헛웃음이었지만 그의 어두운 분위기 때문에 살벌하게만 보였다.
“변덕이었다.”
“알고 있어요.”
“널 발견한 건 내 부하들이었어. 눈 속에 파묻힌 마차에서 널 꺼낸 것도 내 부하들이었고.”
“그래서 이렇게 말씀드리는 거예요. 그분들을 구하려고.”
내가 왜 너랑 이런 얘길 계속하고 있는지 모르겠다고, 카루스가 중얼거렸다.
율리아도 이번에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입을 다물었다.
“하나만 더 묻지.”
“네.”
“그 이전의 삶에서도 내 부하들을 구하려고 애썼나? 약초꾼들이 쓰는 산길로 우회해서 가라고 날 설득했어?”
아니요. 율리아는 대답하지 않았으나, 카루스는 그녀의 침묵에서 대답을 읽어 냈다.
“율리아 아르테.”
카루스가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미친 여자의 헛소리가 길어지자 흥미를 잃어버린 그의 얼굴에선 이제 아무 감정이 느껴지지 않았다.
“자정에 출발하겠다. 너도 우리와 함께 간다.”
“……네.”
“내게 한 말이 거짓이라면 그 대가로 너는 열 번째 삶으로 가게 되겠지.”
카루스는 율리아를 죽이겠다고 말하고 있었다.
그녀는 두려워하지 않았다. 남의 일인 양 무덤덤하게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그를 향한 시선을 거두지도 않았다.
이상한 여자. 율리아 아르테는 정말 이상한 여자였다.
선악을 모두 품은 그녀의 얼굴엔 사악한 소녀와 정의로운 학살자가 공존하고 있었다. 뾰족할 정도로 선명하게 솟은 입술 산은 산호색에 가까웠다.
부하들이 치료사를 데려올 때까지, 카루스는 결국 그녀의 시선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해가 떨어지자마자 열이 오르기 시작했다. 몸은 무거운데 정신은 붕 떠올라 어지러웠다.
그래도 율리아는 약을 먹지 않았다. 치료사가 주고 간 가루약은 침대 옆 쓰레기통에 처박힌 지 오래였다.
잠들면 안 된다. 정신을 바짝 차려야 했다. 말 한마디, 행동거지 하나가 모두 중요하다.
카루스 란케아는 움직이기 어려운 상대였다. 그는 남의 말보단 자신의 판단을 믿었다. 직감이나 소문보다는 한 자루의 칼이 낫다고 여기는 자였다. 그러니까 조금도 빈틈을 보여선 안 된다.
이 모든 게 그를 위한 것이라 해도 마찬가지였다.
“이봐, 아가씨. 혹시…….”
카루스의 부하가 들어와 말을 걸었다. 그러곤 가쁘게 숨을 몰아쉬는 그녀를 보고 얼굴을 콱 찡그렸다.
“뭐야, 치료사 불러다 줄까?”
“괜찮아요.”
“하나도 안 괜찮아 보이는데.”
“괜찮습니다. 그런데…….”
카루스의 부하는 무슨 일이냐고 묻는 율리아의 질문엔 대답하지 않고, 침대로 성큼 다가와 커다란 손으로 그녀의 이마를 짚었다.
“이 미친, 왜 이렇게 뜨거워?”
그는 당장 밖으로 달려가 또 치료사를 불러올 태세였다.
율리아가 손을 뻗어 그의 팔뚝을 붙잡았다. 그러곤 숨을 짧게 들이쉬고 분명하게 말했다.
“사령관님이 곧 출발한다고 했어요. 폐 끼치고 싶지 않습니다. 단순히 열이 조금 나는 것뿐이에요.”
“이봐, 아가씨. 바깥에 날씨 봤어? 아직도 눈보라가 미친놈처럼 난리라고. 이대로 데리고 나갔다가는 어렵게 살린 목숨 뚝 끊어지는 걸 눈 뜨고 봐야 할 판인데, 우리는 뭐 꿈자리 안 뒤숭숭할 줄 알아?”
“괜찮아요.”
“난 안 괜찮아. 가서 치료사 데려올 테니까 기다려 봐. 도대체 카루스 님은 널 왜 데리고 가겠다는 건지.”
“그게 아니라, 눈보라는 곧 그칠 거예요. 금방 맑아질 테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그걸 아가씨가 어떻게 알아? 뭐…… 점술사 뭐, 그런 건가?”
그런 건 아니지만, 안다. 율리아가 고개를 저으며 몸을 일으켰다. 산발한 머리카락을 단정히 모아 묶고 망토를 머리까지 뒤집어쓴 그녀는 테이블 위에 어지러이 흩어져 있는 자신의 짐을 바라보았다.
“내 이름은 바바슬로프야.”
카루스의 부하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율리아는 짐을 한데 모아 쓰레기통에 처박은 뒤, 그에게 대답했다.
“율리아예요.”
“아가씨는 나랑 같이 말을 타고 가야 해. 내가 막내거든.”
“네.”
“약초꾼한테 물어보니까 샛길로 내려가는 건 조금 위험할 수도 있다던데. 괜찮겠어?”
“상관없어요.”
“나 참…….”
바바슬로프는 할 말이 많아 보였다. 그로서는 이 정신 나간 여자 때문에 일정이 바뀐 게 불만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그 사실을 지적하는 대신 율리아에게 자신의 털장갑을 쥐여 주는 쪽을 택했다.
“냄새는 좀 고약하지만 따뜻할 거야. 비싸게 주고 산 거거든.”
“……고맙습니다.”
그가 장담한 대로 장갑은 따뜻했다. 손을 넣자마자 손끝이 간질거리는 느낌이 들었다.
율리아는 그 자리에 선 채 커다란 장갑을 멀거니 응시했다. 그녀의 입술 끝이 살짝 올라가 작은 미소를 만들어 냈다.
“가자.”
바바슬로프가 먼저 걸어가 문을 열어 주었다.
율리아는 그에게 고개를 살짝 숙여 감사를 표하고 집 바깥으로 나갔다.